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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22) 하나님과 화목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6. 2. 08:31 Writer : 김홍덕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근간이지만 대부분은 단순하게 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행동으로 범한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 벌을 받으셨다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행함을 의로 여기시는 분의 아들이 아닙니다. 행함을 의로 여기시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십자가는 십자가를 바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본 모습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아들이 몸소 보이신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본 모습을 회복한 인생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고,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도 같은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보여주신 인생 본연의 모습은 육신이 세상의 기준으로 평안하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죄인이 되어 더 이상의 실패가 없는 가장 실패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와 뜻은 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무엇인지를 보이는 것에 사용하라는 의미입니다. 육신을 평안한 자리에 두어 사람들이 부러워하게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평안이 선함인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종과 같이 육신을 소비하여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뜻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들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부리는 자리에 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그렇게 사람들을 부리고 명을 내릴 수 있는 지위에 오르거나 돈을 가지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교회에 가는 일을 맘대로 할 수 있게 되니 그것을 영광이라고 여기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맘대로 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죄인으로 처형당하는 자리인 것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십자가를 거꾸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십자가로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화평의 반대가 다툼이라면 십자가를 거꾸로 알고 있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다툼의 원흉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다투고 서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서 우기며 다투는 것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십자가를 바로 안다면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온전한 의에 반하는 사람들에게 끌려가고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본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니 그것을 인하여 다툼이 일어날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자들의 주장에 죄인이 되어 지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십자가가 온전한 것이라며 다른 사람 위에 서려고 공부하고 주장하는 어리석음에 매몰되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화평케 하는 것은 쉬운 말로 “네 뜻대로 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으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심문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신 것과 같이.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하면 화평은 없는 것입니다. 서로 옳다고 주장하는 만남에는 절대로 화평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주장하려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먹은 선악과입니다. 그리고 그 선과 악을 분별하는 기준은 육신의 평안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에게 험한 일이 일어난고 여기는 원인을 모두 악한 것으로 봅니다. 육신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모든 종교들이 추구하는 것이 육신의 평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렇게 하면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나쁜 일은 100% 육신을 곤고하게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종교와 또 세상의 도덕이나 윤리가 추구하는 가치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간음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좇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의 가치관이 추구하듯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이 그런 가치관 속에 있는 것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가치관은 그리스도의 가치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평안이 선과 악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의가 기준인 존재입니다. 그들에게 선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육신을 소비하는 안식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생으로 하여금 십자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표준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보고서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으로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던 삶이 하나님 앞에 악함임을 깨닫도록 본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떤 세계, 공간들을 연결하는 것을 문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십자가가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 밖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죄, 곧 존재의 목적을 벗어난 체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의 주장 앞에 끌려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서로 자신의 주장대로 해야 육신이 평안하다며 다투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 본성이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가 육신을 또 육신의 수고를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니 다툼이 없으니 화목하게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그리스도 밖에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인한 화평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목의 제물이 되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자기 육신이 종이 되어 사람 사이에 화평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더 온전하다며 주장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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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사한다는 것을 알고 믿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작용과 법으로 죄를 사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려고 하니, 시간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대신할 죄가 예수님 십자가 사건 뒤에도 계속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앙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미래의 죄까지 다 사했다고 하는 것은 금방 이해가 어렵습니다. 근간이라는 것이 아직도 해결도 되지 않는 상태인데 그 위에 신앙의 여러 가지를 쌓고 있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 것인지, 성숙한 신앙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모래 위에 지은 집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대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온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시인하면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요한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그 사실 하나로 사람들이 가만히 있어도 죄가 사하여 진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표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장에 가면 제품의 표준이 되는 ‘한도견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품의 표본이라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제품을 한도견본과 비교해서 동일하면 양품 혹은 불량(불량의 한도견본도 있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지신 분,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분께서 세상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죽으시는 사건 자체가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와 육신이 어떻게 소비되어야 하는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육신을 가진 자신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의 목적대로 살지 않았음을 시인하고 고백하게 하신 것이 십자가의 사건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을 추구하는 모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고, 또 그렇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세상이나 모두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어떻게 해야 그것을 이룰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합니다. 강연을 들으러 가고, 책을 사 봅니다. 그리고 시도해 봅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에 인생은 허무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허무하다는 것은 인생을 바친 자기 삶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만족이 있다면 그것이 더 불행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 법을 정한 것이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목적을 위해, 죽어서 천국에 가려는 목적을 위해 어떻게 지킬 것인지를 궁리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의문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면 율법이고, 주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면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라는 말씀도, 기도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기도하는 삶이어야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이든 안식일이든 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하나님의 안식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날그날이 안식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 복음이 바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었을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에 순종하였더니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 되어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해도 그 목적이 생명이 되어 나타나는 본성대로 사는 것을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게 된 상태가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을 행동으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고 또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의문에 쌓인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그 의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 앞에서 오히려 죄인이 되어 육신을 종과 같이 섬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세상의 성공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요 인생의 목적이라는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과 같고 종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임을 보이신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가치관으로 보면 육신을 덜 소비하고 평안한 상태가 되어 그 평안함과 육신의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선교 활동하는 것이 선하고 의로운 것이고, 육신에게 험한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무엇을 해아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낳고, 또 기도하라는 말씀조차 그렇게 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 곧 율법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세상에서의 성공을 가치로 여기는 법으로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너 같은 목수의 아들,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다.”라는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셔서 지신 것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 되는 삶, 곧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 남들이 평안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이고 선한 것이라고 바랄 때, 육신으로 종과 같이 더 섬기는 삶을 사는 삶이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을 십자가에 육신을 드림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의 성공을 좇아서 살다보니 그 성공을 담보하기 위하여 ‘하여야 하는 것’ 곧 율법이 너무 많고, 그것을 어떻게 잘 지켜야 하는지 의문도 너무 많았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자신이 추구하던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오히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이 추구해야할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시인하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시인하는 사람의 죄를 사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사하여 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가치관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의문의 율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데 다시 하나님의 의로 죄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어 이전에 어떻게 지켜야할지 의문 그 자체였던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의 본성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자기 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과 생명이 있다는 것은 물론 성경의 모든 것이 자기 삶을 보증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성경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는 의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본성으로 지켜지는 것을 어떻게 지킬지 공부하거나 의문스러워할 이유는 고사하고 방법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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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허무신 막힌 담은 그리스도 안과 밖으로 구분하는 담이라는 것을 먼저 글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담을 허물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람을 향한 의가 자신의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면 그리스도라는 생명 세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이나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었다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밖에 있었다는 것이 이스라엘 영토 밖에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애굽에서의 노예생활 기간과 출애굽 기간 동안에는 영토가 없었으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일하게 그리스도 박에 있었다는 것은 교회 밖이나 신앙 밖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한 알의 사과가 사과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양이나 크기나 색깔이나 심지어 맛도 다르지만 사과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이스라엘 안에 있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졌다는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본성이 다스리는 것과 의가 다스리는 것 그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게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의와 하나님이 주신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혈통으로 할례를 받았든 그것이 아니든 또 삶이 초라하든 어떻든 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 이스라엘 밖에 있었다는 것도 분명해 집니다. 안이 어딘지 알면 그곳에 있지 않으면 밖인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도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이방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유대인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육신의 할례나, 교리에 의한 교회에 주기적으로 출석하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 된 것은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원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의문에 쌓인 율법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문에 쌓인 것을 율법과 같이 지키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계명 자체를 율법 혹은 복음이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어떤 말씀, 그것이 신약이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해도 그것의 의는 모른 체 지켜야 한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신념을 가지고 지키려고 하면 율법인 것입니다. 신념이라 함은 자기 안에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하는 모든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과 그리스도 안에서는 본성이 되었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는 상태라서 하지 않으려 해도 하게 되는 것이 복음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신구약 불문, 상황 불문, 육신의 삶과 상태를 불문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본성에 끌리는 대로 살 뿐인데 모든 말씀을 지키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는 것, 그것이 모든 하나님 말씀의 의도요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므로 그 뜻이 자기 안에서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생명이 되어 본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이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육신이 피를 흘리며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육체로 허문 담은 바로 인생이 자기 목적을 알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지 못하는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지 못하니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벽을 허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벽의 다른 이름은 바로 의문에 쌓인 율법인 것입니다.


의문에 쌓인 율법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교리로 또 성경공부에서 가르치지만 해 보면 되지 않아서 또 다른 답이 필요한 모든 관점들 그것입니다. 그 관점들이 육신으로 노력해보면 되지 않는 이유의 공통점은 모두 신념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해야 한다.” 아니면 “~~하면 안 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해야 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은 또 이유가 있습니다. 심지어 계명 자체가 목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매주 혹은 매일 같이 교회에 가서 듣고서 행하여 보려고 해도 또 하다보면 안 되기 일쑤인 계명들, 신념으로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지키려는 그것들은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노력해야 되는지, 아니면 어떻게 해야 완벽하게 되는지 도무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의문의 답을 그 속에 속한 누군가 알았다면 신학은 소멸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문의 율법인 것입니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완전해지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 체 주구장창 계속 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살 동안 세상에서 성공하여 육신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에 불모 잡혀서, 또 죽어서 천국에 가겠다는 희망 고문에 잡혀서, 또 지키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쌓여서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의문 속에서 지키려고만 하는 그 신앙이 바로 의문에 쌓인 율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의문에 쌓인 율법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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