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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0) 의와 행위의 관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26. 09:02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에 대한 정의는 이미 흐릿해져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자신의 죄를 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폐가 있습니다. 구원은 죄를 사함 받은 것인데, 구원을 받은 다음에도 늘 죄의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는 것은 사람이 자기 행위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도 자기 행동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자기 행위로 인한 죄의 문제를 구원 받은 다음에도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행위로 지은 죄를 스스로, 즉 어떤 행위로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 이를 사해 주시므로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으면서, 자기 행위에 대하여 구원을 받은 다음에 다시 자기가 살면서 짓는 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여러 가지 이론과 학설들 그리고 주장들이 난무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신 것을 두고, 교회에 와서 세례 받고 구원 받은 사람은 매일 기도할 때 회개하는 것으로 일상 속에서 범하는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사람들은 스스로 압니다. 그런 삶이 자신을 의롭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러한 문제는 의와 행위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위에 신학이 서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위가 의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의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지만 그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에 종속되었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시인하면 죄를 사하신다는 말씀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로 말씀하셨든지 자신이 가진 안목으로 그 말씀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행위는 의의 산물입니다. 즉 행위는 의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행위는 그 행위 주체가 가진 의를 분별하고 알 수 있게 할 수는 있지만 행위가 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시인한다는 것도 시인하는 행위가 본질이 아니라, 먼저 그 안에 자신의 삶이 죄인과 같았다는 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의가 죄를 시인하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행위가 의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면 죄를 시인하는 그 행위가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 받은 다음에도 자신이 일상 속에서 범하는 죄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고민하고, 또 해결책으로 모든 기도의 시작을 회개로 하라는 것과 같은 방법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하고 회개하기 전에 죽으면 어떻하지?”와 같은 질문 앞에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은 의의 본체이시고, 한 편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는 의가 중요하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는 행위는 의에 표현이기 때문에 의만 분명하면 행위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에 대하여 아주 심각한 오해를 합니다. 그것은 무지함입니다. 그 무지함은 일면 이해가 되기는 합니다. 같은 의,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공산주의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의에 대하여 무지한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의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분명히 그 방향성이 의가 행동과 형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행위가 하나님의 심판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는 것은 기도하는 것, 성경 보는 것과 같은 것이 행함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바로 행함이 하나님의 의의 판단에 근거가 된다는 것인데 그것을 모르는 바보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단지 자신들이 행위로 지키는 의가 신약성경에 나온다고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이 아니라고 맘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어이없지만 또 다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를 보시니 사람의 행위는 어떻든 상관없다는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간단하게 하나님을 믿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아주 흔한 반문인데 정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함이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심히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심령 안에 있어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이 도둑질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인 사고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고, 하나님께서는 행함을 보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행함은 의에 종속된 것이고, 의는 형식을 가진 존재, 하나님의 의를 표현할 그릇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생에게 보이시고 사람의 심령에 들어오시는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은혜를 바로 안다면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씀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심도 같은 이치입니다. 행함이 없다는 것은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의가 없으니 그 의를 표현할 행동이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움직임이 없는 시체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행함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행함입니다. 도덕적 행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덕이 귀한 것이긴 하나 하나님의 의에 비길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한 형태로서 도덕적 행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와 행함의 관계가 자기 안에서 분명하게 인식되는 사람은 은혜를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창조주시며 우리 인생의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생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드리면서까지 우리에게 알게 하신 것이라는 것이 본능과 같이 인식된 사람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이것을 자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고, 의와 행함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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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0) 은혜의 구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25. 11:03 Writer : 김홍덕

사도들의 편지는 빌레몬서와 같이 뚜렷하게 기록의 목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편지를 포함한 모든 편지의 내용은 수신자들의 신앙에 대한 보증이 깔려 있습니다. 이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에 대한 보증이라는 것은 편지의 수신자들의 가진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바울, 또한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 안에 있는 생명 정체성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증하므로 동일한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는 위로와 보증과 은혜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증은 결국 교회의 본질적 기능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가치에 반하는 것이기에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 가치에 반하는 가치를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순종하고 산다는 것은 일면 어려운 것이기에 이것을 상호 보증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생성 원인이고 교회의 근간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 속에서 세상과 반하는 가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 표면적으로는 상당히 곤란하고 힘든 부분으로 보이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오히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세상을 이긴다고 하니 예수를 믿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이 아니라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와 안목과 생각과 가치가 자신의 본성이 되어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이해되고 용납하게 되므로 이기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을 주신다고 하신 것이나 세상을 이겼다고 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음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된 삶은 정말로 눈이 밝은 삶이 됩니다. 그것은 로또 복권의 번호를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수용할 수 있는 안목과 마음을 줍니다. 이치를 알게 하니 그것을 인하여 평안을 얻습니다.


때로 그 평안은 육신에게는 고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고난 정도가 아니라 순교를 당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기본적인 도구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가족과 같이 함께 하는 사람들에서부터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에서 한 번 더 육신을 수고하는 종과 같은 모습이 본성을 인하여 나오는 것에서부터 심지어 순교를 당하는 것까지 모두가 육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고, 이를 위하여 육신으로 우리가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 은혜의 척도로 여깁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내용을 다 모아서 요즘 자주 이야기하는 빅데이터 분석을 하면 모든 것은 다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집합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육신 가진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은혜는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며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땅에 이루어진 것이며 또한 하나님 앞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존재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고 동일한 개념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기에 창조의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의미가 회복되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이라는 것이 죄로 인하여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제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상황으로 인식하지만 천국도 엄연히 의가 있는 나라인데 그 의에 합당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이나 확신이 어떠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존재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사람도 가정이나 일터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그 목적에 적합한 상태면 가정이나 일터에 두고 사용하고 또한 귀하게 대접하고 보관하며 관리합니다. 그러나 존재 목적에서 벗어나면 제 아무리 멀쩡해도 버리거나 팔아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의이기 때문에 그 의를 가진 자는 어디에 있든지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앉히신다고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구원의 은혜는 말 그대로 은혜입니다. 사람이 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만든 목적을 가지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알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존재로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오, 그것에 순종할 때 온전하며 평안하고 세상을 이긴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을 인식하고 또 하나님이 자신을 지은 목적을 인지하고 순종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렇게 순종하였을 때 펼쳐진 삶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모든 법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그 법에 따라 세상도 사람도 창조하셨기에 모든 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하나님의 의와 뜻에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단 하나 그 선택을 스스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는 로봇이나 기계나 아바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형상이 필요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의 삶은 태초 이전에 계획될 때부터 선물이었습니다. 단지 육신이 곤고하다고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여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육신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함을 인함입니다. 육신이 살고 늙고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은 이것이 소비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것입니다. 즉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소비되고 약해는 지는 것이 본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었다는 것이기에 그것이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 구원의 은혜는 사람이 한 것이 없는, 아니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셨으므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또 갚기 위하여 성경을 행위로 지켜야 한다면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하고, 밥 먹기 전에 기도해야 한다고 하며, 십일조를 해야 천국 가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산다는 것을 설교하고 믿는 것은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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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0) 하늘에 앉히시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24. 15:43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실 뿐 아니라 하늘에 앉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앞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있는 존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자기 삶의 정체성으로 삼는 그리스도라는 신분, 그 정체성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살리시는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리신, 아니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유일한 존재인 존재 목적을 자기 삶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그 목적대로 사는 인생이 의미가 있는 것임을 순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a christ)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a apple은 the Apple 안에 있습니다. 그와 같이 a christ도 the Christ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존재의 이유와 인생의 목적이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과 같은 법입니다. 그 법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입니다. 그래서 창조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법 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이 땅에서 하는 일을 구하는 대로 다 이루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도모하고 꿈꾸는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때로는 그 구하는 것이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확신하고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껍데기만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신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행실이 깨끗한 존재가 되도록 행함으로 지은 죄를 사하신 것이 아닙니다. 행함은 어디까지나 존재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에 존재가 의롭지 않으면 그 행실이 아무리 선하고 의로워도 하면 할수록 죄가 쌓이는 것입니다. 간첩과 같이. 예수님께서 사하신 것은 존재 목적을 벗어난 인생들에게 존재 목적으로 보이시기 위하여 몸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이신 그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자신이 존재 목적을 떠나서 살았다는 것을 고백할 때 죄가 사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것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들, 그래서 이루고자 하는 것들의 성격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이르려 합니다. 교회에 가서 십일조 잘 내고 시키는 대로 했더니 사업이 잘 되어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성경에 있는 대로 육신의 행위로 기도하고 성경보고 봉사하였더니 칭송 받고 범사가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간증하면서 그것을 사람들이 본받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말씀들은 세상에서 완전히 망한 사람들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은 그 누구하나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 인생의 끝은 하나 같이 비참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고, 목이 잘리고,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는 등 하나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 또한 그들이 전한 말씀을 지켜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어리석은 짓임에도 그것을 심지어 공부까지 하고 자격증 까지 발급해 가면서 가르치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니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도 분노를 금할 길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것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순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으로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과는 반대로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되고 육신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성공을 기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이름을 훔친 도적질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는 일이 잘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은 완전히 그릇된 신앙일 뿐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자손들이 하는 짓거리며 공중 권세 잡은 자를 좇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들 생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면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를 뿐 아니라 동쪽에서 서쪽이 멀고 반대인 것 같이 다른 십자가의 도를 자신의 존재 의미로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또 하늘에 앉히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시고 소비하신 것같이 자신의 육신도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육신을 종과 같이 소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육신의 정욕과 반대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육신을 소비하는 중대한 전환이지만 그것을 자기 육신의 삶의 목적이요 의미라는 것을 순종하므로 그것이 본성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a christ)인 것입니다. 그렇게 거듭난 생명인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고, 또 같은 자리에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있는 자리에 자신들도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그리스도라는 존재 자체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가 흙으로 만들어진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것도 알 것이고, 그러면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이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니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도 하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정리한다면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사람 곧 그리스도가 되면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 여기시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으니 그 사람의 육신의 상태가 어떠하든 살리시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 본성이 하늘에 속한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존재 정체성 자체가 하늘 곧 하나님의 의와 뜻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하늘에 올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게 되는 것 그 하나만 되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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