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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0-20) 전신갑주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29. 08:46 Writer : 김홍덕

무엇이 육에 관한 씨름인가?


바울사도는 에베소에 있는 신실한 성도, 곧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 삶의 본질이 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하여 권면합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하는 권면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해 온 권면들의 연장선상에서 또한 그 최종적인 결론이자 요약으로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전신갑주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 하고자 한 말의 최조종적인 뜻은 주 안에서 강건해지고 또 그리스도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서신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 강함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이 강함의 기준은 육체의 능력이나 세상의 일반적인 기준의 강함, 곧 권력이나 능력의 강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즉 예수를 믿어서 세상 사람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질 중의 본질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는 종과 상전에 관한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한 것에서도 언급하였고, 무엇보다 12절(6장)에서 이 씨름은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씨름,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성도로서 살아가는 삶에 있는 씨름은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씨름이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마귀와의 싸움, 세상의 정세와 권세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읽고 들어서 다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이 마귀와 싸워서 이기고자 하는 내용은 모두 육에 관한 것입니다. 육체에서 나오는 각종 욕망을 이기는 것에서 시작해서 육신의 병도 병마라고 하면서 싸우려 합니다. 육신의 병이 병마라면 세상의 모든 인생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결국 병마에게 다 져서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마귀에게 이긴 승리가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결국 싸워 이겨서 얻는 것이 그 싸움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싸워서 이김으로 얻는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세상의 상전들에게 종이 되는 것이라면 바울사도의 권면과 같이 육에 관한 씨름이 아닌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얻는 것이라면 그 씨름이나 싸움은 육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육신이 ㅍ평안하고, 세상에서 도모하는 일에 대한 모든 저항을 마귀의 도전으로 봅니다. 자신이 만든 세상이 아닌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보고 그런 상황을 조성하는 것은 마귀고, 세상이 맘대로 하지 못하는 육신은 부정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이겨내기 위하여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육에 관한 싸움입니다. 이겨서 얻는 것이 결국 육신의 평안이고 또 세상에서 가치를 부여한 것, 세상의 가치로 상전이 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교묘하게 감추고자 세상에서 이긴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회칠까지 해 두었습니다. 오히려 이것을 구분하고 아는 것이 마귀와의 싸움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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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5-9) 상전들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28. 09:53 Writer : 김홍덕

상전이라는 것이 의에 있어 더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의로운 의를 가진 자가 상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이라는 것은 자신이 더 옳다는 사람 앞에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아들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의에 있어서 유대인들이 더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자기 육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세상의 가치는 거기까지입니다. 세상은 더 의로운 자가 상전이 되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것이 정의입니다. 공부를 더 잘한 사람이 공부로서 상전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오르는 것이 정의인 것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이는 상전이나 종이나 모두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간혹 이런 의를 뒤집고 단지 같은 사람이니까 세상의 모든 의에 있어서 동일한 것을 누려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그런 세상의 가치관과 전혀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과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일신이십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어 그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세상관 안에서 의로워지고 상전이 되는 것을 신앙의 세계로 착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행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세상에서 이긴 자, 곧 상전이 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르는데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 모르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을 예수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의 가치관으로 의로워지고 상전이 되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더 이상 의로울 수 없는 분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하나님 아들을 정의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 상전이 된 자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는 상전이 종이 된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바라시고 기대하시고 창조하실 때 가지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가치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는 더 의로운 자가 상전이 되고 의롭지 않은 자가 종이 되는 세계인제, 하나님의 의는 더 의로운 자, 진정한 상전이 종이 되고, 의롭지 않은 자를 상전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정의롭지 않다고 하지는 않아도 어리석은 일이라 여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조롱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의롭다고 여기는 피라미드 위로 올라감에 있어 하나님의 힘을 빌리는 것을 조롱하거나,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반칙하는 것을 조롱하는 것을 성경이 조롱한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세상 가치관에서 반칙이기 때문에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일 뿐입니다.


더 의로운 자(힘센 자와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님)가 상전이 되어 의롭지 않은 자를 주관하는 것이 세상의 기본 가치고 의로움이며 정의인데, 하나님의 의는 그것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의로운 자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종이 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더 의로운 의 곧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상전들의 모습입니다. 상전들에게 주께 하듯이 하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께 하려면 주의 정체성에 맞고 주께서 옳게 여기시는대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의로운 자가 종이 되는 것을 보이셨으니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진정한 상전은 예수님과 같이 그 의에 대하여 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렇지 않은 것을 공갈이라고 합니다. 있지도 않는 것으로 속이고 협박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상전인 자는 종이 되고 자기 육신을 내어주어 십자가를 짊으로 그 의가 나타나는 하나님의 법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알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이 더 많이 앎으로 상전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갈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교역자라는 사람들, 교회의 장로라는 사람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가졌다는 사람들, 금식이나 큰 헌금과 같은 공로를 가진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빙자하여 공갈치는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 의에 관하여 진정한 상전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더 온전하기에 온전치 못한 이들을 섬기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의의 본성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상전인 자는 그 본성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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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5-9) 누가 상전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26. 21:01 Writer : 김홍덕

‘종들아…’

바울사도는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는 것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섬기는 것을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육체의 상전도 사람일 텐데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라면서 다시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사람들 세계에서 누가 상전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올림픽에서 100미터 달리기의 시상을 할 때 금메달 수상자가 가장 높은 곳에 섭니다. 즉 100미터 달리기의 의의 기준인 빠르기에서 그 사람이 가장 빠르다는 것입니다. 즉 빠른 것을 의로운 것으로 삼는 세계에서 가장 상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곳에 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전은 어떤 세계의 의가 추구하는 것에서 더 의로운 이가 상전입니다. 회사에서 사원보다 간부가 상전인 것은 회사가 추구하는 이익추구에 더 값어치가 있기 때문에 상전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상전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상전은 세상 가치에서 더 의로운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육체의 상전이라는 것은 육체의 정욕, 육신이 바라는 것에 관하여 더 의롭다는 자들에게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또한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할 때의 ‘사람’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바울사도가 다른 성경에서 세상의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에서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에서 더 의로운 자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이나 육신의 가치에서 이겼기에 더 의로운 자에게 왜 순종해야 하는가?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의는 세상의 의나 육신의 정욕과는 전혀 반대인데 왜 그것에 대하여 순종하여야 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그리스도께 하듯’, ‘주께 하듯’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 하듯 한다는 것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그리스도께 또 주께 합당한 것을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을 그리스도께 행하는 것은 조롱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향하여 그리스도라면 내려와 보라고 한 것이 조롱인 것은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이긴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가진 그리스도의 개념으로 예수님께 요구하고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조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합당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렇게 행하기를 바라신 것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육신으로, 또 세상의 가치로 이긴 자들인 상전들에게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존재가 하나님의 아들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상전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의 가치 기준에 의한 판단이고 법이었지만 그것은 바로 육체로서 상전이 되는 것이었고, 세상의 가치로 권세를 가진 자의 가치로 볼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그 의로움, 그 이김과 상전됨에 예수님께서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온통 자기 의에 충천한 사람들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십자가를 지는 순종,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는 본성이 없으면 정말로 환장하거나 미칠 것입니다. 간혹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타락했다면서 사회운동으로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 중에 일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의 가치로 자기가 옳다는 사람들 앞에 순종하는 본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본성이 없다는 것은 본성 중의 일부가 없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십자가로 나타났는데 그 십자가를 지심이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세상의 가치에 육신을 내어줌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은 자기 옳다는 주장 앞에서 종이 되는 것이 그 근본 DNA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없어서 신앙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이 권면을 시작할 때에 ‘종들아’라고 시작하는 것은 그 당시 신분으로 종들에게 한정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권면이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은 누누이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졌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육체의 상전, 곧 세상의 기준 앞에 종인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들아’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에 세상의 가치 앞에서 종과 같이 섬기는 사람들아!’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행위 자체가 섬김의 본성을 가졌기에 눈가림을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아니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게 된다는 것은 속에서부터 밖으로 나타나는, 즉 본성을 인하여 그렇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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