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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장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성도들을 위한 간구에 이어진 보증입니다. 자신이 성도들에게 바라는 그 간구가 이루어지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안에 그렇게 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인생의 존재 목적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고서 보니 그렇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는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언어에서도 ‘안다’는 것은 체휼을 동반한다고 합니다. 마리아에게 천사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했을 때, 처녀였던 마리아가 말하기를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마리아가 말한 ‘사내를 아는 것’은 남자를 경험한, 즉 남자와 동침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안다’는 것은 대부분 이런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바울 사도의 간구를 설명할 때에 여러 번 강조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간구,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간구는 예수님의 이름 곧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예수의 이름이 있는 사람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표현되는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것 그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땅과 같이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육신이 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기도하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그 자체가 기도의 정의이므로 그 기도는 항상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도가 이와 같다는 것은 간구하는 사람이 간구하는 것과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간구하는 것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미 있는데 왜 구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구하는 것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반문을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에게 생명이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나면 사람이라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에 사람으로 사는 것을 늘 구하는 것을 알고서 그런 반문은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주실 줄로 믿는 것이 이미 자기 안에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된 상태입니다. 특히 믿음이라는 것은 그 정체성 자체가 수동적이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순종한다는 것은 여자가 분명한 자기 의사와 선택으로서 남자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고 그렇게 될 때 남자를 아는 여자가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면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자기 안에 있고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이 그리스도(a christ)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되어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과가 아닌데 사과 안에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지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사람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 이루어지기를 믿고 바란다고 해서 그 믿음이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람의 변호를 필요로 하는 분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람은 살 동안 하나님의 일을 걱정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실수도 않고 온전히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돌보실 수 있는 분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의 본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람이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가만히 서서 보는 것이 인생의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면 그것이 자신의 체휼이 되므로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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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면 나타날 일들을 말씀하는 중에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를 성도를 온전케 하고 봉사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셨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것이 교회라는 것을 압니다.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같이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사도와 선지자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이 있고, 또 속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점점 장성하여짐에 따라 살다보니 교회가 세워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사람과 함께 목사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목사’라는 단어는 여기 한 번 나옵니다. 빈도나 순서는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가 교회의 설립 요건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나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있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봉사는 당번을 정하고 교리나 목사에 대한 규정을 정해서 주기적으로 심방하고 설교하는 것과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해석할 수 있기는 합니다. 그렇게 해석했기에 오늘날과 같은 교회 시스템이 생성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1장 마지막 부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교회는 법과 같이 교리를 정하고 그것에 따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교회가 되는 것이 온전한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은 봉사가 본성인 사람들입니다. 자기 일 바빠서 봉사에 나오지 않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순번을 정하고, 또 못나오게 되면 자발적으로 헌금으로 대치하거나 심지어 벌금을 부과하는 것과 같은 제도에 종속된 봉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나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조치를 취해 놓거나, 오지 않으면 비난하거나, 아니면 천국에서 상급을 받을 수 없다는 협박을 해야 하는 그런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하려하지 않아도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인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자기 이익을 좀 챙기고, 자기 사업을 우선시해보려고 해도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어 십자가에 끌려가시거나 내려오시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것을 감당하게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품을 표현하신 자리를 보니 십자가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분이니 더 이상 온전하고 의로운 분이 없는데, 그 분이 세상의 의에 의하여 끌려가서 매맞고 십자가에 달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니 십자가에 끌려갔더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바로 십자가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이 의인이 죄인들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있어 한 사람이 육신으로 일하고 다른 한 사람이 말만 하고 있다면 누가 의를 가진 자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말만하고 있는 자가 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하는데 몸을 쓰거나 육신의 기능을 쓴다는 것은 종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의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에 선 의로움입니다.


봉사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남들과 달리 몸을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실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신 의가 육신으로 자기 선악에 빠진 인생들의 의로움 앞에 죄인 되는 것이었기에 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고 나타나려하니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성품이 있는 사람, 그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자기 생명이 되어 날일 갈수록 그 생명이 자라서 자기 육신을 자꾸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선악의 기준으로 만든 의로움 앞에서 육신을 수고하고 섬기는 자리로 끌려가게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인생 자체가 봉사입니다. 자신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세상을 살아도 그만일 텐데 그리스도의 본성이 그렇게 두지 않습니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삶을 이끌고 원치 않는 곳으로 자꾸 끌고 갑니다. 자신은 눈 뻔히 뜨고서 자신이 그렇게 끌려가는 것을 보기만 할 뿐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본성이란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목사니까, 이래야 천국 가서 복 받으니까, 이렇게 해야 사업이 잘 되고 아프지 않을 것이니까?”와 같은 이유로 자신을 채찍질하고 묵상이란 이름으로 신념과 의지를 북돋우며 가는 것과는 단 1도 같은 것이 없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되는 세계가 아니라, 신분이 목사라서, 자신이 교회 다니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제어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것도 알 것입니다. 그럼 자신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음을 고백할 것입니다. 신앙은 사실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좇고 자기 선악의 기준을 좇아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들의 요구에 자신의 육신을 내어주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이 장성하여 충만하게 된 사람이 바로 사도요, 선지자요, 복음 전하는 자요, 목사요, 교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충만한 사람들의 본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요구하는 것 앞에 자신의 육신을 드려 수고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서로 모여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 앞에서도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있으면 그곳은 봉사가 넘쳐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악인을 위해서도 죄인과 종이 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 봉사 당번이 웬 말이고, 순서와 법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관리는 왜 필요하겠습니까? 봉사 당번? 그런 것 있다면 일단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설교 순저? 그런 것이 있다면, 설교에 자격이 있다면?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충만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누구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고 생명이 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말씀 외에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이고, 그렇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고 그것이 그리스도 충만하고 장성한 사람들의 삶인 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의 간구가 이루어진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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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16) 만물이 충만한 사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6. 26. 14:03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내려 오셨다가 올라가신 것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기를 간구한 그 간구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은 만물이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물이 충만해지는 곳, 어디를 만물로 충만하게 할 것이냐는 바로 사람의 심령 안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그 사고 안에 우주를 넣을 수도 있고, 좁쌀 같은 마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그릇과 같기 때문에 그 안에 무엇이든 넣을 수 있고, 그 크기도 의외로 무한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시겠다는 것도 사람을 이런 존재로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로 충만하여지기를 간구하고 또 예수님은 그 충만을 위하여 땅에 오시고 또 올라가셨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무엇이라도 넣을 수 있는 사람 안에 무엇인가를 충만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 역시 사람 안에 충만하게 넣을 것을 가지고 오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 안에 충만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앞서서 바울 사도의 간구에서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고 하고, 그 간구의 최종적인 바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맥락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속사람이 무엇이냐에 따라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릇과 성전과 같이 그 안에 무엇을 담고 모실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담을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무한한 것입니다. 온 우주에 대한 개념과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남는 콩 한 쪽도 누구 주기 싫어하는 좁은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이란 존재에게 그리스도가 충만하기를 구한 바울 사도가 이어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을 때 가지신 창조의 목적이 육신이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만물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그 뜻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충만한 사람이 곧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도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말씀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었다고 하고, 사람만 하나님의 생기를 넣고, 선악과 앞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그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만물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가 속사람 안에 생명이 된 사람입니다. 그것은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된 목적과 의가 자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만물이 충만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속 심령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만물이 충만한 사람인 것이고, 만물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창조되었고, 경영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게 안 보이면 ‘하나님이 세상이 점점 죄가 관영해지고 있으니 고쳐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세상이 죄가 많은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눈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자기 안에 가진 대로 세상을 보는 존재임을 생각하면 세상이 타락한 것으로 보인다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이 타락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세상을 잘못된 것으로 보는 그것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형통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나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세상과 만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만물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 하나님을 그렇게 찬양하고, 세상이 자기 이익을 좇는 것을 인하여 자신이 육신으로 종과 같이 그들 앞에 죄인이 되는 것을 자기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세상은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나오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보이면 그 사람은 만물이 충만한 것이고, 그리스도가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이야 될 대로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기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아가고,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서로를 대하므로 다투는 그 세계는 분명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그런 것 없는 세상을 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다들 자기 선악의 기준과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사는 중에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을 자기 삶으로 순종하므로 자기 선악의 기준을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 선악의 기준 앞에 죄인과 종과 같이 육신으로 섬기고 수고하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그 사람들이 검은 도화지에 그려지는 흰색 그림과 같이 나오는 것을 바라심으로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안에 충만해지는 것이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만물의 이치가 자기 안에 열리는 것이니 만물이 충만케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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