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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도 믿음도 성령도 세례도 하나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다양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혼돈을 주기 위함이나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다양함을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성품이 아주 단순한 하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을 어떤 모양으로 표현해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은 틀림이 없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겠다는 그 하나 밖에 없지만 나타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참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사과라는 생명은 같지만 각각의 사과가 다른 모양, 다른 색깔, 다른 맛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사과가 알마다 맛이 다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그것을 다 사과로 아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람이 직장에서와 가정에서 다른 정체성을 가지는 것도 비슷한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하나님의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 만물을 주관하시고 만물로 표현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표현될 만큼 다양한 성품을 가지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고 아주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생각보다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의외로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다양성을 외면합니다. 교회가 획일적인 신앙의 모습을 강조하고 요구한다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교회나 신앙 공동체에 가면 어딘가 모르게 획일적인 신앙의 기준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면 교회와 함께 가려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심지어 이단이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단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임을 알고 보면 신앙의 다양성을 부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교회에서는 기도하는 것도 나름의 룰이 있습니다. 감사-회개-간구-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이라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예배 순서도 있습니다. 세례도 룰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교단이 갈라진 것은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획일적인 것이 아닌데 교회에 가면 신앙생활을 하나의 표준과 같이 만들고 모든 신앙인들이 같은 규례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다양하게 창조하신 것은 다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건한 모양보다는 소란하고 시끄러운 형태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편할 수 있습니다. 주목을 받을 생각으로 자기 성품과 다르게 소란스럽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자기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지만 조용하고 경건한 것이 말 그대로 자기에게 맞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본성을 자신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신 것입니다.


한 사람의 행위가 어떤 이들이 가진 기준으로 보면 ‘저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새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저러면 안 되지, 이렇게 해야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꼭 좋기만 해야 하느냐의 문제에까지 이것을 영향을 미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말하면서 신앙의 세계가 다양하고 그 깊이와 넓이가 다른 것에 대하여 용납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과연 서로를 용납하는 것인지, 또 하나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인지, 또 믿음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지?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고,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도 하나인데 그 하나의 목적 안에는 여러 존재가 있고, 여러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도 하나의 나무인데 그 열매가 9가지가 되고, 하나님의 복도 8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령의 열매는 단지 9가지고, 복은 단지 8개다.’ 이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다양하다는 것이고, 생명의 법을 좇아 성령이 있으면 성경이 표현한 그런 <열매>들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성령이라는 생명만 있으면 그렇게 다양하게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안에 열리지 않으면 사람을 용납할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 안에 ‘신앙은 이런 것이고, 이런 행동을 해야 한다.’라는 것이 있다면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사람을 용납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법이 된 것은 자신은 그것을 잘 할 수 있기 때문에 법이 된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다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법도 지키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람이 충만해져서 넓고 길고 높고 깊은 신앙이 되면 온유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를 용납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되는 간구가 이루어지면 나타날 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모두 하나, 곧 하나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도 세례도 성령도 하나로서 만유를 통일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 모든 것이 만유 가운데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 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만유로 표현될 정도로 다양하고 풍성한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 또한 그렇게 다양한 것입니다.


사람이 다양하다는 것은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도 다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다양한 것은 자기의 결정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사람의 신앙도, 그 충만함의 정도도, 계시의 밝음의 정도도 다 다르고, 또한 같은 세례도 이렇게도 아니 또 저렇게도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 됨과 그 성품의 풍성함을 알면 그것이 자기 안에서 다 이해가 되고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만 다양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안에 예를 들어 “기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기준이 있으면 사람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꾸짖고 훈계하려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 것을 붕괴시키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표현한 세계가 하나의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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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성도들에게 있기를 간구한 다음에 그 충만함이 어떻게 삶으로 나타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이후가 주로 그런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라는 말씀 하나면 아마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우르는 말씀이 될 것이다 싶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렇게 살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이 바울 사도의 권면을 성경에서 보고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신념과 의지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율법적인 삶이라고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그렇게 나타난다는 말씀이지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 성경의 방향성입니다. 생명이 있어 그 본성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한 이후에 몸도 하나고, 성령도 하나며, 주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세례도 다 하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몸과 성령 또 주님과 세례와 같은 것은 언뜻 하나라고 하는 것에 이상할 것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겸손인양 늘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바울 사도가 열거한 것들은 하나가 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쉽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도 그렇습니다. 세례다 침례다 갈라진 것이 그렇습니다. 믿음이 같다면 종파가 달라질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이 있다는 것은 사실 온전한 믿음이 그 교회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에 대한 개념과 정의가 다르다면 그 종교계 전체가 하나의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미사어구를 붙여도 이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러 가지가 하나라고 선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르심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 안에서 모두가 하나의 목적과 의에 속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 하나고, 그것이 하나님 그 부르심도 하나며, 그 부르심이 하나니 사람들이 그 부르심 안에서 가진 소망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고자 하는 소망입니다. 사람이 나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에 그 인지된 삶의 세계 안에서 어떻게, 또 무엇을 하며 살 것인지를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소망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것을 육신의 정욕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분명히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이 그 법 아래 있기 때문에 사람도 목적 없이 어떤 것도 만들지 않습니다. 목적이 있으면 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지능을 가진 동물이 사람이지, 목적도 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존재가 아닌 것은 사람이 목적 아래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가장 먼저 자아를 인식했을 때 자신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고자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소망입니다.


사람이 그 소망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이 하나이기 때문에 삶에서 인지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제 아무리 성경을 달달 외우고 성경의 배경이 되는 시대적 상황이나 원어를 꿰뚫고 있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가 여러 가지가 되고, 교단이 여러 가지가 된 것이 성경을 공부한 자들에 의하여 비롯된 일이라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아 여러 종파로 갈리고 세례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공부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존재 목적을 몰라서 그런 꼴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을 안다면 공부하지 않아도 하나님도 믿음도 세례도 또 우리 몸과 성령도 또 그리스도도 하나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몸도 바울 사도가 열거한 하나님, 주, 성령과 하나라는 것은 아주 주목해야 하는 것이지만 이것에 자신을 가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다르자나?”라는 것이 겸손의 미덕이라 여기는 신앙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도 주도 성령도 믿음도 세례도 믿음도 하나며 특히 몸도 하나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은 모두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개와 같은 짐승이나 돌과 같은 자연은 이것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세례를 받거나 순종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사람에 대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것은 앞서 설명한 소망을 인함입니다. 사람이 가져야할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시고 육신 가진 삶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알고 그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알면 그것에 순종하는 것은 어쩌면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그 하나 밖에 없는 뜻 안으로 들어와서 보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그 하나님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환히 보이게 됩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충만을 간구하고서 그 간구함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과 성령과 주와 믿음과 세례가 모두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의 가진 자신의 삶이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서 뜻을 정하셨고, 그 뜻을 표현하시려고 육신 가진 인생을 창조하셨으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보내셔서 성령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보이시고, 그 십자가를 보고 자신의 삶이 목적 밖에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세례의 과정을 거쳐 그 육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말씀이 생명이 되게 하시고, 그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그리스도의 충만을 향하여 날마다 성장하게 되고, 그 성장함이 사랑으로 서로를 용납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주도 성령도 믿음도 세계도 모두가 하나인 것은 몸 가진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서 이 인생을 주신 목적과 하나가 되는 그 소망에 이르면 모든 것이 열리는 세계인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로 보면 하나님의 태초가 시작된 것이고, 요한 사도의 말씀으로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 함께 한 것이고, 바울 사도의 말씀으로 보면 예정하신 부르심 안에 들어가서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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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6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6. 23. 21:13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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