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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갑주는 아주 유명한 성경말씀입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각각을 하나의 요소로 구분해서 봅니다. 그러나 이 전신갑주는 옵션처럼 추가로 신앙에 장착하는 것이나 단계적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 그 자체가 권세와 악한 영들에게 이기고도 남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상 변함없이 이기는 존재가 되려면 세계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파이를 다투는 사람들에게 있어 어떤 신을 믿느냐와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추구하는 바가 같기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바가 같고, 그 추구하는 바를 얻기 위하여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신들도 결국은 같은 속성을 가진 종족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동일하다면 부처가 되었든 산신령이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결국은 다 같은 종족에 속한 신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전신갑주라는 것의 시작에서 이것은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싸움의 목적이 육신의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에 병이 들면 병마라고 하는 식의 접근으로 이 말씀을 온전히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것이 전신갑주를 입고서 맞서야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이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이 육신이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과 연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신앙과 잡신과 무엇보다 세상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도 탐하는 파이인 것입니다. 따라서 육신의 병을 병마로 보는 것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생각이 오히려 전신갑주를 입고 맞서야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평안이라는 것은 세상의 모든 잡신들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나 바알이나 산신령이나 모두 자신을 믿는 이들의 육신의 건강과 사업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베푸는 신이라 믿고 바라듯이 하나님께 같은 것을 기도하고 바라면 하나님은 거룩하지도 않고 유일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신은 널리고 널린 것입니다. 우리가 다투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중 권세를 잡은 자들의 악한 생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형태를 보면 물 컵만 엎어져도 혹시 하나님께 뭔가 잘못한 것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물이 쏟아지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인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호를 보내신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행위적 신앙으로 매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당연히 성경을 행동으로 지키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회칠을 합니다. 세상이 귀하게 여기니 하나님도 귀하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온 생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도 모를 순환 속에 갇혀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어느 순간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한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생각,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얻으려고 하나님께 무슨 행동을 드릴지 알려고 하고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고 맞서야 하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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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말씀대로 살기 바랍니다. 말씀을 가진 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택의 순간에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나, 성경말씀을 유념하므로 육신의 욕망을 잘 절제하게 되고 모범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하고 많이 보므로 필요한 순간 성경의 말씀이 자신을 충분히 통제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것은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어떤 이들은 훈련이라 생각합니다. 반면에 성경은 그 과정을 성육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쌓여서 아는 것이 행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므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봐야 합니다. 예수님과 말씀의 관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책이 예수님으로 변신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셨는데 그 육신의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육신은 형식이고 그 내용이자 본질이며 본성은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이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선택의 순간 어느 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근원적인 뜻입니다. 선택의 순간에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은 아주 작은 잔가지이고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이란 존재에게 뜻하신 하나님의 뜻은 나무의 유전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신 뜻,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표현하는 것이 육신이라는 형식 안에 내용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진다는 것은 본성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에서 말씀하신 대로 빼앗기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영성이 약해지고, 성령의 능력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종과 아들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종은 자기 행할 일을 하지 않으면 쫓겨나고 밥도 못 먹게 되지만 아들은 어떻게 해도 아들이라는 그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을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삶의 본성이요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목적으로 삼으려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령의 잉태하심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 뜻이 사람 안에 순종되었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본성과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능력이고 본분인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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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0-20) 성령의 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9. 7. 13:11 Writer : 김홍덕

바울사도는 전신갑주의 마지막 요소로서 성령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함께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진다는 것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진다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것이 된다는 막연한 개념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것이 된다는 것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가진다(take)는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갖추라고 하거나 가지라고 하거나 특히 행하라고 하면 주머니에 넣듯, 아니면 등기나 자신만 누릴 수 있게 소유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행동이 그렇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행함은 생명이나 자신이 가진 의가 표현된 결과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본성이나 의나 생각이 있어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앞서 구원을 가진다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을 세례증이나 세례명과 같은 증서나 등기된 서류나 배타적 소유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 받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성령도 같습니다. 기도하면 중환자가 치유되는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방언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된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도 늘 그 능력이 없어질까 걱정합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기도하고 성경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령을 가졌는데 언제든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왔다갔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신갑주 역시 한 번 입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것은 옷이 아니라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특히 검으로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하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간혹 성령의 검이라고 하니 사람들에게 ‘불신 지옥’이라고 자극하듯 하는 것을 검이라고 표현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의 권면을 한답시고 신앙이 없다느니 그러면 안 된다느니 훈계하듯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과 같이 우리를 찌른다는 말씀에 힙 입어서.


그러나 사람을 가장 크고 아프게 찌르는 것은 스스로 아픔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찔림을 받고 뉘우치게 하려면 그 사람 안에 무엇인가가 들어가야 합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바로 상대가 나를 보고 스스로 찔림이 되도록 살아내는 것을 위함입니다. 그것이 가장 날카로운 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 안에 들어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인하여 잉태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고 또한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라고 하심이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육신을 드려서 하나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보이시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자신들이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그릇되게 생각하고 있음을 시인하므로 각 사람 마음 안에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이미지(성품)가 심겨지고 그것을 다시 성령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능력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성령의 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께서 각 사람 마음에 하나님 아들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스스로 도려낼 수 있게 하는 정말로 날선 검이 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검이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검을 가지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자기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삶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릴까 염려할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곧 성령의 검이자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지는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그 삶을 말씀하시는 것임이란 것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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