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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빈궁한 사람 곧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도 많고, 구제에 관한 말씀도 많습니다.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그런 말씀들이 공산주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해방신학이란 이상한 학문에도.


어이없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를 비난하면서 자신들도 성경의 가난함을 경제적인 가난함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서 단지 온건하고 민주주의나 자유경제 체제 안에 있다는 차이만으로 전혀 다르고 상종하면 안 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나 오늘날 기독교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난을 경제적인 궁핍, 육신의 궁핍으로 보는 것은 같은데 말입니다.


성경에서 가난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라야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난함은 바로 심령의 가난함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사람의 내용이 궁핍하다는 것입니다. 즉 존재목적과 삶의 의미가 궁핍하고 가난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제 역시 바로 그 궁핍함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궁핍함을 구제하기 위하여 자기 손으로 수고한 선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가난에 대한 구제를 경제적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은 말씀은 ‘그래 자기가 수고한 소득을 나누어 주어야 진정한 구제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의 버전으로 바꾸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이 됩니다.


사람들의 진정한 가난함은 경제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가난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이 지극히 가난한 것이 진정한 가난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난함을 구제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 드려서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보이시면 그 정체성이 바로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선으로 여기시는 일인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인생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유일한 선(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이 덜 사용될수록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남보다 덜 해도 하나님을 믿기에 합격하는 것이 감사한 일이라고 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하는 수고보다 기도하는 것으로 병이 낫는 것이 더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육신을 덜 소비한 상태에서 육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수고의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이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에 사용되는 일회용 소비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으로 종과 죄인이 되어 섬기고 수고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들 자기 스스로 조성한 것도 아닌 인생을 자기의 의를 선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의에 반하는 것은 악으로 여기는 가치관들을 가지고 삽니다. 만의 하나 그것이 다들 잘 협의가 되면 다행인데 사람들마다 의가 다르고 그래서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르니 늘 갈등입니다. 알고 보면 악의 대한 기준보다 선에 대한 기준이 더 물러설 수 없기에 더 깊은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도적질한 것도 모자라서 그 인생의 목적마저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 주장 앞에 인생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맘대로 하나님 아들을 규정한 자들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것입니다.


육신은 바로 그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 손으로 수고하는 것입니다. 손과 발은 행함을 대표하는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도적질한 자들이 주장하는 그 어두운 주장 앞에 종과 죄인이 되어 육신을 수고하는 것이 바로 궁핍한 자를 구제하는 선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함이 충만한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수고하므로 그 모습을 보고서 인생의 목적이 궁핍한 자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 받은 것을 알 수 있도록 수고하는 선한 일을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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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0 (13:3-8)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7. 18. 23:04 Writer : 김홍덕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는데, 공회에 잡혀가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멸망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자기 신앙의 세계, 자기 가치관의 세계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밝아지므로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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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권면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에 이어서 도적질하던 자는 다시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사람, 자기가 먹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선악의 기준에 합당한 행동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 연결이 도적질과 같은 행동이 마귀의 유혹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앞서 길게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은 행위 규범에 관한 말씀이나 책이 아닙니다. 존재 규범에 관한 말씀입니다. 도적질이라는 것도 물건을 훔치는 도적질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수적이고 종속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가장 큰 도적질은 자기 인생을 훔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조성하거나 선택하지 않은 인생을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도적질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그 큰 도둑의 작은 습관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도적질하던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 의로 살던 인생에서 벗어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즉 자기 인생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죄가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인 것을 생각해보면 더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도적질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목적을 가지고 지으신 인생이고, 그렇게 분명하게 주인이 그 목적대로 살기를 바라시면서 주신 삶을 뻔뻔하기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육신으로 보고 듣고 생각한 가치관으로 선과 악을 판단하면서 그것에 맞추어서 사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귀의 유혹이라는 것이 하나님 아들, 곧 그리스도와 인생의 목적에 대한 유혹이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도적질을 단지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자 인생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둡고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인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질적 도둑인데, 그들이 모여서 역시 자신이 만들지 않은 세상의 물건을 훔친 것을 도적질이라고 하는 것은 해적들끼지 서로 도둑이라고 하는 멍청한 짓에 불과한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기 인생을 훔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과 같이 다시 도적질 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면 가장 먼저 인생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자기 삶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귀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듭남이고 구원인 것입니다. 내 인생을 주인인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기본적인 양심만 있어도 인생이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도적질, 성경이 말씀하시는 도적질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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