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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그리스의 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상용구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그것은 양면성이 있는데, 하나는 그만큼 보편적으로 잘 알려졌다는 의미가 있고 또 하나는 그런 이면에 그 의미를 깊이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것을 정말로 제대로 안다면 지금의 교회들이 이런 모습을 분명히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풍요 속의 빈곤, 딱 그것입니다.


머리라는 것은 생각 곧 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로 인하여 그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고 사람을 구분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의는 그 존재의 유일한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머리를 중심으로 두 가지 병이 나옵니다. 하나는 귀신 들린 것과 하나는 중풍입니다. 하나는 머리의 생각이 몸의 목적과 다르게 빼앗긴 것이고, 또 하나는 머리의 생각이 몸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치료하셨다는 것은 머리의 생각이 몸을 주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또 그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라는 곳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의가 형상화되고 표현되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세상 가치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서 처형된 예수님이 머리라는 교회에서 세상 가치로 성공한 것을 그 아버지의 영광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중풍병자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예수님이 아닌 귀신 들린 것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거의 대부분 그렇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라면 당연히 예수님이 가지신 의가 교회에서 표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의가 십자가에 농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심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단지 그것만 표현하면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가 너무 많은 일을 하려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려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없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가 교회에 있으면 뭔가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는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치약을 주고, 축복 설교, 치리 설교와 같은 당근과 채찍을 동원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성에 관한 것은 그리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교회 안에 없으니 그 시늉을 하느라 여러 가지 일을 꾸미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는 생명의 법을 가지고 있기에 그 의가 있다면 본성과 같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나기만 하면 그 본성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이를 낳아서 가르치는 것은 본성의 사용법이지 본성 자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아이를 낳아서 식욕을 가르치지 않고, 배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 안에 있는 식욕에 맞게 공급하고, 배설한 것을 치우고 어떻게 스스로 할 것인지를 가르칠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도 가르침의 대부분은 보고 들은 대로 합니다. 그래서 애들 앞에서 찬물도 못 마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와 같아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있다면 그것이 교회 안에 왕성할 것이고, 새롭게 거듭나는 사람들도 그것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 배움도 본성 자체가 아니라 본성을 본성답게 쓰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성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서로 배우고, 삶을 공유하므로 서로가 그리스도의 의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에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머리되시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들이 모여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성되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가 없다면 이야기가 아주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는 것은 너무 쉽습니다. 일요일에 시간 내서 교회라고 십자가 걸어 놓은 곳에 가보면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대회를 하고, 봉사를 순번을 정해서 하고, 뭐 좀 하면 치약 주고, 잘못하면 서로 이것이 옳다면서 싸우고, 그러면 목사가 나서서 중재하고… 난리가 아닙니다. 그런 모든 것은 생명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 안 준다고 밥 안 먹는 사람이 없듯.


예수님께서 정말로 머리가 되신 교회는 뭔가 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된 사람들은 그 심령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있고, 그 생명이 본성이 되어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살기에,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서로의 삶이 그러하다는 것을 밝히 알고 있으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이유도 없고, 순번을 정하여 봉사할 이유도 딱히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효율을 위함일 순 있어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의가 종이 되는 것이고, 발을 씻기는 것이며,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생명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법이 본성이 된 사람들이 모여서 봉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봉사의 형평성을 위하여 봉사 순번을 정하거나, 많이 한 사람에게 교회가 나서서 치약을 싸 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되지 않고 있다면, 어떤 장성한 사람이 그것을 감당할 것이고, 행여 아무도 하지 않아 불편함이 생기면 모두가 그것을 감수하는 것을 기꺼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아직 익숙지 않은 장성하지 못한 생명들은 금방은 불평할 수도 있지만 장성한 자들의 모습을 금방 보고 배울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이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바로 교회의 형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교회를 세워서 사람을 모으면 세워서 사람을 모았듯 사람들에게 뭔가 작용을 하려 할 것이고, 생명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다보니 교회가 되었다면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이 교회의 본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몸은 어디까지나 머리의 생각을 표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 곧 그리스도의 몸과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일은 그리스도가 보이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머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모임의 머리는 당연히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니 그렇게 하자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행하였더니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되므로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인 이들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들이니 이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말씀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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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시고


성경을 보는 안목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관점과 안목과 가치관에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형수로 죄인의 사형 틀에 매달아 죽게 하시면서 그것을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에서 죄인이 아니라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을 기도하여 바라고, 그것을 영광이라며 영광을 돌리는 가치관으로 가지고 있고, 그 가치관으로 성경을 봅니다. 하나님과 다른 가치관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비단 성경 뿐 아니라 어떤 책이나 글이나 말이라도 저자의 강사의 의도대로 볼 때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는, 즉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죄인이 되는 가치관으로 죄인 되고 종 되며 소비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데 사람들은 그 반대로 큰 교회를 건축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면 하나님께 영광이라 여깁니다. 이것은 완전히 반대의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신다고 하는 말씀을 보는 것도 어떤 관점으로, 누구의 안목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가 먼저 선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신다.’고 하신 말씀이나 ‘모든 이름 위에’와 같은 표현들을 두고서 세상의 경쟁에서 이긴 것을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시험이나 경쟁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것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에서 ‘이김’은 분명히 세상의 심판 기준으로 이긴 것인데도 단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결과를 얻었다는 생각에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참 모순인데도 그 생각이 이상하다고 의심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의 이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경쟁하는 사람들 위에 서고자 하는 마음이 그들 안에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 없이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보면 가장 실패한 인생입니다. 세상의 법으로 사형을 당하는 것 보다 세상 기준에서 실패한 인생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두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권세를 이겼다고 하시고, 세상의 모든 정사와 권세자 위에 계신다고 하시며 만물을 복종하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을 복종하게 하는 법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이 만물을 복종하게 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시험이나 권력과 같은 것이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이기고자 하는 그 세상의 일과 힘 앞에 예수님께서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즉 에베소서의 이 말씀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이때까지 예수를 믿어온 것에 대하여 전면적인 재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관점이 하나님의 가치 기준과 동일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는 것은 위대하고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권세를 얻어 세상의 모든 권세를 힘으로 굴복시켰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신의 것으로 스스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이제 그들이 그것 앞에 순종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제적인 것이나 강압적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순종하려고만 하면 세상에 그 보다 더한 복종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면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능력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본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본성은 세상의 어떤 힘으로도 바꾸거나 강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를 아무리 고문하고 조작하여 해도 개처럼 짖게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종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모두가 추구하는 것의 꼭대기로 가서 힘이나 능력으로 강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은 생명의 본성과 같이 온전하며 완전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 가진 삶을 살면서 육신을 종과 같이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렇게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때 그것을 본 모든 만물들이 스스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 순종하므로 그 순종함이 자기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어 그 본성으로 살게 되는 복종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만물을 복종하게 하신다는 것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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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5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5. 12. 19:50 Writer : 김홍덕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올바른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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