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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것은 바울사도는 음행과 더러운 자는 우상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5)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간음하지 말고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는 설교나 교훈은 많이 들었을 테지만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하는 말을 잘 들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것은 우상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음과 더러움이 우상숭배라는 것임을 알지 못하면 사실 성경은 거의 모르는 것입니다. 앞선 글에서 간음과 더러운 것이나 탐욕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이외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다른 글에서는 가장 큰 도둑질이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아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도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어 성경을 이렇게도 보네?’라는 수준에 그친다면 사실 별 의미 없습니다. 이때까지 성경이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면 지난 모든 날이 하나님을, 성경을 ,그리스도를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음행과 더러운 것을 설명하였는데 이때까지 듣지 못했던 설명이라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알지 못했다면 그 생명과 말씀과 의가 속사람 안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으니 성령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이렇게도 보는구나가 아니라 “나는 이때까지 몰랐구나?”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을 힙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음행이 성경에서 다른 범죄들보다 유독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간음이라는 것이 우상숭배의 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영혼을 가진 사람의 삶이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신 인생의 목적을 버리고 세상에서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좇고 그것도 모자라서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께 힘을 빌리려 하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우상숭배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심한 책망을 받을 때 그들이 성전을 허물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도 몸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만 생각은 세상의 가치를 좇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님이 이 땅위의 나라 이스라엘을 독립시킬 것이라고 믿은 제자들과 유대인들, 기왕이면 세상의 철학과 학문에 능통한 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골로새 교회의 사람들과 같은 이들이 바로 성전에 우상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조금만 양심적이면 오늘날 교회라고 하는 대부분의 곳이 이러한 우상숭배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횡령하고 여자성도와 문란한 문제를 일으키며 구제는 않고 교회만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결국은 교회와 같은 파이를 먹고자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세상의 이목에 옳다는 프레임을 만들고 그것에 부합되려 하는 것이 다 그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가치관을 혼합하는 간음이 그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배우자 아닌 사람과 동침하거나 손으로 빚은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간음이나 우상숭배를 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이미 설명했으니 교회에 다닌다고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설명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교회에 가서 사업이나 학업이나 취업과 같은 것을 빌고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기업과 무관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옳다고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자신의 의가 되어야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신 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고, 피라미드의 꼭대로 올라가는 것이 선이며 성공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선하게 여기고 칭송받는 사람이 되려는 신앙은 전혀 하나님 나라의 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와서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 죄인이 돼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이을 수 있겠습니다. 그런 법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와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육신의 행위 규범으로 속이며 가르치는 자들(자신들도 모르므로)에 자신을 맡길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이 권면들이 행위규범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이제 하나님을 새롭게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이때까지 우리가 세상의 가치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혼합했던 것이 간음이고 우상숭배였다는 것을 시인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그렇게 알았다는 것을 시인하므로 바울사도께서 권면하는 대상 곧 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이 이 말씀을 바로 받고 우상숭배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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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음행이라는 것이 많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영이시고 사람은 형식을 가졌으나 자신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알 수 없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란 존재는 그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를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를 짝 아닌 사람과 관계하는 간음으로 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음 사람들에게 음행을 버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개념에 입각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회복했다는 의미입니다. 즉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과 그 삶이 일치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럽다는 것도 비슷한 개념입니다. 더럽다는 것은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것이 함께 있게 된 상태를 포함하는 의미입니다. 아주 좋은 향수라도 깨끗한 흰옷에 쏟아지면 옷을 더럽게 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맞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더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돼지에게 던져진 거룩한 것과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탐욕도 같은 것입니다. 탐한다는 것은 현재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탐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물건은 말할 것도 없고 성욕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탐하는 것도 같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이나 심지어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도 자신의 의지로 만든 것이 아닌데, 그 육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것인 양 자기의 의지대로 채우려는 것은 탐욕인 것입니다.


누추하다는 것도 육신의 삶이 누추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천국을 가지는 것을 부유함으로 보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누추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바울사도나 사도들은 비단 옷을 입고 황금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과 누추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어리석음과 희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반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바보 같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것과 달리 세상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말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희롱이라는 것도 어떤 사람을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정체성과 다른 것으로 빗대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든 사람을 세상의 가치로 채워가는 것을 선하게 여기면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희롱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사람들이 희롱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는 낮아지는 법으로, 종과 죄인으로 자기 의에 가득한 사람들이 그 가치관이 죄악인 것을 알도록 섬기시는 왕이신데, 사람들은 육신의 능력을 극복하고 세상의 임금이 되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했기 때문에 희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우리가 일상 중에 도덕적으로 무례한 것이나, 법률적 사회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간음과 어리석음과 같은 말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합당하게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에 사람들이 벗어나서 세상의 가치를 자신의 것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법률에 의하여 죄가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예수를 믿을 덧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인데 거듭난 사람에게 바울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음행과 탐욕과 같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면 자연적으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어떤 기계들이 고장이 나면 대부분의 경우 동일 회사에서 만든 부품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같은 설계 곧 같은 DNA에 기초하여 만들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 세상에서 말하는 간음이나 탐욕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그것을 추구한다고 믿지 않고서는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말로 늘 부족하다고 합니다. 예수만 믿으면 도적질해도 되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는 그 사람 안에 거듭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에 하나님을 힘을 빌리고, 세상 사람들과 같은 파이를 다투면서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과 같이 취급하기 때문에 그런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은 새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이 세상의 법을 어기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순교와 같은 의의 충돌이 아니라 행위로 죄를 범하는 길로 자신을 이끌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거듭난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니 그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거룩하게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이 이 바울사도의 권면은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그러나 자신이 거듭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고 피라미드 위를 추구하는 가치관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 거듭남부터 먼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색안경을 낀 사람과 같아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다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힘든 것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보면 바울사도의 권면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 그 그리스도의 사랑의 귀함을 세상 가치관에 대입해서 존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졌으니 세상이 귀한 사람을 대접하는 그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하는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세계인데 에베소서의 많은 권면들, 또 사도들의 권면들은 사실 이것이 중요한 뼈대입니다.(앞으로 이것에 대하여 많이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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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사도의 권면에는 상태에 대한 조건이 있습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고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이 바울사도의 권면이 가진 구조입니다. 성경을 지키려면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듣는 사람이 그 ‘누구’가 아니라면 먼저 그 상태부터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하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과 생각이 다르듯, 사랑도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열거한 것들은 성경 밖에서 이야기 한다면 어느 하나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온전한 사랑의 모습들에 또 어떤 사랑이 있어야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 그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사도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을 조성하실 때는 그 창조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피조물에게는 당연히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람들에게 보이신 사랑은 죄는 사람이 짓고 벌은 예수님을 받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 목적도 알지 못하고 사는 그 자체가 아버지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벗어난 죄 가운데 사는 것이기에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므로 육신 가진 인생들이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육신을 드리셨기에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라고 하는 자격 조건부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려서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인생을 주신 의미를 알게 하심과 같이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된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심과 같이 자기 육신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종과 같이 섬기는 사랑을 보이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본받는 것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같은 이유로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랑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사람에게 보이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생에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심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신 사랑이고, 그 사랑의 내용은 육신으로 자기 의에 가득한 이들을 종과 같이 섬김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보면 바울사도의 권면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이라는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수인 것은 그 수가 많고 적음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모두들 세상에서의 높은 곳으로 향해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것에 전혀 관심 없으신 하나님의 힘마저 빌리려는 사람들 중에 바울사도가 지칭하는 성도들은 아주 적은 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바울사도의 권면을 자기 삶의 명으로 삼고 살고 규범으로 삼고 살려고 한다면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을 예수님께서 받으셨기에 사랑을 입었다는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신의 인생이 주어진 목적과 의미를 알게 되었는데 그 의미가 다름이 아니라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이더라는 것이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기 때문입니다.


그런 성도, 곧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모두들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야 인생이 성공이라 여기고 그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능력 얻기를 구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사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주장 앞에 자기 육신으로 종과 같이 수고하므로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던 사람들의 눈을 돌리게 하는 사람들의 삶이 곧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란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니 그 삶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 자기 마음에 순종되고 그 순종을 인하여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은 본성이 자기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이니 그 사람은 살아가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는 존재인 것입니다. 성경이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본성만 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음행으로 여기시는 것과 더러운 것과 탐욕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바울사도의 권면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이라는 그 하나하나를 이겨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자기의 본성이 아닌 존재로서의 삶의 모습에 대한 교훈이고 훈계인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은 안에 있는 것을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의 이 권면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심령 안에 생명으로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사람이니 노력할 뿐’이라는 변명으로 관철된 삶은 살 수 있어도 이 권면이 자기 삶이 되는, 사랑 가운데 행하는 삶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근원적으로 이 모든 말씀은 먼저 성도가 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본질적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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