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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25-32) 성령의 근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7. 23. 23:1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근심을 하는 것인지, 성령이 하는 근심은 어떤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서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성경대로 살아서 자기 육신의 바라는 바를 이루려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성령의 근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존재에게 근심이 있다면 그 근심은 그 존재가 누구냐의 문제와 직결된 것입니다. 야구 선수는 축구로 인하여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야구 선수가 하는 근심이 있다면 그것은 필시 야구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심은 근심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그 내용이 종속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서 성령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성령에 대하여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고, 그 중에 성령이 하나의 위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라고 하면 육신으로서는 하지 못하는 신비한 능력을 보이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병든 사람을 낫게 하는 기도를 할 때 성령의 능력을 소환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든 것은 글이나 말로 사람들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예수님의 보이신 것이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시고, 그 생명을 인하여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특히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성령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삼위일체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해는 논리적 이해가 아닙니다. 자기 안에 그 본성이 있어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은 안다는 것은 그런 성령을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기 안에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 할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순종적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이 있기에 성령께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생명으로 잉태케 했기에 성령을 만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것이 아니면 생명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정체성도 모르며 성령도 모르고 삼위일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의를 가진 존재입니다. 성부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 의를 나타내실 때 성부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면 성자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게 하시는 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하나님이고 삼위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이런 분이라는 것을 알면,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사람이 왜,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는지를 알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성령의 근심은 그것에 귀속된 것이라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근심하실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사는 것에 충만하지 못하는 것, 그 하나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게 하여 인생으로 살 동안 평안하고 복을 받고 사업 잘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육신의 정욕을 이루려는 것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근심은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하신 이들의 삶에 관하여 근심하는 것이지, 거듭나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이방인과 간음한 어두운 생명들이 행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여 벌을 받을까 근심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근심은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그 본성대로 충만하여 지기를 바라는 것과 그 바람이 부족할까 근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이 하시는 근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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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먼저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는 것이고 다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야 생명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의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나,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보상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노력에는 많은 것이 숨어 있습니다. 먼저는 성경대로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동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한 가지는 성경대로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투자지 순종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바가 있어서 성경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동은 그것으로 구원을 받거나 그 행동이 축적되어 세상에서 사업이 잘되고 건강하고 평안하며 죽어서 천국가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살 것을 담보하는 조건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라’는 말씀은 그런 생명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 생명이 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생명, 곧 구원을 얻어서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 곧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순종이면 됩니다. 그것이 최소한의 요건이자 유일한 요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을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이 순종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 존재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그 존재 목적으로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목적으로 회복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으로 볼 때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은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라고 늘 말씀하였습니다. 이 생명이 없으면 성경은 지켜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100% 지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개 노릇을 아무리 잘해도 100% 개가 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는 것이 성경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태초가 성경의 첫 머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사는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존재의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같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야 더러운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말은 속에 있는 것이 나오는 것이니 속에 깨끗한 것이 있으면 더러운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끗함과 더러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생명의 존재 여부입니다.


또한 그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노력하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갈등이자 노력과 수고인 것이지 성령을 근심하지 않게 하려는 노력을 인하여 신앙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사람이 사람다움을 유지하기 위하여 때론 허무한 것 같은 것을 지키고 희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신선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동일한 육신으로 같은 세계에 살고 이전에 자신도 가졌던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을 사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그 본성에 충실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바울 사도가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노력은 자기 밖에 있는 것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지 못한 자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나, 아직 이르지 못한 천국에서의 금은보화를 위한 노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케 된 생명인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살아가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본성대로 살고자하는 것에 대한 저항 앞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 본성, 사람들이 육신으로도 자기 안에 있는 인간다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먼저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함이 충만하기를 권면 받는 이들의 말씀이라는 것과, 노력으로 보이는 이 말씀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이끄는 것에 순종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 속에서 힘쓰고 애쓰는 것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노력이나, 성경대로 살아서 자기 안에 추구하는 바를 이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삶에 자신이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언제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을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본성에 충실한 선택을 하는 삶을 살라고 바울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니 도둑질 하지 않고 더러운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것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면 그런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대로 사는 세계에 종속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을 수 있으니 말조심하고 교회에서 근심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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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말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욕을 하는 것이나 비방하는 것 또 넓게 보면 거짓이나 그릇된 선동과 같은 것들과 저주와 같은 것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말라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듯 말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속에 있는 생각, 즉 말하는 사람이 가진 의가 표현되는 형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입으로 나오는 것을 인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더 엄밀하게 보면 더러운 것이 들어 있는 사람이 그 더러운 것을 말로 표현하므로 그 사람이 더러운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확정한다는 것입니다. 즉 말로 인하여 말하는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것’은 어떤 것인가? 늘 언급하는 것과 같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은 하나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생각과 의가 기준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가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러움과 덕, 선함은 모두 하나님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세상의 욕이나 더러운 말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더러운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고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교인이 욕을 하면 안 된다.’고하는 말들은 예수님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게 더러움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입으로 뱉은 말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핵심이고 본원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그 사람 안에 있으면 예수님과 같이 ‘독사의 자식들아’와 같은 말을 해도 선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뜻하신 것이 없는 인생을 살면서 평생 도덕군자와 같은 말만 한다고 해도 그것은 더러운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더러운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말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서 엡 4:29절 끝에 ‘선한 말을 하여 은혜를 끼치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은혜는 사람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주시는 것이라고 많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이유를 아는 것이라고. 


따라서 바울 사도의 이 권면은 욕이나 저주와 같이 말 자체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혐오를 느끼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결국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시고 주신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는 말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말을 하려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 생명으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속사람에 생명으로 있어야 비로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자기 안에 있어야 비로소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으로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 곧 더러움이고 그 상태에서 하는 모든 말은 다 더러운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말 자체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생명이 그 속에 있느냐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하고 장성한 사람은 그 생명의 본성대로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목적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자기 생명이 되어 있으면 그것이 사람에게 덕을 끼치고 은혜를 베푸는 선함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말하는 것은 듣는 이들에게 그 이상의 은혜가 없는 것이고,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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