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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15-21) 술 취하지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11. 10:32 Writer : 김홍덕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라는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어떤 이들은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마시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그 괴변 같은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릅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있는 기능을 술에게 넘겨준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떻게 행할 것인지 지혜롭게 행하라는 말씀 중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대로 살지 않아서 세월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말씀에 이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말씀이라고 하심에 이어서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목사들이 설교할 때 술에 취하면 난동을 부리거나 말을 잘못하여 큰 실수를 하거나, 또 음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술에 취하지 말라고 설교할 것입니다.(행위로 의로워진다는 생각 때문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술에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방탕하다는 것은 허무한데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말씀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그 삶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말씀을 하고 있는 중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방탕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주신 인생에서 그 목적대로 살지 않는 것이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고 또한 방탕한 것입니다. 술에 취하면 삶의 주권을 술에게 넘겨주기 때문에 그 상태로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에 술에 취하여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살 세월을 탕진하지 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술에 취하지 않는 대신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과 말씀이 씨와 같이 우리 안에 심겨지면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즉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도록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령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려고 자기 의에 매몰되어 그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 종과 같이 육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것이 성령이 주신 생명이고 그리스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자녀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의외로 감사한 삶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큰 비밀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종이 되는 일인데 그것이 감사가 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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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14절까지 바울사도의 권면은 직접적인 행위규범에 앞서 행위의 주체인 본성과 정체성이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하여 말했다면 15절 이후에는 실질적인 행위규범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그리스도의 빛이 비췬 사람이 되었다면 지혜롭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다양하게 설명되고 정의 내릴 수 있지만 지혜는 무엇보다 자신보다 먼저 산 사람의 경륜을 자신이 몸으로 부딪혀보기 전에 수용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직접 체험하면 다 깨닫게 되지만 그렇지 않고도 먼저 체휼한 이의 삶과 권면에 순종하는 것이 참 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취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 사람이라면, 그 보이심이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이라면 자신이 예수님과 똑같은 행동이나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단 하나의 독창적인 삶의 모습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좇아 행하면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롭게 행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비취신 빛, 그 빛으로 인하여 알게 되고 인식하게 된 인생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잘 살펴서 그것을 좇으라는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순종하므로 자신이 세월을 낭비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월을 아끼라고 하고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하고 계획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혜의 정의와 같이 자신이 세월을 드려서 살지 않고 예수님이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순종하는 것만큼 하나님 아들로 살아야 하는 인생들이 세월을 아끼는 방법은 없습니다. 세월을 하나도 소비하지 않고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보다 세월을 아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으로 살면서도 그 살고 있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단지 살게 된 이상 그 삶의 도구인 육신이 추구하는 바를 좇는 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두움 속에 살다가 예수님께서 오시므로 인생이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에 대하여 밝아졌을 때 예수님께서 보이신 인생의 목적을 순종하는 것 보다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세월을 아끼는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세월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끼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이 아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을 가장 잘 사용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세차하고 광택 내어 세워두는 것이 자동차를 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구입 목적대로 이동할 때마다 잘 타고 다니는 것이 자동차의 세월을 가장 아끼는 것이듯.


그러므로 사람도 그 주어진 세월을 가장 아끼는 것은 자신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세월은 가만히 있어도, 그렇지 않고 무엇을 해도 어차피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흐르는 시간 동안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대로 사는 것이 가장 세월을 아끼고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목적을 보이셨으니 지혜롭게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순종하여 사는 것이 가장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월을 아끼지 않는 것, 곧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면서 까지 사람들에게 보이신 인생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모든 시간들은 세월을 낭비이기도 하지만 세월을 낭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대로 살지 않는 것이니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대로 살지 않는 삶은 그 시간 동안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소용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 아래서는 악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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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 받는 것, 곧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알지 못한 체 살아가는 모든 어두운 일들이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밝히 보이신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남으로 인하여 빛 아래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바울사도가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어두움은 조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모르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이유를 가진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므로 인하여 어두운 것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두운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빛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빛은 물리적 태양이 아닙니다. 이 빛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모든 것이 밝은 사람이 왔다는 것입니다. 컴맹들만 있는 교실에 컴퓨터 선생님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모른 체 육신의 정욕을 좇아 살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 곧 사람을 향한 뜻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므로 인하여 세상은 분명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전하러 오셨는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니 사람들이 그 말씀 속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니 그것이 심판이고 책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으로 책망 받을 어두움의 일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께서 또 이 편지를 수신하는 성도들과 같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거하므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두운 자들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바울사도의 권면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곧 빛에 속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빛 가운데 속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사도는 잠자는 자들이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서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이 권면의 일부이고 궤를 같이하는 말씀입니다. 잠자는 자는 빛이 비취면 일어나고 죽은 자들은 일어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누가 잠자는 자고 누가 죽은 자들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달리다굼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예수님의 기적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었고 죽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고 하시니 소녀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하시니 비웃었습니다. 여기서 정말로 죽은 이들은 소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자는 것과 죽은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유무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의학적,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의 유무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졌는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자는 것과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알고 일어나면 자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었다는 것을 늘 하는 비유와 같이 시계나 컴퓨터와 같은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알려주는 존재 목적을 가진 시계가 시각을 알려 줄 수 없는 것이나, 계산을 해야 하는 컴퓨터가 계산하지 못하면 맛 갔다고 하는 것이 바로 죽은 것입니다. 주인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자신의 존재 의미로 받으면 산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자기 옳다는 사람들 앞에 자신을 종과 죄인으로 내어주고 육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듯 수고하는 것임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질 때 자기 옳다는 것에 매몰된 사람이 십자가를 진 모습의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백부장이 그랬듯.


이와 같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인생이란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성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육신을 육신의 정욕을 좇는 이들에게 내어주는 것이 인생의 본질적 의미라는 것을 깨달으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아나니 그 과정은 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오히려 그 십자가를 힘입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사람은 죽은 자들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성도들에게 잠에서 깨어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는 자들도 죽은 자들 가운데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육신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순종하므로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되고 산 자가 되기에 일어난 자가 되고 그것이 바로 자다가 깨어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오신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인생의 본질적 존재 목적을 인식하게 되는 빛을 만나게 되고, 그 빛을 인하여 그 사람의 세계가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세계가 되는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경험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빛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상에서 지는 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이셨음에도 오히려 그 예수님을 힘입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에도 일어나지 못하는(자다가 깨지 못하는) 죽은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된 자들은 빛 가운데 있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은 깨어서 일어난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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