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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0-20) 구원의 투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9. 6. 09:08 Writer : 김홍덕

투구는 전투 중에 머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투구가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이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인생의 목적도 모르고 살다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창조되었음에 순종하게 된 것이 바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구원이 바로 우리의 머리, 곧 정신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원이 앞서 열거한 진리와 의와 평안이 있어야 갖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거듭날 때 이미 온전한 생명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났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으로 날 때 생명으로서의 온전함을 가지고 태어나지 태어나서 돈 벌어 살림을 하나씩 갖추듯 팔을 붙이고 다리를 갖추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도 생명으로 날 때 이미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평안과 믿음과 구원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로 나는 것입니다. 특히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투구라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 생명의 정신이자 의식이자 정체성으로서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지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많이 고치셨는데 귀신이 들렸다는 것은 다른 말로 정신이 빼앗겼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목적을 상실한 체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 사는지를 모르는 모든 사람은 다 귀신 들린 자이자 정신이 뺏긴 자며, 구원이라는 투구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더하여 이 전신갑주에 관한 말씀이나 성령의 9가지 열매와 같은 말씀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하나씩 또는 단계적으로 이루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며 믿는 사람들 역시 구원이 없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인데 생명이 나서 다른 것을 하나씩 갖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정의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가치를 좇아서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세계, 곧 정사와 권세이자 하나님께서 악한 것으로 여기시는 그 가치에 정신을 빼앗겨서 귀신 들린 자가 되지 않으려면 구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늘 세상의 가치를 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QT하고 신념을 가지고 정신 차리고 살려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되려면 구원, 곧 새로운 생명으로 나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을 대할 때 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인지 판단하고 사안 별로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은 마주하게 되는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본능을 좋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악한 것, 세상의 가치를 좇고 추구하는 것, 육신의 정욕을 좇는 것과 같은 것에서 자신의 정신을 방어하는 것은 그것을 사안별로 대응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받은 생명, 곧 거듭난 생명이 되기만 하면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머리, 곧 정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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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0-20) 믿음의 방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9. 5. 07:00 Writer : 김홍덕

믿음은 수동적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능동적으로 대하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순교하러 가겠다는 것과 같은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와 같습니다. 방향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을 가진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제사보다는 순종이 나은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뜻을 사람이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더 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의 시작에서도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땅은 곧 흙으로 지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이 믿음을 모든 것 위에 더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도 하나님의 의도 또 평안도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세계에서의 어떤 것도 사람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로봇이나 아바타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광이 없습니다. 기계가 만든 이의 뜻대로 아무리 놀라운 기능을 가졌다고 해도 기계가 만든 이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순종도 아닙니다. 따라서 기계는 사람을 믿는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하셨는데 이는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주신 육신 가진 삶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살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동적인 순종의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도 의로움도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가지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일치된 정체성의 안정성인 평안 그 어느 것도 온전하게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모든 것 위에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방패가 되는 것은 이 싸움이 세상의 권세와 하늘의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 악함이 화전 곧 그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로 도전해 올 때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이 그것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자의 화전은 다름이 아니라 인생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능동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선악과를 먹게 하는 공격인 것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하나님 앞에서의 악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믿음의 방패는 상대의 공격을 방패가 소화해 내어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상대의 공격이 방패나 전신갑주 어디에도 미치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인함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순종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것이 되어 있으니 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의가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하심 외에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믿음은 사람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는 구분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로 구분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과 세상 주관자들과 세계를 다르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의가 다르고 가치가 다르니 세계가 다른 것입니다. 100% 원자력으로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면 원유가 아무리 올라도 의미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방패는 PC게임의 아이템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서 좋은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갖추는 것이 아니라 악한 공격과 구분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진리 앞에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그 어떤 것도 함께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충만한데 악한 자의 공격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공격이 무력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조차 없게 하는 온전하고도 온전한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내용이 되고 육신 가진 삶은 형식이 되는 온전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되면 세상의 가치 위에 있는 권세나 하나님께 능동적인 모습으로 다가가는 악함은 말 그대로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구분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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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명한 전신갑주는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별개의 것이 아니듯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생명 세계의 일입니다. 한 생명이 보이는 여러 가지 모습과 행동이 독립된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본성에 귀속된 것이듯 성령의 9가지 열매도 말 그대로 열매입니다. 성령이라는 생명이 맺는 열매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전신갑주 역시 단계적으로 갖추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의 시그니쳐와 같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다 갖추어진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전신갑주를 시작할 때에 ‘서서(stand)’라고 하였습니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거나 생명 혹은 의식이 없으면 설 수 없는 것입니다. 섰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의에 속한 사람, 하나님 기준으로 볼 때 생명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보여주는 각양의 성향을 차례로 보여주는 것이 이 전신갑주인 것입니다. 아니 알고 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습니다.


진리와 의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평안함을 가지고 있다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온전한 생명이 되면,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그 생명을 발산하고, 또 같은 생명을 찾고 또 그 생명이 계속 세대를 이어가도록 헌신합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우리가 흔히 전도라고 하는 것은 바로 생명이 가진 종족보존의 본능에 비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의가 온전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와 의를 전하는 것이 예비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긴 여정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안의 신을 신으라고 한 것에서 이것이 긴 여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도 신은 편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고급스러움이 우선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신발만큼은 편함이 우선입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여정은 평안 없이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평안은 세상에서 말하는 평안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안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또한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평안은 육신의 평안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존재 정체성의 안정성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들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이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안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평안은 어느 날 존재하고 있음은 알게 되었지만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가진 불안을 떨칠 수 없는 것입니다. 존재하게 된 이유를 모르니 이 존재가 끝나는 사후의 세계가 그렇게 불안한 것입니다.


이 평안이 복음을 전하는 거서에 절대적인 것은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 불분명한데 다른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울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많은 설교자들이 인생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인생을 어떻게 평안하게 살 것인지를 설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목적을 아는 생명을 가졌다면 당연히 생명의 본능을 좇아 그것을 전하겠지만 생명이 없으니 그것을 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잘하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신갑주의 시작에서 이것이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평안이라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고 시작할 때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의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 진리가 우리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의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정성이 없으면 자유도 평안도 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히려 육신을 곤고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어딜 봐서 평안했습니까? 바울사도는? 베드로는?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믿으면서 예수님을 믿어서 육신이 평안해지겠다고 기도하고 교회가 시키는 대로 행하려 노력하는 것은 도무지 어떤 사고방식에서 나오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은 한 마디로 사망과 어두움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육신을 끊임없이 소비하고 소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으로 몸소 오셨고, 바울사도도 자동차도 없는 시절 온 유라시아를 몸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사도도 ‘내게 복음이 있으니 듣고 싶으면 네가 와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복음을 가진 자가 종과 같이 수고하고 육신을 소비하는 세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린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 육신의 수고로움의 삶에 자기 정체성의 안정성이 주는 평안이 없으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수고하여 복음을 전하러 갔는데 멸시를 받는다면 누구라도 스스로 앉아서 ‘내가 뭐한다고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고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욥이 바로 그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으로 끊임없이 수고하고,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종이 되는 세상이 볼 때 조롱거리 같은 삶을 사는데 그 삶에 대한 정체성이 평안을 줄 수 없다면 가능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데 아버지의 일에 목숨을 걸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평안의 신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의와 뜻을 분명하게 아는 것에 귀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의 삶이 된 하나님께서 생명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신을 수 있는 신입니다. 이것은 그런 생명이 되라는 말씀이지 어디 가서 그 신을 찾아 신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평안이 없다면 당연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비 되지도 않은 것입니다. 생명을 번성케하려면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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