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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4-21) 바울 사도의 간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6. 13. 05:00 Writer : 김홍덕

에베소서 3장 후반부에는 성도들을 향한 바울 사도의 간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간구에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도 그렇듯 이 간구에는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간구의 내용이 간구하는 사람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임하기 바라는 은혜가 예수님과 바울 사도 안에 있는 것을 간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명한 주기도문을 압니다. 예수님께서 또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무엇을 구하든 들어 주시겠다고 하심도 압니다. 특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이제 하나의 주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마감하지 않으면 기도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서양국가에서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동서양에 따라 다른 것도 아닐 텐데.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은 특히 크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주문만 외우면 그 구하는 내용이 무엇이든 들어 주시겠다는 것으로 해석되고 가르치며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무엇을 기도할 것인지를 명확한 한계를 정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늘의 뜻인 하나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땅이자 흙으로 지음 받은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라는 분명한 구분과 한계가 정해진 말씀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시험 치는 것, 선교사로 가는 것, 목사가 되려 하는 것과 같은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공중 나는 새까지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다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곧 인생의 존재 목적만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면 그 목적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에 필요한 것은 목적을 정하신 이가 다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사면 당연히 기름을 넣듯.


이와 같이 지금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도와 간구는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이름 밖에 있는 것들입니다. 자신들이 교회에 가서 혹은 기도원이든 집이든 기도한 내용을 반추해 본다면 자신들이 천부께서 필요함을 다 아시는 것들만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사실 그것을 알면 아주 양심적인 것이고, 그것이 시인되면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지만 아마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특히 그런 간구가 바울 사도의 간구(겟세마네 동산의 간구도 궤를 같이함)와 다른 것은 바울 사도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성도들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구하는 것이 더 충만하기를 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자기 안에 예수님의 이름은 없고, 단지 예수님의 이름을 힙 입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얻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라고 기도하는 것은 바울 사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가 계신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무릎을 꿇고 간구할 정도로 좋은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구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 안에 그리스도의 장성함이 충만해질수록 그 영광스러움을 체휼하고 있기에 또한 성도들이 그렇게 되기를 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기도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인지 부터 깨달아야 합니다. 시험의 합격을 기도하는 사람은 합격증이 없으니 기도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안에 없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그런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하늘의 뜻, 곧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내 안에서 생명이 되는 것 그것을 구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구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예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면 그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기도가 쉼이 없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모은 인생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만 관심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의’ 안에 속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이 되면 숨 쉬는 동안 기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의 모든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들어주신다는 것만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기 안에 깨달아진 바가 없다면 미안하지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구원을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흔히들 중보라고 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간구는 먼저 자기 안에 구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라는 행위를 드리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얻겠다는 꼼수 같은 거래일뿐입니다. 또 자기 안에 없는 것이 상대에게 좋은 것인지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좋을 것이라는 가치관도 선악의 기준에 선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성도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간구는 바울 사도 그 자신 안에 이미 충만하고, 그 충만함이 자신에게 큰 영광과 은혜로 늘 함께 하기에 성도들도 그렇게 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원하면 자신도 영원함 안에 있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려면 먼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풍성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인 정체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구하는 것이 기도며 간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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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13) 바울 사도의 환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6. 11. 05:0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성도들이자 신실한 성도들이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보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담대함이 있으니 자신이 당하고 있는 환난을 염려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가 겪는 고난이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영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 이어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위한 간구를 이어갑니다.


신앙 안에서 환난이나 고난은 축복에 대한 지불로 여겨집니다. 고난이 닥치면 참아야 하는 이유가 고작 견디면 복을 주신다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복에는 신앙의 성장이라는 나름 고상한 것도 있지만 알고 보면 대부분 육신의 복락과 세상의 성공입니다. 그것이 단지 호의호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는 환경으로의 전환이라고 회칠을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의 정욕을 추구했다는 무덤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이 블로그 욥기를 통해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먼저는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육신이 겪는 모든 일입니다. 육신은 사용한다는 것이 정말로 번거롭고 귀찮으며 또 약해지고 힘듭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것을 종들에게 시켰고 이제는 신분이 아니라 권력이나 재력으로 남을 시킬 수 있는 자리에 가서 자기 육신을 사용하지 않으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것을 성취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육신이 사용되는 것을 터부시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그 생각이 옳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오히려 의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이 곤고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성도들에게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영광이 제자들(성도들)에게 주셨다고 하셨는데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전하는 이들의 삶,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언제나 육신이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육신을 사용하지 않고 입만 나불거리면서 복음을 전할 수 없는데, 이는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에 소비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육신이 평안하기 원합니다. 어떻게든 더 누워있기 원하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기 원합니다. 심지어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것 자체가 모순입니다. 하늘에서 말로만 하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고난입니다. 십자가가 가장 큰 고난인데, 그것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하나님께는 더 이상의 하나님 성품이 나타낼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의 사건인 것이 그것입니다. 육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육신을 사용하는 것을 천한 종의 일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당연히 고난이고, 천한 일로 보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장 큰 이유가, 자신들과 같은 육신, 아니 자신들보다 못한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 육신의 정욕과 안목으로 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고난이고 환난입니다. 십자가 보다 더한 환난이 사람에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성도들에게 자신이 겪는 고난이 오히려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하신 것은 육신을 가지고 수고하여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과 영광에 대한 온전한 견해인 것입니다. 고난은 육신의 정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육신의 수고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수고도 신념으로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작심하여 선교사가 되거나 목사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속에 있는 본성을 좇아 소비되는 존재이지 신념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은 속에 있는 것이 표현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지키기 위하여 신념을 가지고 도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었고 그것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념이나 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살 뿐인데 그 모습이 육신의 정욕을 좇는 이들에게는 고난으로 보이고,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에게는 영광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고난을 견디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라는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가만히 두어도 세월과 함께 곤고해집니다. 시간 속에서 어차피 약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편으로 절대적인 소비재라는 것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다만 무엇을 위하여 소비할 것이냐의 문제인데, 그것이 창조주의 뜻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입니다. 그 뜻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이끄는 본성대로 살 것입니다. 


그러면 육신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자기 안에서도 공명이 일어나서 아는 정도가 아니면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본성이 자기 삶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으로 끌고 가는 것을 스스로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 삶이 육신의 정욕 가운데 있는 자들이 보면 원대로 살지 않는 것 같고, 육신이 피곤한 삶을 사는 것 같아서 고난으로 여겨지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보면 그것은 영광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영광으로 여겨야 합니다.’와 같은 소리를 하면 웃기는 것입니다. 여겨야 한다고 다짐한다는 것은 아직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환난이 영광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이기에 성도들에게 이것이 영광이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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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13) 믿음과 담대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6. 10. 06:0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은 믿음 안에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신념이나 내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가진 의가 나의 것이 되도록 내어 주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아들을 믿는다고 할 때는 아들이 엄마의 생각대로 된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아들이 스스로의 인생을 잘 개척할 것이라는 믿기에 아들을 뒷바라지 하겠다는 의미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들은 상당히 능동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하나님을 위한 마음이 성취돌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논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양심적이어도 그것은 협박, 아무리 좋게 봐도 협상이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형편이나 삶이 어떻게 되더라도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의 조건이나 사족을 다는 것은 다 간음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더 할 나위 없는 죄인들이 처형당하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도 순종했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의 어리석음이 없는 것인데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단면입니다.


특히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는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생각이 같아야 가능한 것이라고 앞선 포스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자신에게 순종된 사람, 즉 하늘의 뜻이 흙인 자신에게 이루어진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만이 하나님과 생각이 같기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는 너무 기초적일 것 같아서 간과하기 쉬운 명제에 대하여 고찰하고 자신을 반추하여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 그것이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그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생명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을 아는 것도, 이방인이냐 아니냐의 구분도 모두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그 믿음을 가졌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의 여부로 구분이 된다고 말씀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알게 되는 이 모든 것이 예정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을 예정하시는 것 따로, 비밀에 대하여 따로, 교회에 대한 것 또 따로 이렇게 하나씩 예정하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에서 다룬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을 창조하신 그 목적 하나, 그 예정하심 밖에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연결하여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보이시고, 우리가 순종하여 믿기를 바라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 하나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어야 하는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나 비밀도, 교회의 정체성과 그 안의 경륜과 지혜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 하나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결국 우리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왜 인생을 주셨는지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가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을 왜 주셨는지의 문제라는 것을 그렇게 집요하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미 주어진 육신이기에 그냥 육신을 본질로 보고서 그 육신이 어떻게 행할지(Do)에 대하여 자기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하여 자기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어두움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또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정말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것이 ‘나타나다’는 의미인 것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창조 목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목적이 육신이나 형상을 가진 상태로 나타난 것이 피조물이고, 그 중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형상을 나타내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되면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첫 번째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나타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창조의 목적이자, 하나님 경륜의 비밀이자,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 믿음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십자가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이 세상 가치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기도하고 바라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어두운 것이며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이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어둡고 자기 생각을 하나님께 가려고 하니 담대히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 나타내신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오히려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만 생각하면 늘 두려운 것입니다. 혹시 뭔가를 잘못해서 불행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십자가를 보고서 자신의 존재 목적이 세상의 가치 앞에서 육신이 종과 죄인과 같이 드려지고 소비되므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그 온전한 믿음 안에 있다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있으니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감에 항상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과 담대함의 본질적 인과관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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