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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육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것도 아니고, 쑥과 마늘을 먹으면 사람이 된다는 마법과 같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 혹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문자로 써 놓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실상 우리가 오랜 세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알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모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 그것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지으셨는지, 그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존재 목적에 관한 것이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이고, 우리 신앙의 근간 중의 근간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인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어졌기에 하나님의 성품, 그 뜻이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는 법, 그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고, 그것이 우리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밝히신다는 것이 바로 심령의 안목이 밝아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려면 마음에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밝음이라는 것이 주는 환하고 명확함을 그저 현상으로만 보기도 합니다. 밝음이라는 것은 결국 올바른 인식입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어떤 것도 바로 인식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다면 그 존재 목적을 알 수도 없고, 존재 목적대로 사용할 수도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두운 창고에 제 아무리 공구가 많이 있어도 보이지 않으면, 밝음이 없으면 그것은 오히려 온갖 위험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을 고난이라 또 어려움과 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만드셨는데 그 안에 살면서 모든 것을 험하고 어려운 것으로 인지하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인생 자체가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생이 허무하다고 하거나 또 ‘인생은 무(無)다.’라는 어리석은 말을 오히려 철학적 고백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사는지 모르는 것은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마음의 눈이 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먹을 것, 입을 것 달라고 하면서 그것이 풍족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기도하고 그것을 바랄뿐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이들은 그 심령이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즉 성도도 아니며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하는 것이라도 그 존재의 목적을 알면 최소한 어떻게 사용할지 기본은 아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치면 존재 목적을 안다는 것은 태어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장성하면서 그 생명의 본성을 풍성하게 드러내는 것과 같이 목적을 알아야 그 존재 목적을 풍성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대단하지만 그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면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듯, 인생도 그 존재 목적을 모르면 인생은 허무하다는 궤변을 철학이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육신이 마주한 일들의 결과를 알려고 합니다. 사실 그것도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 안에서 그것을 위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 자신이 겪게 될 일에 대하여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육신으로 마주할 일의 결과를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육신의 일이 어떻게 될지를 알고자 하는 것은 그 결과가 자신의 생각이나 기대와 맞는지를 보려는 것입니다. 마치 복권을 맞추어 보듯이.


즉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자기에게 일어날 일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자 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모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신앙의 형태가 자신에게 일어날 일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아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육신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 또 영광이라 생각하기에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마음의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생명이 없는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에 속하였다고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며, 성도도 신실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를 구하니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거나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소망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므로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망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가치고 귀한 성공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안목으로 보니 너무 귀한 것이니 하나님께서도 동일하게 그것을 귀한 것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소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그것을 부르짖고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설교하는 이와 그것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밝음이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듯,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도 하나님께 인생을 주신 목적이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 소망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구분되고(거룩해지는 것) 무엇이 육신의 것을 구하는 것인지, 무엇이 목적을 구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는 것이 바로 밝음이고, 그렇게 밝아져서 존재의 바른 인식이 기반이 되어 그 존재 목적의 풍성을 바라게 되는 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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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자신에게 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혹은 신에게 계시를 받아서 알게 되는 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거저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업이 어떻게 될 것인지와 같은 사사로운 것에서부터 지구가 언제 멸망하는지와 같은 것들을 아는 것이 계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기도원이나 영발 있는 사람에게 기도해서 알고자 하는 것이 여기서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계시는 그런 것과 전혀 다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육신의 축복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복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계시는 진정한 복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계시는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과 ‘성도의 기업과 그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대는 성경의 내용들이 상용화된 것 같은 세대입니다. 성도라고 하면 그냥 교회에 다니면 성도가 되는 것이고, 복음이라고 하면 신약시대에 교회에서 듣는 말씀이면 다 복음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 이후에 성경을 읽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상용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편리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모래성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에 대하여 온전히 알고자 하면 그때부턴 모르는 것이 다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신학을 비판합니다. 성경은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공부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공부해서 알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역설적으로 자기 안에 성령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성령이 없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계시도 지혜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있다면 신학 공부하여 얻은 자격증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하고, 육신의 평안과 안녕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가 있다면 분명히 그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육신과 심령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취득하여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공부를 해서 자기 안에 넣고 축적해서 그것을 다시 꺼내어 놓는 지식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습득한 것을 자기 안에 축적했다가 그것을 꺼내어서 지혜와 계시라고 하고, 그것에 반응하는 것을 다시 자기 안에 넣는 것을 성경에서는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라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오직 그리스도의 전하신 바를 보았을 때, 자기 심령이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임을 알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공부와 같이 자기 안에 축적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지하였을 뿐인데 그것이 자기 운명이요 존재의 목적이요 삶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과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바울 사도가 성도들이 알기 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들은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말씀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계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령이 오시면 다 알게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그것을 자기 운명으로, 인생의 정체성과 목적으로 순종하면 그 말씀이 순종하는 사람의 심령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주는 눈과 마음과 머리로, 보고 알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밑에 있던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는데, 그 장면이 삼위일체의 역사하심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을 보이시겠다는 뜻을 세우신 아버지 하나님과, 아버지의 의가 형식을 가진 육신으로 나타나서 그 뜻을 보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백부장이 자기 안에 수용했을 때 백부장이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 형식을 가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이가 성령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 성부 하나님께서 세우고 표현한 뜻을 의가 형식이 된 아들이 표현하신 것임을 사람이 알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는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되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그렇게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 바로 거듭난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이 있다면 그 심령에는 이전과 다른 생명이 사는 것이고, 생명이니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있어 거하고 있는 육신으로 그것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시가 나타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심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의 근원이고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정하심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정한 자리에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성도이니 성도들이 그것을 알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뿐 아니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아니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이루어진 기도인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령 그리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은 지혜와 계시는 모든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형식을 가진 존재인 세상과 사람으로 표현되고, 그 표현된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예수님께서 몸소 그 표현된 형식인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의와 뜻으로 창조된 모든 육신들에게 그 육신 가진 인생이 어떤 목적 아래에 있는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계획을 아는 것인 진정한 지혜요 계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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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5-23) 성도를 향한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7. 08:32 Writer : 김홍덕

사랑이라는 하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반대로 사랑에 대한 누구의 정의도 서로에게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듯 사랑이 그 누구라도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 있고, 누구라도 가질 수 있다는 사람이기만 하면 사랑의 대상과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이기만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진 몇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한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져야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즉 자력으로 태어나거나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은 그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 존재의 목적과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특별히 사람이란 존재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바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를 고찰하고 그 고찰 속에서 어떤 것이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여기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이 어떤 이들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남녀가 사랑하면서 때로 ‘너는 내 존재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 바로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또 부모들이 자녀를 위하여 살면서 그것을 자기 삶의 의미요 목적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 그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 것은 참 숭고하긴 하지만 그것은 사실 존재하고 난 다음에 부여된 의미요 목적인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자신이 ‘사람’이란 존재로 존재하게 된 그 이유와 목적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의 사랑에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살게 된 삶을 살아가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존재하게 된 의미까지 알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이 존재로서 주어진 다음 자신이 인식한 존재로서의 삶에 대한 의미로서 사랑을 하는 것 이상으로 가장 본질적으로 존재하게 된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인생의 의미를 자녀나 연인에게서 찾는 것은 가진 돈으로 연인을 위하여 혹 자녀를 위하여 아끼지 않고 지불하는 것이라면, 근원적으로 누가 그 돈을 주었느냐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자신이 일하고 돈을 벌 듯 인생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고, 또 자기 육신으로 수고한 열매를 가지고 연인에게 자녀에게 또 자기 자신의 인생에게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런 저런 모양의 사랑이라고 이름합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인생을 누가 주셨는지, 그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분명히 자기 힘으로 시작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조차 아닌데 그 근본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자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수고를 바탕으로 그것을 알려고 합니다. 과학이나 이미 인간으로 존재하기에 가질 수 있는 철학으로 인간으로 존재하게 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과학적인 기술이나 지식도, 철학적 사고도 인생으로 존재하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돛단배 안에서 선풍기로 돛에 바람을 불어 배를 움직이겠다는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듯 사람은 자신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는 절대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인생은 그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자기 삶의 본질적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존재하게 하신 이 외에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들 사회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이라도 만든 사람이 가장 잘 알고, 고장 났을 때 가장 잘 고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그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게 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큰 사랑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사랑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가장 본질적은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 안에서 존재하게 된 인생으로서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 안에서 사랑하는 그 사랑도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것임도 바로 하나님 사랑의 본질이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성도의 사랑을 들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이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존재하게 하신 의미를 알게 하는 존재들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라는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는 그 정체성은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의 목적을 가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인생의 존재 목적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신 이유와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알도록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종과 같이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알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건너뛰고 제 아무리 세상이 사랑이라 이름하는 행위를 한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랑장에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즉 성도가 아니라면 제 아무리 숭고한 희생으로 사랑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들은 성도의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 존재의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으로 그것을 표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행여 사람들 눈에 사랑으로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한 의미를 모른 상태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인생들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랑 같은 것은 영화 주제는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사랑, 성도의 사랑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것을 행하려면 먼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계신 창조주이심을 믿고 그 목적이 자기 삶의 의미와 본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들은 사랑은 오직 그것뿐이며,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도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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