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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이 자신의 정체성,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당연히 참된 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이웃과 더불어서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는 것은 자기 존재에 맞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참된 것을 서로 말하고 나누는 이웃은 서로 지체가 되는 이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특히 그 지체가 되는 사람들을 ‘우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그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속하여 지체를 이룬다는 것은 바울 사도와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한 지체에 다른 유전자가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웃’이라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라는 것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아는 바와 같이 강도 만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쳤지만 제사장과 레위인이 천대하고 무시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피를 만지면 부정해지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사를 위하여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포도주를 부어 상처를 치료하고 주막에 데려다 주고 추가적인 비용도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이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귀한 일이기에 그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에 지장이 발생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귀한 일이므로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또 세상에서 귀하다는 가치관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합니다. 그것이 귀하신 하나님의 격에 맞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귀함은 세상의 가치로 대접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가지면 정말로 귀한 존재가 되기에 세상의 모든 존귀한 것으로 격을 맞추어야할 것 같지만 정작 그 귀함은 세상에서 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게 되는 것 같으나, 그렇게 되더라도 자기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사람이 바로 이웃이고 지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말과 잡혀가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은 죽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는 신분인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듯, 유대인들이 볼 때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는 예수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가진 본질적 의미인 것입니다.


진정한 나의 이웃은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주장대로 자기 몸을 소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웃이 진정한 이웃인데, 그 이웃과 지체가 된다는 것은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가 서로의 의를 위하여 자신이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사는 관계가 바로 진정한 이웃이자 지체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체가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된다는 것은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다르면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더 온전하고 더 의로운 이가 그렇지 못한 이의 주장에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어야 서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도가 생명이 되지 못한 사람이나 아직 어린 사람들이 자기 의를 주장할 때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자기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을 주장하는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듯 자기 육신으로 십자가의 도가 생명이 되지 못하였거나 어린 사람을 위하여 종과 같이 섬기는 모습을 보일 때,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보게 되므로 거듭나게 되어 또 다시 같은 생명을 가진 지체가 되는 것이 바로 전도고 교육이며 교회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참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 앞에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를 가진 더 의롭고 온전한 이가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의 주장에 이끌려서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 바로 육신을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과 삶이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 참된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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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을 하고 이어서 여러 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에서부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말씀에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5장에서도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바울 사도는 가장 먼저 거짓을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새 사람을 입었으니 거짓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쉬운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짓말은 파란 것을 보고 빨갛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거짓입니다. 성경은 진리와 정체성에 대한 거짓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행하며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개가 야옹이라고 소리 내는 것과 같은 것이 자기 정체성과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에 대한 거짓의 가장 결정체는 사람이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짓인 것은 사람이란 존재는 사람의 목적대로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 아닌데 자기 의로 사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뜻대로 사는 것이 존재 정체성이 아닌데 사람의 뜻대로 사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짓입니다.


앞서 바울 사도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진리로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그 새 사람은 심령에서부터 새롭게 된 새 사람입니다. 심령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이 된 사람이 새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의에 합당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그 존재의 목적에 합당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정체성을 회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삶과 그 삶의 목적이 일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이 없는 삶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거짓은 사람이 존재 목적과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이 거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기에 너무 합당하다고 여기시는데 사람은 스스로를 부정하게 여깁니다. 하나님 외에는 선한 분이 없는데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가진 존재가 되므로 거짓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존재가 거짓이 되면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도 다 거짓입니다. 간첩이 착한 일 한다고 선량한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집안의 돈을 목적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의도와 사랑의 정체성이 다르므로 모든 것이 거짓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하나님의 소유이고, 만드신 이가 정한 뜻이 있는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된 것이 거짓입니다.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것이 증거입니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육신을 가진 사람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과 사람이 육신 가진 인생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거짓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 곧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그 순간부터의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거짓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 사람을 입는 것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말씀을 보는 것과 동일하게 거짓이라는 것도 사실을 그릇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하신 의와 다른 존재가 된 상태 그것이 거짓의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지음 받은 존재가 자기 의를 가지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삶을 사는 그 자체가 바로 거짓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본성이 되어 살면 하나님이 선하신 이상 그 선하심만이 육신의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만 바로 믿으면 도둑질해도 되냐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갖 행위 규범은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자기 생명으로 알고 살기만하면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의가 고스란히 그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기록하신 뜻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로 새롭게 된 삶에 대하여 가장 먼저 거짓을 버리라고 한 것은 새 사람을 입고 나면 자연스럽게 버려지는 것입니다. 거짓은 존재 목적과 다른 의를 가지고 사는 그 자체인데, 새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시작하면 이어 나오는 많은 권면들이 본성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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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7-24) 새 사람을 입으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7. 9. 10:34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장성함이 충만해지기를 권면하면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고 권면의 한 절을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새사람이 어떤 생활의 모습을 보이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과 궤를 같이 하는 말씀을 자주 말하는 편입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은 신앙의 유익한 변화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새로움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삶, 더 성실하고 착한 삶,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삶으로 이루어낸 성공과 같은 것을 새로운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늘 언급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추구하던 것을 하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그 추구하는 것의 동력을 삼아 더 잘 이루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부활도 거듭남도 아닙니다. 주판으로 하던 것을 계산기, 컴퓨터로 하는 것일 뿐 전혀 새롭지도 않고 거듭난 새 생명도 아닙니다. 썩은 고기 먹다가 신선한 고기 먹는다고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 되는 것이 아니듯.


바울 사도는 ‘새 사람’에 대하여 분명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가르침을 받음을 인하여 유혹의 욕심을 버리고 썩어질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버리고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 받은 새 사람이라고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새 사람’은 심령에서부터 새롭게 되는 사람입니다. 즉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인하여 밖으로 그것이 나타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속사람의 변화는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배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이 에베소서 내내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모습인가?’라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세상의 가치로는 죄인이 되는 정체성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믿어 세상에서 성공해서 그 성공을 하나님께 영광으로 돌리려는 것과는 전혀 반대인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속사람이 되어 그 거듭난 속사람으로 새롭게 된 삶으로 거룩함, 곧 구분된 삶으로 지음을 받은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새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어 행실을 바꾸고 그 바꾼 행실을 바탕으로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새 사람이 아닙니다. 도덕이든, 사회, 경제적 경쟁능력이든, 종교적인 신령함이든 더 많이 가지고 높이 오르고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가치관 안에서 이전에 그 가치관이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나 모습을 보이지 못하다가 예수 믿고서 그것을 추구하기에 합당한 경건하고 성실한 모습이 되어 결국 그 높은 곳에 이르게 되기도 하는 것을 ‘새 사람’이라고 성경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설명하는 새 사람도 그런 요소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은 그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가치 기준이 기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다고 하시고, 거듭난 생명이라 하시고, 부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하나님의 의에서 떠난 사람이 그 의를 회복한 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이것은 이의가 없는 분명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씀하시는 성경을 보면서 자신들의 가치기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하늘에서 말구유로 보내셨고, 천한 자들과 먹고 마시다, 세상 최고의 실패자요 죄인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내려가고 낮아지며,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종이 되고, 세상의 가치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라고 보이셨는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힘입어 세상의 가치기준이 성공이라고 말하는 것, 선하고 착하다고 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런 세상의 가치관을 좇는 것을 유혹의 욕심이자 썩어질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유혹은 하나님의 아들은 초인적이며, 세상 가치관에 의한 경쟁에서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라는 유혹이라는 것을 앞서 많이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그 유혹들이 바로 사람들이 헤어 나오지 못하는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 경쟁력에서 더 뛰어난 존재여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의 근간인 하나님의 의가 말씀하시는 진리와 의와 거룩함은 세상 가치관과 반대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옳다고 여기는 자가 의인이 되지만 하나님의 의는 의로운 자가 죄인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바로 의인이 죄인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어 섬기므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게 하시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그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대로 육신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말씀에 이어 새 사람의 행실에 대하여 말씀하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도 그 하나님의 의로 거듭난 생명으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을 설명한 것이니 지켜야할 가이드나 규칙으로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언제나 속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생명이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듯 하나님의 의로 거룩함을 입은 새 사람의 삶은 성경을 보고 새 사람의 행실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 심령이 그 삶을 이끌므로 자기의 육신이 소비됨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듯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새 사람의 진정한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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