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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0-20) 의의 흉배 붙이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9. 4. 07:51 Writer : 김홍덕

진리가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자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에게 그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는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과 같이 존재 목적을 회복해야 하는 과제가 자신을 구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리 곧 코어라고 말하는 중심이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로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이제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알았으니 모든 것이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씨름에 나가는 사람이 허리를 동이는 것은 이제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고 다음으로는 의의 흉배를 붙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의 흉배(breastplate)는 가슴에 붙이는 갑옷을 말하는데 많은 경우 또한 자신이 어떤 소속인지를 나타내는 표식을 하는 곳입니다. 조선시대에 가슴의 흉배가 관직의 등급을 나타내기도 했고, 병사들은 자신의 병과를 표시하기도 했듯. 그 흉배가 의의 흉배라는 것은 자신은 ‘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소속이고 또한 자신의 갑옷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로 자유로워진 다음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 곧 스스로의 선택이 하나님의 의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는데 그 선택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보이신 인생의 정체성을 선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이고, 그 순종이 진리 안에 거하게 하고, 그 진리에 속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의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여서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에 부합되므로 진리에 속한 사람이 곧 하나님의 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씨름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씨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씨름에 임함에 있어 의의 흉배, 곧 하나님의 의에 자신이 속했다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하나님의 의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귀의 유혹이다, 세상의 주관자들과 싸우는 것이다.’라고 하면 하나님의 의에 대항하는 것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는 생각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것, 평안과 성공을 추구하는 것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 하나님을 위한 일을 도모함에 있어 방해가 되고, 저항을 일으키는 것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단지 세상의 가치에 종속된 것을 추구하면서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하나님도 동일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생각이 정사와 권세와 세상의 주관자들이 가진 가치관이자 그들 자신인 것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정작 전신갑주를 입고서 싸워야 하는 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육신이 바라는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고 바라면서 그것에 반하는 육신의 본능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방해와 같은 것과 싸우기 위해서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놀랍게도 정작 그것은 싸움의 목적이나 승리의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적이고 싸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구분을 위해서 자신의 흉배 곧 가슴에 자신의 정체성은 세상의 권세를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나타내는 것은 결과고 그 자신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의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힘입고서 자기 육신의 정욕이 추구하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권세가 가치를 부여한 성공을 이루어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겠다는 생각과 자신이 구분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의의 흉배를 붙인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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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갑주는 악한 것을 이기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악은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의 영들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것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정욕으로 구하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을 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설명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하나님의 의도와 상반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맞서기 위하여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로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허리띠는 힘의 상징입니다. 진리는 악에게 맞서고 이기는 것에 있어 코어(core)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모든 힘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진리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전신갑주의 시작인 진리의 허리띠를 띠었다고 한다면 정말로 자유로운가를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막연히 “진리로 띠를 띠십시오!” 외치기만 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진리로 해석되기를 바라면서 마구 외칠 말씀이 아닙니다.


핵심적으로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우리 인생을 자유롭게 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자유는 육신이 종으로 구속된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추구하는 자는 돈 앞에 자유롭지 않고,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권력 앞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지날 때 불기둥이나 구름기둥이 일어나면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랬고, 광야의 기후나 환경이 또한 그랬습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운동선수에게 호각소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신호였습니다. 신호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해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 아래는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성경말씀이라는 신호, 목사의 의견이라는 신호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이것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라는 질문은 참 경건한 것 같지만 그것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천지를 창조하실 때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게 바라고 뜻하시는 궁극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것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고 말씀을 준행하는 것과 같은 수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 그 안에 속한 것입니다. 나무의 유전자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율법과 규례는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게 분명하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밝히셨음에도 사람들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겠다고 하고, 어떤 행동을 앞두고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은 먼저 밝히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호를 기다립니다. 자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진리의 허리띠를 띨 방법이 없습니다.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진리라고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좇아 살아갑니다. 자기 밖에서 어떤 신호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없어지고 밟는 모든 곳이 그들의 땅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신호가 없는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우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식과 규례의 신호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진리가 있으면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자기 밖에 있는 어떤 신호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본성대로 살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시간, 어떤 조건에서 의문을 가져오는 착각이나 망상이나 최면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살면서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서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서 진리의 띠를 띤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이 서 있는 장성한 생명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밖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리스도라는 인생의 존재 목적의 참 진리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 그리고 그 생명이 장성하여 서서 그 생명의 본성을 좇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진리의 허리띠를 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진리인 것은 존재의 목적과 존재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악을 대적할 수 있는 중심이 잡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라는 사람의 존재 목적과 자신이 일치가 된 진리가 자기  중심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신갑주의 시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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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0-20) 전신갑주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30. 10:03 Writer : 김홍덕

누구와의 어떤 싸움인가?


전신갑주에 관한 말씀은 유명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잘 아는 정도라면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관심이 좀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에도 나옵니다.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떤 싸움에 임하는 준비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싸움이 어떤 싸움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먼저일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싸움은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wrestle나 struggle와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fight와는 달리 자기 몸으로 겨루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말 번역도 씨름이라고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이것은 우리의 육신, 육신의 삶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싸움의 형식은 몸으로 싸우고 다투는 것인데 정작 바울사도는 이 싸움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이 육신의 삶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 이 육신의 삶이 어떤 목적에 귀속되고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삶이 세상의 주관자들이 추구하는 것을 좇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한 삶을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신갑주의 배경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주제 중의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우리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이 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기계처럼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대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인생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자유라는 것의 뿌리인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가 주어진 이유입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선악과는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셨습니다. 이 육신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육신을 스스로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창조주와 같이 되려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것을 창조하지 않은 자가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육신을 가지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자기 안에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소한 일 하나에도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기준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다툽니다. 내가 더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옳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수가 공감하는 기준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하나의 사건으로 엮은 것이 바로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여 우리에게 주신 육신 가진 삶을 스스로 창조도 선택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도적질한 자기 존재 정체성을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삶의 동력을 만들고 그것을 모아 세상의 가치관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보면 죽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정면으로 충돌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위하여 만든 사람이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로 볼 때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자기가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니 대단한 것 같다고 여깁니다. 먹음직하단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바로 육신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스스로가 가진 의의 기준을 좇으려 하니 사람이 너무 부족하고 연약하며 심지어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악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연단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 경건해지려고 합니다. 육신을 단련하여 의로워지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인 흙에 짚을 넣고 불로 연단하여 벽돌을 만들어 하늘에 이르려 한 바벨탑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인생을 자기 것으로 삼아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어이없게도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하늘의 뜻을 운운하면서. 또 각 종 신을 만들어서. 그것이 바로 우상을 조각한 것입니다. 성경대로 살면(행동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도 우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타락의 과정에서 사람들은 공통의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서로가 가진 선의 기준을 비교하고 공통된 것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아서 그것을 고도화하는 것입니다. 피라미드를 설계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것에서부터 재산이나 권력의 많음까지 그렇게 세상적인 가치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는 사람들이 가진 선함의 기준을 모아 형성했기 때문에 그것이 공 사회의 정의, 곧 사람들의 의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의 하나가 바로 육신에 관한 관점입니다. 육신의 삶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과, 그 육신이 사람들이 가진 선의 기준으로 정립한 세상적인 가치를 이루는 것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단련하고 절제한 결과를 의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정의를 이룬 사람이 바로 세상에서 이긴 자가 상전이 되고 권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이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육신이 모든 율법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 의로워지려는 사람의 생각은 자기 선악의 기준(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얻은)으로 볼 때 육신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의로워지려면 육신으로 율법(돌)을 지켜야(먹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능력이 강할수록 의롭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하 만물의 영광을 얻을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깁니다. 그렇게 유혹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바울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우리의 씨름인 것입니다. 즉 육신에 대한 관점,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이 어떤 의를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고 살 것인가에 대한 씨름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의 삶을 하나님의 의를 담는 것에 순종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앞서 길게 설명한 세상의 가치를 좇는 것에 순종하며 살 것인지에 대한 갈등을 육신으로 이겨내는 씨름이 바로 이 싸움, 이 씨름의 정의이고 싸움의 대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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