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사람의 허물 곧 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탈취하면서부터 시작된 모든 삶이라고 앞선 글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간단한 것이지만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머리로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머리로 이해되는 것에서 시작하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를 알고 자신이 그 죄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는 것은 이때까지 삶의 부인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이 어려운 것은 우리가 인생을 우리의 의지대로 시작하지 않았기에 우리 스스로 존재하게 된 목적을 또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여자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었기에 아들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 이유를 보이시려고 오신 분이시고, 그 자체가 우리 존재의 목적이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보면서 밥 달라, 돈 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보이신 모습이 바로 우리의 존재 정체성이요 우리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그것이고, 그 보이시려는 대상인 사람들이 바로 그 목적대로 지음 받았기에 완전히 짝이 맞는 온전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받지 않기 때문에 어려워진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보고서, “저런 몰골과 행실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냐?”라고 비난하고,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을 보면서 자신도 그 기적을 힘입어서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을 자기 신앙이라고 여기면서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내는 것을 pay로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과 전혀 무관한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예수님을 대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지목한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지목이 개개인이 아니라 어떤 사람 예를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을 살리신다는 것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보실 때 온전하고 생명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도 바로 이것인데,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실존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이 <사실>임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인지 인생의 생각으로 온전하게 인정할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존하셨다는 사실임을 믿는 것이나, 예수님의 기적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은 명백히, 아주 명백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어떤 사실이나 결과를 믿는 것이지 예수님 그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신앙하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믿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 그 믿음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구분 못하면 평생 헛짓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으면 예수님의 모든 것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었다고 한 들 자신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믿지 않는데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것은 아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이라는 것은 순종하고 수용하는 것이기에,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같은 육신을 가진 우리도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이 나에게 의미가 있고, 나도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또한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인지 보이신 예수님을 보고서 믿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안에 받아들인 즉 순종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요 삶의 목적이요 의미라는 것을 순종하는 이들의 심령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계획하심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본성이 되어 자신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이.


그것이 생명이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시고, 우리가 구원 받을 이름(정체성)이 예수 외에는 없다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즉 그리스도(a christ)가 된 이들은 생명이 있는 유일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안에 있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살아 있어도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인하여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니라면 죽은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으시고 영원하시니 그 생명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죽음 가운데 있을 수 없다는 법으로 인하여 부활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존재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이나 조건을 특정하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자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요 삶의 목적이자 의미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 되는 것이기에 사망에서 생명 있는 존재가 되는 법을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것이라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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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0) 인생의 허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21. 08:4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특히 그 중에서 사람에 대한 한결 같은 창조 목적 안에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앞서 설명하였습니다. 사람도 엄연히 존재이므로 존재의 목적에 수렴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것이고, 그렇게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는 모든 관계가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한결 같은 의와 뜻 그리고 마음이며 역사하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그 역사하심을 스스로 알고 고백하고 순종하기로 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낼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 곧 그의 의를 나타내는 자에게 그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무한한 가능성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계획이자 자신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 가진 존재로서의 삶을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순종할 수밖에 만들었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한 순종과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심지어 그런 개념조차 없이 행하는 것은 기계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신 분이신데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인생이 기계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선택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인생이 하나님을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선택을 하는 모습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어려운 이유는 사람이 자기 입장에서 선악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도 그것에 대한 말씀을 어기고 맘대로 따먹은 사람도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관점이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선악과를 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 “접근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게 해 놓았으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말과 같은 것이 사람들이 선악과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대표적 관점입니다.


이 블로그에서 몇 번 설명한 것과 같이 선악과는 어떤 과실이었겠지만 그 과실의 어떤 특별함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상징적 의미입니다. 선악과는 사람의 육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심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꼬임과 먹었더니 눈이 밝아졌는데 막상 밝아져서 보게 된 것이 자신이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는 것에서 이 모든 것이 우리 육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육신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과 같은 말로 대변되듯 인생의 주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동시에 수반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인생에 대한 결정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려면 판단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선한 것으로 판단하고 무엇을 악한 것으로 판단할지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 인생의 주권을 가지려고 한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한 것입니다. 자신이 만들지도 않은 것은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 자체가 그것의 창조자와 자신을 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생,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자신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이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순종할 것을 결정하는 선택의 권한을 탈취하고 스스로 인생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려 한 것이 타락의 시작이고 모든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바로 이것입니다. 허물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는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육신을 가진 자기 삶에 스스로 주인이 되려 하는 그 마음에서부터 모든 죄와 타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간첩이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간첩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은 어떤 것 예외 없이 모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생면부지의 아이를 구하다 죽어도 간첩이요 국가에 대한 범죄자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사랑이 없으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창조하신 목적을 보이시므로 우리에게 주신 우리 삶의 의미가 자기 안에 없다면 그 어떤 삶을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알아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행위로 판단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성경의 모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의미는 알지 못한 체 인생을 어떻게 선하고 의미 있게 살까 고민하고 또 아무리 노력해도 이미 자기 삶을 어떻게 살까 계획하는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성경을 모두 지켜내면서 산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의지로, 자기가 인생의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라고 외쳐도 모른다고 하실 것이라고 하신 것의 본질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다른 피조물에게는 주시지 않고 오직 사람에게만 그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자기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자 능력을 가지고 자기 삶의 목적을 스스로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또는 다른 신을 기쁘게 하는, 혹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려는 그 시도의 시작 그것이 바로 인생의 허물이고, 죄의 시작이며 죄와 타락의 전부이며 사망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상태에 있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창조하신 목적을 알게 하시므로 모든 인생의 주권이 유일한 창조주요 신이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속 어느 것에도 사람이 한 것이 없으므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바로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살리신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아야 산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면 그리스도가 있어야하기에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셨고, 그것을 본 사람이 이때까지 자기 인생이 자신의 것인 줄로 알고 살다가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게 되는 그리스도가 되기에 다시 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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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불순종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행위 지침, 율법이라고 하는 것을 어긴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글로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문장의 행간은 상상 이상으로 깊은 것입니다.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자신의 삶의 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불순종이라는 것을 시인하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사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존재하게 한 존재에게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고 그것에 순종하겠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온전한 창조주라고 믿는 믿음 없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다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데 잘못될 리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의 벌이라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하나님께 찾지 않습니다. 아니 그 누구에게도 찾지 않습니다. 그들이 존재의 의미를 찾는 곳은 어이없게도 존재하고 난 다음에 자신이 인지하고 겪어가는 것에서 찾습니다.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온 순례자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미 존재한 이후에 인지하고 겪어가는 삶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데 그것을 삶의 의미라고 고귀하게 여기면서 삽니다. 그게 바로 어두움이고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며 공중 권세 잡은 자에게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하여 긍휼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도 풍성한 긍휼을. 긍휼이라는 말은 ‘자궁’이라는 말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혈육 간에 또는 같은 배에서 난 사람들 사이에 가진 마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에 대하여 존재하는 이상 긍휼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긍휼하심이 결국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임을 바울 사도가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그 만드신 목적이 아들 되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가 형상으로 나타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와 뜻과 성품을 표현하시겠다는 의와 뜻이 육신이라는 형상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나타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목적 아래 있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긍휼하심은 사람이 육신으로 살 동안 언제라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그럴 수 있다는 점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언제든지, 그것이 언제라도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시인하는 순간 성령께서 그 시인하는 마음에 그것을 시인하게 한 먼저 그리스도로 산 이미지가 생명이 되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언제라도 이것이 그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셨기에 사람에 대한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고, 인생을 살 동안 언제라도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육신을 가진 인생이기에 인생을 사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하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긍휼은 풍성함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그것에 너무 적합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나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전구가 마트에 진열된 상태와 비슷합니다. 존재의 가능성은 온전하지만 상태는 목적을 이루지 못한 상태, 곧 목적의 관점으로 볼 때 죽은 자요 사망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전구가 온전한 상태로 진열장에 있다고 불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듯이.


그렇지만 하나님께는 그와 같은 우리 인생들에게 사랑 곧 존재로서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긍휼이 풍성하시기에 그것을 인하여 우리가 진노의 자식에서 생명이 있는 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게 거듭나게 되는 과정에 있어 인생이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구가 불을 밝히는데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자신을 만든 목적대로 자신의 육신을 드리는 것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드려 열이 나고 그렇게 소비되어 수명을 다하는 자리에 순종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조명을 밝히겠다는 목적에 자신이 기여한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듯 전구가 빛을 밝히는 것에 육신을 내어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밝은 빛을 내는 것은 완전한 은혜입니다. 자신으로선 할 수 없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분명히 빛을 밝히기 위하여 만들어졌지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자신을 만들 때 조명을 밝히겠다는 목적을 가진 이의 모든 예정과 계획안에서 빛을 밝히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은혜는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핵심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는 인생의 목적을 알도록 우리 앞에서 표본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온전하시기에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려야 하는 인생들과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그 육신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를 십자가에 보이시므로 그것을 본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있도록 본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모습이 있었기에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고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하여 우리 존재의 목적을 우리의 공로 없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본질적 존재 목적이라는 것만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은혜를 입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 같이 우리도 같이 살리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떠함을 인하여 하나님이 아량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사람을 그 목적으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전구를 산 사람은 당연히 조명으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전구의 존재 목적에 대한 구원이 되듯,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예정하신 인생 존재 목적을 순종하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돼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한 생명들이 당신이 예정하신 뜻과 의와 계획과 목적대로 살게 되기를 바라는 한결 같은 긍휼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살 동안 언제나 그 하나님의 긍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우리 앞에서 그 뜻을 보이셨고, 우리는 언제라도 그것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기에 그 긍휼은 우리 사는 동안 어느 한 절 끊임없이 늘 있는 풍성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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