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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1-14) 성도의 마땅한 바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7. 31. 09:51 Writer : 김홍덕

바울사도의 권면은 성도들에게 하시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는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나 제도적으로 설립된 교회가 시키는 것을 잘 따르고 그 보상으로 세상에서의 평안과 천국에서의 금은보화를 얻을 것을 믿는 그런 성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 암묵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성도, 열심히든 아니든 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바울사도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성도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배우들이 아주 전문적인 대사를 합니다. 의학용어나 법률용어 같은 대사를 하지만 그들은 그 말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공부나 경험 없이 그 대사를 하기까지 많은 과정을 겪은 이들의 말을 대사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역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노릇’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 없이도 얼마든지 바울사도의 권면을 자기 행위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선한 말을 하고 음란한 행동은 물론이고 생각까지 절제하면서 사는 것은 자유입니다. 하지만 바울사도가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사랑,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하여 보이신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대사처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되어야 어머니의 사랑을 할 수 있듯.


따라서 바울사도의 권면, 아니 사도들의 권면을 행동 강령으로 삼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상하지만 자신들이 사도들이 말하고 있는 성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력하는 것은 별 소득이 없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데,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세상의 법 앞에 죄인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빌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사람이 사도들의 권면을 자기 행위규범으로 지키는 것이 이웃에게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죄기를 바라며 기록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사도의 권면을 지키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성경이, 사도들이 말씀하고 있는 성도가 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것 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하려면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듯.


바울사도의 이 권면들이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은 성도가 되라는 의도가 기초입니다. 성도가 되지도 않았는데,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되지도 않았는데 이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마부가 마차를 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고 그것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믿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 생각의 일환으로 사도들의 권면을 행동으로 지키려는 것은 한 마디로 인생낭비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늘 처리에 맨 실로 바느질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본받으려면 하나님의 본성이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하려면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어야 하며, 성도의 할 바를 행하려면 먼저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있고, 그리스도의 생명의 본성이 나타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바울사도의 권면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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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장의 바울사도의 간구 이후에 권면하는 말씀들은 여러모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규범이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무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어떤 생명을 가진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의 간구의 내용과 그 삶의 정체성이 동일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탐욕을 버리라는 말씀은 다분히 육신의 일로서도 충분히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인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가장 핵심입니다. 육신의 행위에 대한 규범에 대한 말씀은 그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게 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다움을 유지하면 자연스레 지켜지는 것입니다.


음란을 먼저 설명해보면 사람들은 그냥 쉽게 간음과 같은 성적인 문란이나 탐욕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근원적인 간음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짝을 탐하는 것입니다. 음식 재료를 다듬는데 사용하는 칼이 그 날카로움을 가지고 다른 것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간음은 자기 짝이 아닌 상대와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다른 것을 사람이 사모하는 것이 간음이고 음행인 것입니다. 그 처음은 아담의 선악과 선택이었고, 그 이후에 노아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은 것이었고, 사도들의 시대와 오늘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본질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말씀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고민하는 시점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지금 바울사도의 권면은 단순히 그 문제를 넘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마귀의 유혹과 같은 간음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더 비중 있는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지기를 간구한 대상들에게 하시는 권면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신적인 음행은 성경 어디에서도 용납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경이 육신적인 음란에 대한 경계를 본질로 삼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그 본성을 좇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들고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려고 매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음란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그 삶이 음란할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질적인 것이 해결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귀속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을 본받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도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산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인데,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았고 그 행실로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그것을 나타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새로운 삶의 모습은 바울사도가 열거한 것을 행위로 지켜내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이 그 본성대로 살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권면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음행도 그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음행이고 더러움도 그 하나님의 본성에 비추어 더러운 것,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인생을 주신 뜻과 다른 본성을 좇는 것과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본성의 표현들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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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 기준으로 봐야하는 것은 당연한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악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악이고, 훼방이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사람들이 가진 법리나 도덕이나 양심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사람들은 하나님만 믿으면 사람들의 보편적 가치관을 무시해도 되느냐의 반문을 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행하는데 그것이 사람의 보편적 상식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현대에서 만든 자동차의 부속품의 보편적 기능이 현대자동차의 설계자와 다르다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악독, 분냄, 떠드는 것, 훼방하는 것 그리고 모든 악의는 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기대하시는 것에 반하는 것은 사람들의 기준에 아무리 선하고 보편적 상식에서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훼방하는 악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용서에 대하여 하시는 말씀의 기준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을 행해서는 고린도에 가게 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한 적도 있는데 지금은 정작 용서를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사도가 이중적인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용서하려면 그것에 대한 개념이 달라야 합니다. 같은 파이를 먹으려다 빼앗겼다면 그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그것은 단지 참는 것이고, 빼앗긴 상황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세계라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세상에서 성공하겠다는 것을 추구하면서 서로를 용서하는 것은 일시적일 수는 있지만 진정한 용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이 핵심인 이유를 용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가치가 달라졌고, 먹을 것이 달라졌고, 추구하는 것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인하여 발생하는 피해나 손해는 다툼이나 분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상의 관점으로 보면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엄청나게 많은 순간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육신의 어떠함, 곧 세상 가치관으로 가치 있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세상 가치관을 가지고 그것을 탐하고 추구하는 자들로 인하여 당하는 피해나 손해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용서를 하려면 예수님과 생명이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생명이 같아지는 것이 거듭난 것이고 그리스도와 같이 용서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바울사도의 권면도 이것입니다.


훼방과 악독은 버리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시는 것과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을 버리라고 한 것은 맥락이 같은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하다고 여기시는 것이나 하나님을 훼방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할 리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노함과 분냄과 훼방과 악함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성품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자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의 연장선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그 성품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유념하라는 것, 본분을 지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것에 충실하면 서로 용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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