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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것이나, 우리를 이롭게 하는 것이나,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위한 필요를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봉착한 문제를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알고 보면 하나님을 종으로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알라딘의 램프 안에 있는 능력 많은 종과 같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로 내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때에는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세상 사람들이 피하고 싶고 터부시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의 모양이나 형편에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고 여길 때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인생의 문제,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실 것이라는 것을, 다른 신들은 못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 여깁니다. 그런 믿음에는 심지어 하나님을 위한 것을 구하는 것이 고귀한 것으로 둔갑해 있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고귀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믿음에 대하여 어둡습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부르심에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에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부르신 이의 생각에 합당한 순종을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들었다는 믿음의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사람들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였더니 들어 주셨다는 소문이나 간증을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들은 믿음은 바울 사도가 받음 계시에 합당한 것임을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대로 사람을 택하시는 것과 같은 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예정하신 것이 있어 그것을 세상에 펼치시고 또 아들을 사람과 같이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그것을 말씀하시매 어떤 이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의 말씀으로 순종하므로 택하심을 입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고 그들에게 또한 임재하시는 것과 같이,


바울 사도 또한 하나님께 받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전하였더니 그 중에서 그것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있어 그들을 성도라 또 신실한 자들이라 부르고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에 저희가 있음을 보증하고자 편지를 쓴 것과 같은 구조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안에 있는 계시가 바울 사도에게 들린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믿음이 되었다는 것이 곧 계시의 정신과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극히 수동적이며 순종적인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에 있어 땅의 의사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땅은 하늘의 변화를 표현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온통 풍족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자기 생각도, 자기 존엄성도,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나 신념과 같은 것도 필요 없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학이나 방언과 같은 것은 더더욱 필수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 그 하나입니다. 인생은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고 있다면 존재의 목적이 있을 것이니 그 목적을 알고자하는 마음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돌을 통해서라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그 아들까지 보내셔서 이를 말씀하셨으니 사람은 그것을 듣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다 말씀하신 것을 모르겠다며 연구한다는 것이나, 그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산에 올라 기도하거나 순례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방향이 완전히 거꾸로 된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서를 읽고 들음에 있어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우리가 인생이니 창조주께서 정하신 그 인생의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이며 택하심을 입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한 이들, 신실한 자들이라고 한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며, 또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신 이들이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에베소서 뿐 아니라 성경을 대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한다면, 이 성경을 통하여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탐구하거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복을 주실 때 어떤 복안을 가지고 계신지 학문적으로 연구하거나 기도한다는 자들에게 물으려 할 것이 아니라, 이 성경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학을 배경으로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지위나 재산의 정도와도 무관합니다. 성경이나 어떤 윤리를 잘 지켜내는 신념이나 습관이나 과거 공로를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미 바울 사도가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한 것들입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의 말씀은 그런 것에 배경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황금마차 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말구유에 오셨다는 것에서 이미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여 무엇을 들으려고 합니까? 좋다는 신학을 전공하고, 크고 좋다고 하는 교회에서 시무한 이들의 말을 들으려하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가 배설물로 여긴 것들에 가치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런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바라는 바가 역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 그것이 영광과 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좇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라는 바를 이루려면 하나님께 어떤 환심을 사야 하는지를 궁리하면서 그 하나님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며 알고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방황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좇고 있으니 그것이 방황인 것입니다. 모르는 것을 좇고 있으니 또한 방황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것을 믿음이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그것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결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에 있으니 시험을 앞두고 기도해야 하는지 공부해야 하는지와 같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들을 토론이랍시고 토론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뜻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베소서에서 바울 사도가 들었다는 믿음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고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들어가는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시고,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창조하신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믿고, 그것을 알았을 때 그것에 인생을 드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바울 사도가 들은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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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1장 마지막 부분에서 ‘교회’를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함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곧 신실한 사람들의 사랑에 관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 교회가 된다는 배경을 설명합니다. 교회가 모일 공간을 준비하고 목사 자격증 가진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시작하면서 바울 사도가 예정에 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형식적으로 볼 때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앞선 글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바울 사도가 어떻게 서신을 기록하였든 저자인 바울 사도가 의도하는 바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수신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사랑 안에 있는 성도와 예정함을 입은 사람 그리고 바울 사도가 교회로 여기는 공동체의 구성원은 모두 같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자기 심령의 어떠함은 무관하게 육신이 교회에 등록되어 있고, 그래서 일요일이면 예배당이란 건물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쉽게 성도라고 하는 시대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자신의 모습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성도에 합당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또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예정하심에 순종된 사람인지, 그리고 자신이 있어 교회가 되는 교회에 속하였는지를 반추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신앙의 터전이자 기반입니다. 이것은 아주 핵심적인 것이지만 한편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미 형성된 교회에 대하여 어떤 고찰도 없이 그저 교회로서 바로 수용해버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교회를 아무런 고찰 없이 교회로 인정하고 신앙생활을 할 거라면 교회에 만족이 되고,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니는 곳을 교회라고 인정하는 것에는 어떤 거부감도 가지지 않으면서 정작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신 교회에 순종이라고는 눈곱만큼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분명히 있음에도 서로 모여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가 설교한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고, 유투브에 있는 설교 무엇이 좋다고 말하고, 교회의 행정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비판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성경을 알고자 논쟁한다면 좋을 텐데 모든 관심과 논쟁이 형식에 관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수업시간에 딴 짓하고 학원이나 동영상으로 공부할 생각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새는 쪽박은 들에 가도 새는 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냥 종교인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교회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방향성입니다. 교회라는 건물과 목사라는 자격을 기반으로 외형을 먼저 갖추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가 자격을 취득해서 설교를 잘하면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방향이 교회의 기반이 되는 요소들을 먼저 갖추고 그것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라는 생각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교회가 되는 정상적인 방향이라면 예수님께서도 먼저 교회부터 세우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이 계실 때는 율법에 의한 회당은 있었지만 교회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교회에 대하여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심령에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고, 그렇게 서로 만나서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에 서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랑을 나누며 공동체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를 교회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교회는 먼저 건물이나 목사라는 자격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불렀을 때 그 부름에 합당한 심령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뜻하신 그 예정하신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의미인 것을 순종한 사람들이 그 심령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자기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생명 가진 이를 찾아 만나고, 각자가 세상에서 육신을 소비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삶이 서로에게 위로와 의미가 되는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모일 때 그 모임이 바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 중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겠다.”고 하신 말씀이 이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적은 인원이 모여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정작 이 말씀에서 가장 핵심은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 외우듯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이름’이란 곧 정체성을 말하는 것으로, 사과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사과라는 생명을 가지고 있기에 사과라는 이름으로 모아 놓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진 생명 정체성, 곧 하나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그곳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으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이므로 교회가 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성도며,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그 예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와 존재 정체성으로 삶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며 하나님 아들인 것입니다. 그들 안에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있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과 같이 자기 심령에 있는 본성을 좇아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성도며, 그들이 예정하신 자들이며, 그들이 그리스도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이면 두 명이 만나든, 온라인에서 만나든, 전화로 만나든, 글로 만나든 그것이 교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 많은 사람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채워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먼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성도요 예정하신 자들이 모이는 것이 먼저고, 그렇게 모이니 교회가 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향과 다르게 형성된 교회는 역사가 몇 천 년이 되었다고 해도 예배당이나, 종교단체일 수는 있지만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건물에 십자가를 올려놓는 것은 무덤에 회 칠하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들은 교회를 먼저 지어 사람을 모으는 그 습성대로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하고, 형식인 육신의 평안이 곧 하나님의 영광이요 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본성대로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를 찾고 싶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의 존재 목적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 만남이 바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만나 교회에 속하고 몸의 지체가 되듯 교회의 일부인 존재가 되는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이것과 다르다면 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몰려다니고 그곳에 다니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성공을 밥 먹듯 한다고 해도 그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곳은 회칠한 무덤이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곳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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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몇 차례의 글에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예정론’이라는 것은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것임을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개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예정은 a man에 관한 것이 아니라, the Man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이 예정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본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예정하심에 순종하면 이는 하나님의 본업이 성취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을 때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예정하심의 내용을 1장 12-13절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서 그 약속을 믿어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듯 개인의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운명론적으로 생각하면 그렇지 않겠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일이 자신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아주 묘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뻐할만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자신이 기뻐할만한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기뻐하는 일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기뻐하는 것이고, 그들도 그것을 얻기도 하는데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육신의 수고로 충분히 얻는 것들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된다는 것이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들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그것을 충분히 얻어내기도 합니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차이를 두고 구분하려고 합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보니 세상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특히나 그 잘됨이 부정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고 생각하면 악한 일이고 악인이라 규정하고 악인이 흥하는 것이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와 그곳에 등록된 종교인들의 생각은 자신들이 기뻐하는 것, 하지만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기뻐하는 그것을 단지 교회에 다니는 자신이 이루었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기쁨의 기준이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런 생각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것은 목적에 수반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나 영광이나 은혜나 복의 척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 곧 인생에 대한 뜻이 순종된 사람에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동차를 산 사람이 기름을 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넘치게 사람 타는 자리까지 넣는다고 좋은 것이 아니듯, 하나님께서 육신에게 주시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수행하는 것에 적합하게 주시는 것일 뿐, 육신이 차고 넘치게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쌓을 곳이 없게 주신다는 것은 적재라는 개념이 아니라, 항상 사용함에 부족함이 없게 하시겠다는 것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과 23편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쁨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뜻을 세상에 말씀을 하시고 펼쳐 놓으시고 심지어 아들을 보내어 보이셨는데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이 나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뜻하는 바가 있어서 물건을 사거나 만들었는데 그 뜻하는 바가 행하여지면 기뻐하는데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그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만드신 사람도 그런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시는 것은 또한 하나님의 기업, 본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는 그 의를 나타내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주주의는 선거나 자유와 평등 등으로 표현되고, 자본주의는 시장 경제로 표현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의는 의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함 없는 믿음과 같이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 의가 표현되는 것은 하나님의 기업이고, 그것이 표현된 존재들이 그 기업의 소산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자들은 또한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서신에서 기업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가고 하나님의 본업의 소산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사회에서도 아들이 아버지의 업을 잇는 것은 그 자체로 영광으로 여김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 사이에 성령의 인치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거저 신비로운 것으로 여기지만 성령의 가장 본연의 정체성은 말씀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의, 세상 만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 예수 그리스도로 전해지고 표현된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보고 그것을 순종하고자 할 때 그 순종하는 마음이 생명이 되게 하여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이 되면 본성을 가지게 되고, 본성이 있다면 육신으로 그것을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경의 모든 것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면 성경은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성령이 없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잉태되는 것도 속에서 되듯, 하나님의 모든 말씀도 안에서 생명이 되어 알아지는 것이지 밖에서 글로 속으로 넣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인치심, 성령의 잉태하심이 있어야 구원을 받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니 성령이 역사하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복음을 들었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하였기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생명이 된 것이므로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에는 생명이 아니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것이니 그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겪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안에 있는 본성이 하나님의 의에서 잉태한 생명이므로 본성 자체가 하나님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이렇게 될 것이 아니라면 예수 믿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 육신으로 얻기도 하는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사사로운 기쁨이기는 하겠지만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이 주는 것으로 예수님으로 인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본성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귀한 것들을 보면서 억지로 참고, ‘난 저것 보다 귀한 예수가 있다.’며 다짐하는 것과 같은 본성으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학교에 넘쳐 납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공부한다는 것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쁨을 모릅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광고시간에 광고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을 만드신 목적대로 피조물이 순종되었을 때, 그것 하나에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본업이지 기업이며, 그 뜻하신 대로 된 자들은 그 소산이며, 그 소산이 되었다는 것은 또한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기업을 잇는 자며 같은 것을 기뻐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이라는 예정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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