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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16) 자라는 생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7. 4. 07:37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한 개인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신 것도 이러한 이치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하심은 이 세상에서 오직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하실 말씀이 있고,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표현하고 보이시려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의외로 그 믿음의 결론이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은 노력하는 것이지 이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서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들이란 존재는 아들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노력하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사람으로 나면 그 난 육신이 자라는 것이지 태어난 다음에 무언가를 더 붙이거나 업그레이드 하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고 신앙고백을 한다면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와 신앙 안에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가치관은 보편적 상식이 되어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지나서 이것을 부인하면 이단이 되거나 신앙 없는 이단아가 되기 일쑤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의 이러한 어리석음에 대비라도 된 듯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아주 큰 속임수입니다.


이것이 속임수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능력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40일 금식기도한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기도해서 능력을 행하면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의 현상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더 가깝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 가깝다는 것은 그 방향의 아득한 곳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한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시험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기적을 행하는 초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돌과 같은 율법도 다 지킬 수 있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상하지 않으며, 또 그것을 행하는 이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기는 자를 섬기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귀의 생각이 오늘날은 사람이 예수님이 될 수 없고 단지 노력할 뿐이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기적적인 존재이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서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 속임수는 사실 모든 사도들이 목숨을 바쳐서 다투고 바로잡으려고 한 생각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을 이기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면 그런 속임수를 이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이 속임수는 세상에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속임수와 궤술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속임수라는 것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최종 목표도 아니라 시작점이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이 땅에서 보이신 것은 예수님(the Christ)과 같이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가 그리스도가 되게 하려 하심인데, 자신(a christ)이 그리스도는 될 수 없고 노력할 뿐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보내신 자를 믿고 안다는 것은 결국 보내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함입니다. 즉 거듭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자기 힘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려 노력하다가, 거듭난 뒤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서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는 것은 거듭난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본성은 같고, 인생의 목적과 추구하는 바가 같은 것입니다. 단지 도구만 바뀌었을 뿐.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결국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거듭나기 전에 육신은 의학적으로 살아 있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 안에서 보면 죽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장성한 분량’, ‘그에게까지 자란다.’와 같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없으면 안에서 밖으로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밖에다 덕지덕지 붙입니다. 공로를 쌓고 가진 것을 드리는 행위를 쌓아 올리는 것이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자랍니다. 바울 사도가 간구가 이루어진 모습을 설명함에 있어 자라고, 충만해지고, 장성해진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는 생명이고, 그 생명이 자라는 것을 자신이 체휼했기 때문입니다. 체휼했기에 자기 안에 있고, 자기 안에 있으니 간구했고, 자기 안에 있기에 그 간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나서 어른이 되면 자신이 자란 것을 알고, 또 어른이 되는 과정을 자녀와 어린 아이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생명은 그 창조하신 목적이 이루어진 사람이고, 그 창조의 목적이 이루어진 모습을 처음으로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종합적으로 보이신 자리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정의를 내린 하나님 아들과는 반대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생명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하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법과 의로 볼 때 죽어야 할 정도의 죄인이었습니다. 본질은 아니지만 그런 심판을 예수님께서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신앙으로서의 결백을 주장하려 발버둥치는 모습과 상반된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기에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함을 이끄는 생명의 정체성을 속이는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와 세상의 교훈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본질상 마귀와 같은 가치관입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는 삶입니다. 거듭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없으니 장성함도, 자람도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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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16) 세상에 있는 교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7. 3. 05:00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해지는 것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에 빠지지 않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람의 속임수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앞서 사람의 속임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한 속임이라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속이는 사람의 세계에 빠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신이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 사도는 (세상의) 교훈도 간사한 속임수와 동급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세계에 있는 교훈이라는 것도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세상의 철학과 학문을 초등한 것으로 정의를 내린 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세계에는 참 유용하고 놀라운 지식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사람을 참으로 선하게 이끌고 참되게 하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 과감하게 정리한다면 그 모든 것은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기 전 하나님의 아들들이 반한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결합되어 네피림이란 장수들이 나왔지만 그것은 결국 홍수라는 대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홍수가 날 때에 성경은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땅 깊은 곳에 있는 물들이 터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아 하나가 된 것을 인하여 난 홍수는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하여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이란 갈급함을 해갈하는 것임을 생각해보면 사람이 알고자 하는 것을 채우는 것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말씀은 늘 물로 대변됩니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쳐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게서 난 지식과 교훈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은 것과 같이. 그랬더니 네피림과 같은 큰 장수가 나오더니 물도 큰 물이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둘 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궤도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갈증, 말씀과 지식과 교훈에 대한 갈증을 해갈할 것 같은 물이 넘쳐나는데 정작 사람들은 그 물로 인하여 심판 받고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서 나는 지식과 교훈, 흙으로 창조된 사람이기에 땅에서 나는 것이라고도 표현되는 그 교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분명히 갈라놓았습니다.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갈라놓으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합하여지면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고 보면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세상의 지식을 엄청나게 이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입니다. 그 결과 매머드급 교회가 나오기도 합니다. 네피림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삶이라는 딸들의 아름다움을 교회에 가져와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혼인시켰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고, 그것을 미끼로 사람들을 모으니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큰 교회가 생기고 모든 교회가 그렇게 큰 교회를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세상의 교훈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에 대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가치에 대하여, 세상에서 성공하는 선함과 도덕적 행실에 대하여 교훈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진 사람은 그것에 빠지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교훈, 과학과 철학과 사람을 선하게 하는 많은 교훈들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장성하고 많은 것이 하나님 아들의 덕목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아들(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욕을 하면 안 되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성공과 세상 사람들보다 청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그 교훈은 바로 사람의 궤술이고 간사한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금식하신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와 같은 말입니다.


특히 이 중에서 사람의 선함에 대하여는 아주 혼돈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간사한 속임수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입에 욕을 달고 다니면 행패 부리며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어야 하느냐는 반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많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저는 묻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도둑질이나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도둑질하라고 되어 있다는 말인가? 라고.


사람이 말을 선하게 하고 행실을 도덕적으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욕을 많이 하셨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호통이 한국의 일상적인 X새끼라는 욕과 동일한 수준이라고도 합니다. 말도 엄청 험하게 하셨습니다. 종교와 정치가 하나인 사회에서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이 없는 험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함과 도덕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는 세상의 교훈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다워진다는 교훈은 사람의 궤술이고 간사한 속임수와 동급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본성이 되어 그 생명의 장성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의 대척점에 있는 것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장성함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세상에 있는 교훈은 분명히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 교훈들도 다 하나님의 경영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거나, 더 나은 신앙이 된다고 하는 교훈은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과 반대편에 있는 교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것일 수 있지만 속 심령에 그리스도의 장성함이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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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장성하게 되는 것은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로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 단지 유혹을 이기기 위함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위함임을 앞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언뜻 그리스도로 장성하게 되는 것이 사람의 간사함을 이기기 위함이라는 다소 단순해 보이는 목적을 가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이 이면에는 본질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사람의 궤술 곧 사람의 간사한 속임수와 같은 것을 이긴다는 것은 사람이 속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알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함과 대칭이 된다는 것은 나름 급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단순한 속임수가 아니라 근원적인 속임수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자신을 속이는 것은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4장 후반에 가서 ‘유혹’이라는 것과 ‘마귀가 틈을 노리는 것’과 같은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도 궤를 같이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 바울 사도의 이 권면이 어떤 궤도 위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간사한 유혹과 속임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의 대척점에 있는 속임수는 당연히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임의 주체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아들에 대한 속임수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마귀라는 것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서의 성격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생각이 바로 마귀가 된다는 것에서 4장 후반에 나오는 마귀가 노리는 틈이라는 것도 역시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진 생각이 바로 마귀가 노리는 틈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생각이 사람을 마귀로 만들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사람의 궤술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험을 생각해보면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 시험의 공통분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마귀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마귀의 생각에는 하나님의 아들은 돌이 떡에 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돌은 율법이고 떡은 사람과 하나가 되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날도 성경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하지만 성경은 자신의 노력이나 신념으로 지킬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이라고 해도 그것을 지켜서 의로워진다는 생각으로 지키려 하면 다 돌입니다.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 듯 신약이든 구약이든 사람의 신념으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즉 돌이 떡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다고 마귀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그 자체가 마귀와 같은 존재입니다. 마귀나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은 동일합니다. 특히 사람이 육신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뜻하신 의와 상반되는 것이니 그 생각을 가진 사람 그 자체가 마귀고 사탄인 것입니다. 알고 보면 마귀는 영적 세계에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속이는 주체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다른 시험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 조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기적을 일으키고 초인간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이 바로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아도 예수를 잘 믿어서 성령이 임하시면 초인적인 능력을 행하게 되는데 그것이 좋은 신앙이라는 식의 생각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시험이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사람의 궤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을 시험한 시험은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마귀에게 절하는 것인데, 이것을 풀어보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으려면 돌로 떡을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가진 마귀에게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즉 마귀가 가진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경배하면 천하의 영광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이 빠져있지만 스스로 이 시험에 빠진 것도 모르고 자신이 마귀를 경배하고 있는 마귀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도 모르는 시험입니다. 바로 세상에서의 영광과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그 보편화된 신앙이 바로 이 시험인데 사람들은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보면 사람의 궤술과 속임수 그리고 마귀가 노리는 틈과 유혹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속이고, 유혹하며 그 틈을 노리는 것이 바로 사람의 궤술이고 간사한 속임수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함의 대척점에 있는 가치관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고 육신으로 천한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었는데,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으면 기도로 사람의 병이 낫고, 성경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겨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세상의 성공을 주시는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생각이요 사람의 궤술이자 간사한 속임수며 마귀의 유혹에 빠져 마귀를 경배하는 것인데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속임수와 마귀의 유혹은 그것을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링에 올라간다는 것은 이미 같은 종목, 같은 체급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에게 천군 천사가 대응하지 않은 이유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그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장성하고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물러가라 외치고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한 줄기 빛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장성해지는 것이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속이고 유혹하는 사람의 궤술과 마귀의 유혹과 간사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속임수와 유혹을 이기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라 어두움과 무관하게 빛이 되는 것입니다. 빛이 되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리치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가장 온전한 이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상함에 이르면 사람의 육신에서 비롯된 육신의 정욕과 마귀의 유혹은 이길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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