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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어두움의 일’은 행동 자체의 어두움이 아니라 어두운 중에 행하는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둡다는 것은 앞선 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없고 아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과 하나님의 정체성 그리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뜻을 알지 못하는 중에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어두움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빛은 열매를 낸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기에 하나님에 대하여 밝음이 있다면 생명이 열매를 내듯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을 아는 것이 삶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열매가 아니라 신념과 노력으로 이루어내는 것은 빛의 열매가 아니라 어두움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으로 이것을 깨닫는다면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든 일들, 심지어 성경을 보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그 모든 일도 어두움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하는 신앙의 일이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 보이신 것과 같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야 선하고 영광스런 것이라고 여기는 가치관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모든 것이 다 어두움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설명하는 것이 간첩의 비유일 것입니다. 간첩은 그 존재 자체가 어두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 행위가 이웃에게 아무리 선하고 모범적이며 칭송받을 만하여도 나중에 간첩인 것이 드러나면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행여 간첩임을 모르고 베푸는 선행으로서의 장학금을 받았다면 그것조차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뜻과 창조의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알지 못하면서 호기 좋게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성경에 이른 대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간첩이 주는 장학금과 같을 뿐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많이 하면 할수록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일을 보라고 하심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성경을 지키고 사는 것 이전에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존재의 의미와 목적과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과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빛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세계가 그 사람에게 창조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시험해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관찰하고 알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한결 같이 사람 만드신 뜻, 곧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대하고 시험해도 늘 그것만을 말씀하심을 바울사도가 알기에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시험,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하면 어두움에 있어 열매가 없는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들은 늘 인생이 무상하고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평생을 수고하면서 언제까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지 알지 못하고 하는 그것이 바로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열매란 없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빛이 없는 어두움에 속한 것이고, 그 인생의 모든 일이 어두움의 일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것을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니 참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존재하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참예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는 어두움에 있다면 그것은 마땅히 존재의 목적을 알도록 해주어야합니다. 그것은 당연히 그것을 아는 존재가 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빛이 이 땅에 온 것이라고 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존재의 목적이 육신이 되신 분이 이 땅에 오셨으니 그것이 바로 빛인 것입니다.


그리고 빛이 나타나면 어두움은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았다면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곧 인생의 목적이 이 땅에 비춰졌으므로 어두운 것은 모두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이고 책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의 일을 책망하라는 것은 빛의 열매를 내는 것입니다. 빛의 열매를 내면 어두움은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망을 받는 모든 일 곧 어두움의 일들은 빛이 오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곧 인생의 목적과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 생명이 되어 그 생명대로 사는 열매를 보이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이 세상의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빛이 비췸으로 인하여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두움임이 밝혀지고 심판을 받고 책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그 생명으로 살기를 권면한 바울사도의 권면대로 살면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한다면, 즉 이 말씀의 의도는 예수님을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뜻이 자기 생명이 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대로 사는 것이고 말씀을 지키고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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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1-14) 어두움과 빛의 자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5. 11:01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어두움이라고 하면 지하금융과 같이 은밀하게 나쁜 목적을 가지고 일을 도모하는 세계를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어두움이라고 하면 떳떳하지 못한 죄를 범하는 은밀한 생활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어두움은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빛이 있으라고 하시므로 시작한다는 것은 창조 이전에는 빛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인식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떤 것도 볼 수 없고 따라서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학문이나 기술의 세계에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 어둡다고 합니다. 컴맹, 문맹과 같이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세계라도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두움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세계에 대하여 모르면 어둡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절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목적입니다. 육신이 존재하게 된 과정이야 부모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임을 알지만 인간이란 존재로서 자아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모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어둡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인 어두움입니다.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것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시작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밝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이 인식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 하나님 세계의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세계의 창조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리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의미나 목적은 물론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빛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이 인식하기 원하는 것을 인식하고 보고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사도의 권면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빛의 자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이 알기 원하는 하나님의 의와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그리스도를 인하여 알게 된 사람들에게 이 권면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권면을 행위로 지켜내는 것은 후차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먼저 빛의 자녀,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 모든 말씀은 빛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근본적인 간구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어떤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고 하는 모순에 빠져 있지만 그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두움입니다. 율법은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가도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이중적인 생각임에도 알지 못하는 것은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말에 늘 ‘예수만 믿으면 도둑질해도 되느냐?’와 같은 반문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그럴듯한 말이 바로 어두움에 속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것에 대하여 ‘빛의 <열매>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빛의 <열매>입니다.


열매는 생명의 결과물입니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대로 표현된 형상이 열매입니다. 즉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란 하나님의 의를 아는 빛이 있으면 포도나무가 포도송이를 열매로 내듯이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한다면 도둑질과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도둑의 본성이거나 포도나무에서 복숭아가 열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의 이 권면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 곧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에서 나와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이신 인생의 의미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권면입니다. 빛 가운데 있으니 그 빛의 본성을 좇아 빛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열매가 본질이 아니라 빛의 자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성도가 되는 것이 본질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성경을 대할 때에 육신으로 간음하지 않으려고, 또 남의 것을 탐하지 않으려고 각오를 다지고 신념으로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받으면 어두움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게 항상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서 이미 결과를 알 수 있음에도 오늘도 변함없이 그렇게 산다면 그것은 어두움 속에 있는 사망입니다. 이 말씀을 진정으로 깨닫고자 한다면 먼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부터입니다. 그것이 빛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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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1-14) 헛된 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4. 08:00 Writer : 김홍덕

어떤 세계에서 헛된 말이나 궤변은 그 세계의 의와 일치하지 않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수학시간에 ‘정의’라는 것은 definition 인데 justice로 정의를 사용한다면 헛된 말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justice도 정의라는 것은 맞지만 수학이라는 의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헛된 말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해서 설명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기도와 같이 아주 신앙적인 말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라면, 성경은 분명하게 무엇이 기도인지, 어떤 것을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그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주기도문에는 시험되게 해 달라든지 사업이 번창하게 해 달라든지 아니면 육신이 건건하게 해 달라는 것을 기도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사형수라는 폭싹 망한 인생이 되어 육신마저 강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지 않은 것을 기도하는 것이 바로 헛된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합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인데 땅 곧 사람이 가진 뜻이 하늘의 힘을 빌려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라고 하는 것이 그렇고, 무엇을 행하라고 하시는 말씀은 그것을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인데 그것을 행하여 그 존재가 되려 합니다. 그러다 보니 빈도부사 곧 ‘항상’, ‘범사에’, ‘쉬지 말고’와 같은 말씀 앞에서 항상 실패자가 되고 죄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실패 앞에 자신이 그릇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시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 가진 사람은 노력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는데.


이와 같이 바울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헛된 말, 또 사도들이 말씀하고 있는 거짓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한 것과 다르게 하나님을 알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헛된 말이 불순종이고, 불순종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식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곧 그 헛됨에 참예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파트너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을 알지 못하면 세상의 가치로 선하고 순결하며 정직하여도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다는 것이 곧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의미 없는 것을 자신의 짝으로 삼는 것이 간음이고 참예하는 것이고 어두움인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권면은 그것은 성도의 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성도라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것에 있어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과 다르게 보는 헛된 것은 진정한 어두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교회에 다니니 빛 가운데 있는 줄로 알지만 교회에 가서 세상의 성공을 바라고 기원하면서 땅의 뜻이 하늘에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땅에서의 행실이 천국에 상급이 되리라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행위에 관한 말씀을 보는 관점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도와 다르게 헛됩니다. 행위는 본성에 종속된 것이니 본성만 바뀌면 행위는 자연스럽게 바뀌고 또 바뀐 생명의 본성대로 살려고 할 것인데 사람들은 행위로서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사람이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죄를 사하는 자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지 죄를 사하여 하늘에 상급을 쌓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종교적인 행위, 성경을 보고, 성경대로 살려고 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노릇이고, 심하게 말하면 무덤에 회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은 모르고 자신이 세상에 살면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이 헛된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의 의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빛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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