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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어떤 새로움이냐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구차한 삶에서 풍요롭고 평안한 삶이 되는 것도 새로운 삶이라 할 수 있고, 범죄자에서 선량한 시민이 되는 것도 새로운 삶이 될 수 있고, 주관 없이 살다가 확실한 주관을 가지고 사는 것도 새로운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은 어떤 것인가? 성경은 생명이 바뀌는 것을 새로운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것이나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과 같은 말씀은 생명의 정체성에 기반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늑대처럼 살다가 양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늑대가 양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가난하게 살다가 부유하게 사는 것은 달라 보이지만 같은 경제적 가치관이라는 궤도 위에 있는 것은 같습니다. 위치는 달라 보일 수 있지만 같은 세계라는 것입니다. 세계가 같다는 것은 생명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힘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게 되었다고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유함뿐 아니라 도덕적인 것도 그렇고, 신학적인 신앙 또한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진 삶을 살기를 간구한 성도들에게 그의 간구가 성취되었을 때 삶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그 설명대로 사는 것을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그런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하여 진다는 것은 구분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같은 세계에서 위치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일 가게에서 같은 사과라고 해도 좋은 품질의 상품 사과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만 어쨌든 다 사과들이 모인 곳에 둡니다. 가난하게 살다가, 혹은 비도덕적인 삶을 살다가 부자나 선량한 사람이 된다고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경제, 혹은 도덕이라는 세계 안에서 위치만 다른 것입니다. 세계가 달라진다는 것은 사과가 시금치나 당근과 같이 그 생명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거룩함, 즉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처음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부르심이라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이는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분명한 구분이 생기는 상황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분, 즉 거룩함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이후에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야기하고 그 성품의 장성함으로 충만해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서 설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뜻하신 것을 순종한 사람들을 구분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지음 받으므로 생명을 얻었던 것처럼 거룩하심으로 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분하시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 생명을 얻었기에 그 사람이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다름 아인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거룩함 곧 구분이 되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그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사람들은 피라미드의 꼭대로 올라갈수록 좋고 성공하고 감사한 것이 되지만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생명입니다. 그 본성이 근원부터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오셨는데, 그 하나님의 아들에게 피라미드 위로 가는 것을 구하고, 또 구하여 얻어지면 감사한다는 것은 말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새 사람이라는 것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봐야 합니다. 물론 그 시각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으로 나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바뀌지 않았는데 시각이 달라질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늑대가 양이 되지 않고서야 썩은 고기가 아닌 풀을 음식으로 볼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육신의 평안이 삶의 가치에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과 가치관이 피라미드 위로 향할 때 아래로 향하는 생명이 되는 것, 피라미드 아래에 있는 것이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생명으로 거듭난 까닭에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며 심지어 자기들 가치관에 동조하지 않으므로 죽이려고 해도 자기 본성이 그쪽으로 이끌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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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에서 이방인에 대하여 언급할 때에 이방인은 육체의 할례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를 기준으로 본다고 설명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가치 기준에 의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냐 아니냐는 기준은 분명히 교회에 다니느냐 아니냐의 문제와 다른 것입니다. 교리문답이나 교리에 의한 세례를 받았느냐 아니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그 생명의 본성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와 동일한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생명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은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 더 수월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닌데 스스로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기는 해도, 교회에 다닌다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군복을 입어 군인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생명의 법이기 때문에 삶으로 그 생명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예수 믿는 사람의 삶이라고 인식하는 그 삶이기도 합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속사람의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려는 목적이나, 삶에서 흉사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나 혹은 육신의 삶에서의 복락을 담보받기 위해서 신념을 가지고 노력하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면 예수님과 믿고 순종하는 사람 둘 중에 누가 유익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문자로 질문을 만들어 놓고 보면 그래도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바램이나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의 바램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단지 그 바라는 바를 하나님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그 영을 표현할 형상이 필요하셔서 사람을 만들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표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서 육신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지, 육신이 성공하고 평안해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식의 적반하장격의 신앙을 좋은 신앙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바로 이방인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인 곧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바라는 바가 모두 육신의 형통과 복락과 안녕과 성공이라는 프레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경쟁 속에서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갈수록 그 바라는 바가 담보된다고 믿기에 그것을 위해서 육신으로 노력하고, 육신의 힘을 넘는 도움을 신께 바라면서, 그 신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경전을 육신으로 지키려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서 의로워진다는 것이 바로 그 목적 아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얻든 다른 신이나 자기 육신의 힘으로 얻든 육신은 세월을 따라 약해지고 누구나 다 죽게 됩니다. 그것은 육신이란 분명히 소비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육신이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것입니다. 그런 육신의 성공과 안녕과 복락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종이컵에 귀한 포도주를 보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안녕과 복락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성경을 지키려 하는 것과 같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생각과 반대이니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완전히 허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속사람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 삶에 있어 육신은 성공하고 복락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도구이자 선물입니다. 육신을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과 육신의 복락을 추구하는 사람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생각을 이루어주는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이 꿈꾸는 모든 것에 대하여 성경은 정말로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고, 전도자의 말과 잠언이 대표적입니다. 결국 바울 사도가 이방인의 허망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의 평안을 구하는 육신의 정욕에 관한 것입니다. 모든 본질을 육신에 두기에 이방인의 구분도 육신에 두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복 주시는지 벌을 주시는지도 육신의 어떠함으로 판단합니다. 그런 기준으로 하면 예수님이나 순교자들과 사도들은 다 벌 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간구, 자기 안에 있기에 사랑하는 성도들도 함께하기를 구한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삶은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바램으로, 또 부자 되고 성공하고 평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목적을 인하여 추구하는 착하고 성경대로 사는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인하여 본성에 이끌려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되는 삶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속하지 않은 삶은 이방인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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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에서 ‘교회는 제도와 건물을 세우고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가 세워지는 법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법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는 정말로 찾기 어렵습니다. 어디 숨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와 건물이 있어야 교회라는 안목으로 보니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빨간색 물건인데 스스로 파란색이라고 생각하면서 찾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함,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기에 그 생명이 장성하여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성품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것, 그리고 그 장성함은 연명하듯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이 충만하여 자라는 것은 개인에게 영광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이 만나면 사랑이 넘치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바울 사도만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구절,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라고 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모이면 그곳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그들이 모였다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이니 그들이 모인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이 함께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드락 메삿 아벳느고가 풀무불 안에 던져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 불에 던져지니 바람 같이 누군가 나타나서 불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불에 던져진 사람은 세 사람인데 안에서 춤추는 실루엣은 네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 그것이 이미 하나님께서, 또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a apple을 모아두면 이미 그 무더기에는 the Apple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로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이 모이니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목사 라이센스를 가진 자가 건물을 마련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사람을 모아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은 교회에 대한 이 개념만 독립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교회를 인식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성품이 충만하고 장성하여지는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되고, 그런 사람이 가진 생명의 안목이 있어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므로 세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고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모든 것에 앞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장성하여 지는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세워지는 것은 또 다른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라는 머리 아래 있는 지체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순종되고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의 근본인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이기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동일하기에 서로를 용납함에 거부감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당번이 있습니다. 나름의 법이 또 있습니다. 규칙이나 당번이나 법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은 어떤 수고와 손해를 서로 보려하지 않기 때문에 강제하는 것입니다. 나만 수고하기 싫고, 나만 손해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물론 말은 천국에 같이 가야한다거나, 혼자 다 하는 것이 옳지 않고 부담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회칠입니다. 무덤에 칠한 회칠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며,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예사로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정말로 온전히 교회의 정체성으로 순종하는 교회는 단언컨대 법과 규칙과 당번을 정하여 하지 않으려는 사람을 이끌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서로하려고 해서 당번을 정한다면 모를까. 우리 몸에 있는 어떤 세포나 지체도 머리로 대표되는 유전자의 다스림을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이 체계가 무너지면 자가 면역질환(스스로 자기 몸을 공격하는)이 되거나 남의 장기를 이식 받은 사람처럼 거부반응을 줄이기 위하여 면역억제제를 먹어야 합니다. 교회에 서로 하지 않으려 하니 봉사 당번을 정한다는 것이 바로 그 면역억제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다는 것은 교회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같은 유전자를 가진 정상적인 몸 안에서 서로의 몸을 공격하는 일은 없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이 당번을 정하여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다툼이 끊이질 않고, 심지어 강등과 문제가 없는 교회가 있을 수 있느냐는 말까지 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그런 곳은 제 아무리 번듯해보여도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교회라고 하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는 아닌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을 때 발생하는 수고를 해소할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제도를 만드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 당회와 같은 조직을 만들어서 육신이 모이므로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육신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이 발생합니다.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먹여야 하니 먹을 것을 준비해야하고, 먹고 나면 치워야 합니다. 여기서 육신의 수고가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이 수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바로 그리스도의 온전한 교회냐, 아니면 세상의 제도 아래 있는 교회냐를 결정합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였으면 믿음이 더 좋은 사람이 육신의 문제를 수고하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회가 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바로 그것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며 세상의 교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대접받고, 장로가 상석에 앉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세워진 참교회가 아니라 목사와 건물을 마련하여 사람을 모은 세상의 교회, 우리가 아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육신의 수고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속임수와 교훈에 따라 처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자 모였으니 하나님을 더 아는 자가 육신의 수고를 덜 하는 제도를 만들고, 당번을 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이라는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품이 장서하면 장성할수록 천해지고 낮아지며, 육신의 수고를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더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다스림을 받으니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머리의 지시에 따르는 연합된 몸으로 서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사랑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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