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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0) 불순종의 아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18. 07:00 Writer : 김홍덕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은 성경에서도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에 대하여 순종해야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시키는 것에 대한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순종하는 것, 그래서 실체를 체험하기 힘든 하나님을 대신해서 목사가, 아니면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어디에 순종하느냐의 문제는 순종하는 이유입니다. 목적이 있는 순종을 순종이라 할 수도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순종은 늘 해야 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벌을 받아 인생이 힘들게 되기 때문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을 전개하는 것은 어디에 순종해야 하는지는 없고, 단지 인생의 곤고함을 피하기 위하여 순종해야 한다는 육신의 욕심이 이끄는 이유만 남은 순종일 뿐입니다. 한 마디로 순종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도 명령이나 지시가 불합리함에도 따라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더 극단적입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삭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예수님은 미수에 그치지 않고 정말로 아들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반면에 불의한 청지기와 같이 순종과는 전혀 거리가 먼 행동이지만 오히려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불합리적인 지시나 령에 순종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논합니다. 그러나 그런 논란도 잘못된 것입니다.


순종은 행위에 대한 지시나 명령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순종을 행위에 대한 지시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사람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의의 본질을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라!”


그러나 순종은 그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본질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반하는 것이 불순종입니다. 성경이 불순종을 죄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을 자신의 삶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적은 순종하지 않으면서 성경을 행위로만 순종하려고 하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할지를 궁리하는 한심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순종이 육신의 정욕을 담보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종에 대하여 고민하는 이유는 육신의 수고는 줄이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으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에 순종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전형적인 모습들입니다. 순종해야할 것이 무엇이지를 모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것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하여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낸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영의 아들들이 불순종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종해야 할 것에 순종하지 않는 것도 명백한 불순종이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사람 존재 목적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공중 권세 잡은 영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공중권세 잡은 영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순종해야할 주체를 모르고, 자기 육신의 안녕을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불순종이며 그것은 공중 권세를 잡은 영의 아들 곧 그 영이 가진 의를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공중 권세를 잡았다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공중이라는 것은 그 좌표가 불분명한 것을 표현한 말입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있다는 것은 불분명하고 어디가 어딘지 알지 못하는 것이 권세가 되어 사람을 주관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공중과 같다는 것입니다. 방행도 목적도 모르는 것이 권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이없게도 권세가 된 것은 육신의 욕심을 인함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바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서 성경도 지키고, 순종하고, 때로는 자신 안에 그럴 이유가 없지만 육신이 바라는 것을 위하여 신념을 가지고 행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육신을 오히려 평안하게 하고자 순종하게 하는 권세가 생겼는데 그 권세를 정처가 공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세가 가진 의가 불순종이라는 아들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하여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육신을 주신 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과 같이 육신을 종과 같이 소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것인데, 이를 떠나 반대로 육신의 욕심을 좇다보니 존재의 목적은 알지 못하는 공중과 같이 정처 없는 영과 의에게 권세를 주고 그것에 순종하는 불순종의 자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불순종은 성경을 지키는 모양까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 중요한 초점입니다. 성경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정말로 온전히 순종하는 것 같지만, 성경을 지켜서 얻고자 하는 반대급부가 있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따라서 불순종입니다.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불순종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욕심, 육신의 정욕을 이루려고 자신이 투자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자리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체의 욕심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좇는 것은 불순종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대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인데, 사람들이 성경책 들고 일요일에 교회 아닌 예배당에 가서 자기 육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기 위하여 다짐하는 회칠 속에 불순종을 지그시 감추어 두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불순종, 정처 없는 공중과 같이 자신의 존재 목적도 알려고 하지 않고, 일단 존재한 다음에 인식하는 그 세계에서 바라는 바 육신의 성공과 안녕을 추구하고, 그 욕심과 마음이 바라는 바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순종을 드리고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기만을 더 이상 신앙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불순종의 자녀, 진노의 자녀로 마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용서하실 리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자리에서 떠나면 온전한 성도가 된다는 것을 바울 사도와 사도들이 명확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죄를 시인한다는 것이 바로 자신이 그런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처 없는 공중과 같이 자기 존재의 목적도 알지 못하면서 그저 열심히 살고, 성경대로 순종하며 살려하는 그 모든 것이 불순종이며 죄며 사망의 자리임을 알고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성도요 신실한 자요, 그 사람들이 바로 교회의 몸을 구성을 하는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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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죄인인가?’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까?’와 같은 명제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증거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시인한 이후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스스로가 죄인임을 시인하기 이전과 동일한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살인과 같이 아주 중한 죄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분명한 것은 사소할지라도 어제 회개했던 것을 오늘 또 회개해야 하는 상황에 또 직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또 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명제 하에 죄를 정의하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의 어떠함을 죄로 보기 때문에 생긴 문제입니다. 죄를 행위가 어떠한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나, 성경대로 기도하고 십일조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같은 가치관입니다. 사람이 욕을 하고 거짓말을 하면 죄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새는 쪽박  들에서도 새는 법입니다. 행위로 죄를 판단하는 가치관은 당연히 의로워지는 것도 행위로 이루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에는 세상의 풍속과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어떤 허물이 사람에게 있고, 또 죄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행하니 그 행함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영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이것은 허물과 죄에 빠져 있을 때에 죄와 허물 중에 행하였던 것이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데 ‘행함’이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하고, 세상의 풍속을 죽은 상태에서 좇았다는 것도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죄와 연관 지어 죽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죽음은 육신의 생물학적 혹은 의학적인 죽음의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중에 행한다는 것은 몸이 의학적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몸은 살아 있지만 어떤 관점에서 죽은 상태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죽은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여기시는 삶이라는 것이 바로 세상의 풍속을 좇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은 세상의 가치관,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기에 지속적으로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정의를 내린 선과 악, 그리고 그 기준으로 심판하고 판결한 의와 죄가 핵심입니다. 즉 세상의 풍속을 좇았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좇았다는 것이고, 가치관은 곧 심판의 기준이므로 그 기준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가치는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행동 곧 행함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하였느냐와 그 행동이 다른 사람의 육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느냐를 가지고 선함과 악함, 의와 죄를 가늠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기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가치관의 본질이자 실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죄라 생각하는 것들이 다 행위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의 풍속을 좇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서 벗어난 삶 그 자체입니다. 죄라는 원어 ‘하마티어’가 가진 원 뜻도 ‘자리를 벗어났다.’는 의미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창조 목적의 삶에서 벗어난 상태로 사는 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위는 두 번째 관점이고, 먼저 존재 자체가 죄와 사망의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죽었다고, 또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행위가 죄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예정하신 창조 목적이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이고 의미인가가 죄인인지 아닌지의 유일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나서 행한 것은 설사 그것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라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입니다.


바울 사도가 ‘허물과 죄 가운데서 행하여’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를 벗어나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바로 죄와 허물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책임이 귀속되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이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살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든 피조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을 뿐인데, 유일하게 사람만은 선악과에 대한 선택도 할 수 있고, 동물의 이름도 지을 수 있고, 좌나 우 선택할 수 있도록 하시고, 그 선택에 따라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보이시고 사람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삶의 목적과 삶의 가치를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하고 난 다음에 스스로 삶의 가치를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으로 하늘에 닿으려 바벨탑을 쌓았고, 세상의 풍요를 가치로 여겨 사람의 딸들을 자기 아내 곧 형식으로 삼았고, 그 자기 안에 있는 가치를 형상화한 우상을 만들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대로 살 수도 있고, 그것을 버릴 수도 있는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 선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삶,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대로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종과 죄인과 같이 드려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그 자체가 죄인 것입니다. 그 상태에서 설사 나라를 구하든,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식칼이 아주 예리하게 사람을 상하게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선택을 육신의 욕심을 따른 선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요한 사도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육신이 그 평안을 사모하고 좇는 것을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아담이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스럽고 하나님과 같이 될 것으로 여긴 것도 육신을 가진 삶에 대한 욕심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망 가운데 있었던 상태에 대한 올바른 정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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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15-23) 온전한 교회를 찾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16. 07:05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요한 사도가 표현하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므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라는 내용이 교회라는 형식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 = 그리스도”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 =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누구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된 존재는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영어로 이것을 표현할 때 예수님은 the Christ, 우리는 a christ 즉 christian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법입니다. 또 육신을 가진 인생을 만드신 것도 그리스도가 되게 하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와 성품이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도록 하시겠다는 것인 육신 가진 인생의 창조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목적이 바로 예정이고, 그 예정하심에 순종한 것이 부르심인 것입니다. 부르심은 손뼉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렀는데 대답이 없는 것은 부르심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순종하면 성령께서 순종한 사람 안에서 그 순종이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생명이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바울 사도는 ‘성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라는 곳은 어디까지는 성도들이 모인 곳이므로,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예정하신 목적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즉 성도가 모인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고 십자가를 달아서 사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들이 자기와 동일한 생명을 사모하므로 찾아서 만나는 그 만남에 바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한 것이며,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성도들이 마치 몸의 세포와 같이 있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거듭난 생명이 모여서 몸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된 교회는 그리스도라는 의가 형식이 된 몸인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 즉 내용이 형식과 하나가 된 존재이기에 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머리 곧 의가 되었다면 그 몸은 그 의가 형식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형식이 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서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궁리하여 하나씩 추가했습니다. 성경에 제사장이 있으니 목회자라는 것을 조각하였습니다. 마치 우상을 만들 듯. 성전을 지었다는 구약의 말씀에 기초하여 교회 건물을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것은 우리 육신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거하실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표현하신 것이기에 성전 건축에는 의미가 가득했는데 지금은 세상의 가치로 좋고 크고, 좋은 음향이나 악기로 채우는 것이 그것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다 하나님을 조각한 우상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교회를 설명함에 더하고 있습니다. ‘충만’이라는 것은 채워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물의 충만’은 모든 존재에게 채워져야 할 것이 있고, 그것이 채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채워짐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모든 만물은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모든 피조물의 바라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늘 아래 모든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의가 물리적 형상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한 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 모든 존재의 정체성, 곧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분이시기에 그 나타나심의 법 안에 모든 피조물이 속하는 것이므로 그 존재의 목적성과 정체성으로 볼 때 세상의 모든 것이 그 발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아래 있다는 것은 피조물이 존재의 목적으로 채워졌다는 의미이므로 그것이 바로 피조물에게 충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물체나 존재가 그릇과 같이 아무리 채워지고 수용하는 것이 기본적인 속성이라고 해도 다 목적이 있습니다. 자기 것 아닌 것이 채워진 것을 충만하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충만’이라는 것이 그 존재의 목적으로 가득한 것을 말하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만물을 충만하게 한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바로 그런 것이기에 교회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채워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온전한 교회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본성, 자신이 창조된 목적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그것이 바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몸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이 충만한 존재들이기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 곧 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이 자기 삶의 본성이 된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교회가 되는 이 법을 좇아 교회가 된 것이 아니라면 종교단체일 수는 있어도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라는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온전한 교회의 이름을 도적질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육신의 평안을 복으로 여기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신을 신앙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이름을 도적적해 간 오늘날 흔히 말하는 교회에 가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기 원하고, 그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 자기 하나님께 무엇을 행할지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냥 지금같이 살면 될 것이지만, 정말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자 하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님을 알고자 한다면 교회를 다닐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의 몸과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능적으로 자신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을 찾아 배와 옷을 버려두고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면, 정말로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자신이 교회의 몸이 되는 그런 전정한 교회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그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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