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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에서 시작해서 교회에 관한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뜻이 하나님의 예정하심이고, 그 예정하신 뜻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되면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교회와 다릅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알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는 교회를 먼저 세우고, 그 교회가 경영하고 추구하는 바와 자기 육신의 정욕이 일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가 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잘 살게 해 주시는 복과 은혜를 주신다고 하니 모여서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경외한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서로를 알기에 서로를 경외하고 서로가 가진 그리스도의 영이 주시는 본성에 복종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고 오히려 자기의 의로움으로 가득한 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잣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복종하심과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이 어리거나 아직 없는 이들에게도 종과 같이 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가져오면, 그리스도의 영이 더 충만한 사람 앞에 서면 신은 아내와 같은 자가 됨을 스스로 알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복종하게 되고, 반대로 그리스도의 영이 없거나 자신보다 어린 사람 앞에 서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자신을 내어주며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이어지는 부모와 자녀, 상전과 종의 관계로 설명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교회의 의며 정신이고 이념이고 철학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람들이 모이면 그 공동체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리스도가 지시하신 듯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물과 말씀으로 깨끗하게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물은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기에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처녀성에 관한 것입니다. 목적을 위하여 사용된 적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결혼 전에 다른 사람과 사귀었다고 해도 결혼해서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삶이라는 것 앞에서 서로에게는 깨끗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가 돈을 주고 사는 모든 물건들도 다 새로운 목적을 위하여 깨끗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자동차의 쇳덩이들을 만들 때 예외 없이 다 고철을 함께 녹여서 사용하지만 새로운 사용 목적 앞에서 깨끗하고 새것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심지어 이런 개념은 걸레에도 적용하면서 삽니다. 우리는 때로 깨끗한 걸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무엇을 닦기 위한 걸레의 목적으로 볼 때 깨끗한 걸레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을 자기 삶으로 순종하면 그 삶은 하나님께서 정한 목적 앞에 깨끗한 삶이 되고, 깨끗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고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끗함,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과 구분이 되는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거룩함을 입은 존재가 모여서 서로를 경외함으로 복종하고, 서를 위하여 몸을 내어 주는(육신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종과 같이 섬기는) 사랑으로 서로를 대하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알기에, 목사기에, 40일 금식했기에 대접 받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더 거룩할수록 더 종이 되는 그런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가 머리인 교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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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한 책들은 콩트를 묶어 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후에 말씀하고 있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많은 상황에서 인용되고 있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은 적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상황이 바울사도의 권면이 의도하는 바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여자인 아내가 남편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시대적으로 볼 때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었으니 그렇게 보면 안 된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에 관한 이야기로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의와 형식의 문제에 관한 권면입니다. 머리는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머리고 3권을 상징하는 사람과 조직이 형식인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알면 정부든, 사법부든, 국회든 모두 민주주의에 복종해야 함과 같이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모든 사람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늘 하나님 앞에서 그릇과 같습니다. 이것은 의를 담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남녀 관계로 가져오면 유전적으로 여자가 남자의 유전자를 받아서 몸속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것으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더 본질이냐 하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본질이고, 육신으로 남자와 여자는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사도가 권면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의 문제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에 이어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자 하나님의 의에 육신의 삶이 복종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주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내들에게 당부하기를 <자기> 남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라는 호칭은 굳이 누구의 남편, 아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 말입니다. 남편은 유일하게 남편이고, 아내는 유일하게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자기 남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여자요 아내가 되는 것에 대하여 사람이란 자기에게 정해진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니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람의 존재 목적도 다 하나님께서 정하셨으니 그것을 피조물인 사람이 다르게 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룬다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사람의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남편과 아내의 실질적인 관계는 이 말씀과 무관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의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관한 말씀이라고 설명을 하면 실질적인 관계는 무관하다는 의미냐며 반문하는 사람들이 늘 있는데,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늘 설명한 바와 같이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남편과 아내라는 실질적 결혼 생활의 파탄에 무관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데 그게 늘 신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본질적인 의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여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그리스도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에게 복종함은 물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지 못한 유대인들에게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본성을 경외함으로 복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모일 때 교회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고, 교회가 그의 몸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자와 같은 인생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고 그것을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비교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아내는 남편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복종하는 삶을 살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남편은 아내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까지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는 사랑을 하게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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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14-21) 감사와 복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14. 06:44 Writer : 김홍덕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다짐하고 신념을 가진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념이나 다짐으로는 노력한 흔적을 엿보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항상 그렇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게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 ‘항상 그렇다.’고 누구나 인정하려면 존재가 그러해야 합니다. 여자는 항상 여자지만 여자다움은 ‘항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여자도 때로는 남자다울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여자답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항상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감사함이라는 것이 체휼되면 말 그대로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휼된 이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노력하십시오.’와 같은 말은 합당치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 평안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가치관에 입각해서 잘 된 일로 인하여, 아니면 위기를 벗어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삶이 주어진 것이 감사한 사람들의 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 감사함에 이어서 피차 복종하라는 것을 함께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서로에게 복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범사에 감사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너무 공경할 것이며, 그 공경할만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삶을 경외함이 서로를 피차 복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복종은 순종과는 달라서 자신의 의지가 굴복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영어의 obey도 복종으로 번역된 경우가 많지만 이곳에서는 submit을 사용하고 있습니다.(NIV, KJV 공통) 문제는 복종이라는 것이 감사함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굴복당한 상황이 감사한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비단 이 뿐 아니라 생각해보면 성경에서 순종과 복종은 혼용되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말씀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법을 알면 이것은 혼용되어도 전혀 무방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명은 본성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순종합니다. 본성이 이끄는 것에는 억지나 강제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본성 앞에 본성과 다른 의지는 없기 때문에 본성에 복종한다고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즉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은 억지가 아니기에 순종이고 또 그 본성과의 관계로 보면 의지가 주장되지 않는 복종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의 권면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의 본성이 범사에 감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감사가 그리스도의 본성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이는 사는 모든 순간 감사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하여 범사에, 항상 감사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면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에 그것에 대하여 경외함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자신을 보는 경험을 한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게 자신이 제출되어(submit, 복종)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사는 것 아니요’와 같은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위를 향하던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에게 자신이 복종되었고, 또 자기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대로 사는 것에 억지가 없는 순종하는 삶이 된 것도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그 생명을 가진 이들에게 서로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종을 하는데 그것이 감사함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자신이 드려진(submit)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서로에게 복종해야겠다는 다짐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념이나 노력으로 범접할 수도 알 수도 없는 또 다른 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이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들끼리의 세계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도 없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며,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을 가진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치관이라는 어두운 사람들의 가치 앞에도 순종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피차 복종하려면 말 그대로 서로가 같은 생명을 가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 이상의 일입니다. 즉 여기서 교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에베소서 초반에 많이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서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삶의 의미와 내용이 되는 것에 자신을 드려 복종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생명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의 범사에 속하는 결혼생활과 부모자신 그리고 사회에서의 상관과 부하의 일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감사하는 삶을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각개의 일이나 사건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과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인간사의 일들이 감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인다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삶이 어떻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사도의 권면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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