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이번에는 잠깐 마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사람들은 마귀, 사탄, 귀신과 같이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대응하는 법이 하나인데, 설사 그것이 정말로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의미가 없습니다. 마귀나 사탄에 대해서 잘 알든 모르든 다들 예수의 이름으로 물리친다는 하나의 법만 아는데 그게 나누어진다고 소용이 없습니다. 영화나 만화처럼 퇴마를 다룬다면 또 모르겠지만.


앞서 마귀가 틈을 타는 것을 허락지 말라는 바울 사도의 권면을 이야기 하면서 마귀가 유혹하거나 노리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거듭남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같이 교회에 다니는 것이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시인하고 마음이 뜨거워진 그런 경험을 말하는 포괄적 개념이 아닙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새로 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다시 났는데 같은 것을 추구한다거나 같은 것을 먹을 것으로 또 귀하게 여기는 것도 같다면 새로 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바랬고, 자기 육신에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늘이 도왔다고 말하며 살다가, 예수 믿은 다음에 동일한 것을 감사하고 추구하면서 그 대상을 하나님을 바꾼 것은 거듭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이 평안해지면 하나님께서 도우셨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자기 육신이 세상 가치관을 주장하는 사람의 주장 앞에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수고하게 되는 것을 스스로 보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마귀가 노리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마귀의 행사입니다. 이는 늘 설명하는 것과 같이 인생이 받는 모든 마귀의 시험은 예수님이 받으신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마귀의 시험 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보이시러 오신 분이니 그 분이 보이신 것과 다른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떠난 사람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 즉 생명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은 것이니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이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유혹이라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세상의 법칙들, 육신의 한계를 넘는 기적도 일으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니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성전을 건축해야 한다고 하는 생각은 마귀에게 넘어간 생각입니다. 혀 갈라지는 소리를 내면서 성령의 능력을 행한다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도 마귀에게 넘어간 것입니다. 목사니까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상을 차리는 것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니까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더 낫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로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렇게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생각과 일은 단순히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문제가 아닙니다.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는 일에 있어 귀하다는 가치가 세상의 가치에 기준을 두고 더 좋은 것, 세상의 가치가 더 선하게 여기는 것을 귀한 가치로 여기는 가치관은 세상의 생명을 가진 것이니 마귀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안에서 나오는 생각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 안에 있는 마귀의 생명,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의와 가치관에서 나오는 생각을 괜히 마귀가 자신을 유혹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귀의 자녀인데 왜 마귀가 그를 유혹하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닌데 자신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그냥 자기 팀을 죽이는 팀킬일 뿐입니다.


여기에는 모순도 한 몫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그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기에 육신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것을 이기려고 성경대로 행합니다. 음란한 생각이 든다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 난 것도 아닌 인생이고 육신인데, 그 육신에 깃든 본성이라고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 일리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는 의미입니다.


육신에 대한 자기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모습과, 그 부합되지 않는 모습을 추구하거나 끌려가는 것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사탄의 시험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차마 웃지도 못할 코미디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을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고서 그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과 그 모습으로 끌려가는 것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 선악의 기준, 자신이 먹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이 바로 뱀이 준 것이고 마귀 그 자체인데, 마귀의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그 삶에서 비롯되는 자아의 모습을 마귀의 유혹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물리치려고 하는 것은 고양이가 자기 꼬리를 물기 위해서 뺑뺑 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엄청 웃기고 노력하지만 이루기 힘들 뿐 아니라 설사 성공한다고 해도 자신을 헤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마귀가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권면한 것은 자기 선악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유혹이라 여기는 마귀의 자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성도들, 거듭난 사람이요 신실한 사람이며,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들에게 마귀의 유혹을 경계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세상의 가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유혹은 하나님은 너무 존귀한 분이고, 그렇기에 그 아들 또한 너무 존귀한 존재이기에 그 존귀함에 맞는 대우를 하려고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으로 대접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유혹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성경을 몸으로 다 지켜낼 수 있어야 하고, 육신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초인적이어야 하며, 그런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을 섬겨서 세상의 영광을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는 유혹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이 마귀의 유혹은 십자가의 도를 알면 알수록 사실 더 깊이 빠지는 유혹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단들은 그 시작이 지금의 교회들보다 다 성경에 대하여 더 깊음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는 이 수준 낮은 일반 교회들보다 성경에 대하여 더 깊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더 깊고 더 밝은 것을 대함에 있어 세상적인 가치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세상과 섞이면 안 된다고 스스로 사회에서 분리하거나 격리하면서 타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의 성과입니다. 스스로 가진 자기 선악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마귀의 유혹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은 마귀도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이미 마귀의 자녀가 되어 있는데 그것을 유혹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깊이 알면 알수록 이것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집니다. 모든 교회들과 신학자들이 보는 성경이 어두운 것을 알고 밝은 안목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것을 가진 자신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귀함은 오히려 낮아지고 죄인 되고 종이 되기에 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이렇게 배우지 않았다고 말씀하심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바로 알고 나서 그 존귀함을 알았으니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세상에 없는 존귀함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도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작 세상에서 낮아지고,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종과 같이 전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와 의지에 따라 자기 양심에 찔림을 받아 스스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귀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본분이 그것임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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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유혹과 시험에 드는 것을 늘 경계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시험하는 존재는 항상 마귀, 사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온한 생각이 들면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치기도 합니다. 심지어 큰 소리로 외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관습은 마귀가 자신을 시험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잘 하려고 하는데 마귀는 시험을 한다는 것입니다. 틈만 보이면.


그런데 사람들은 육신을 부정하게 여깁니다. 하나님께 자기 육신의 상태 그대로는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욕심과 음란한 생각이 있는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원적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입니다. 즉 마귀가 시험하기 전에 마귀가 시험해서 이루고자 하는 상태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신앙생활 과정에서 다시 마귀가 유혹을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완전한 모순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물론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마귀가 방해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생명으로 났다는 것은 그것으로 온전한 상태인 것입니다. 사람이 내어난 다음에 팔을 붙이지 않습니다. 지금의 모습과 정체성이 자신이 태어난 모습, 자기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 지금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고 있는 생명이라면 처음부터 그런 생명이거나 거듭나서도 그런 생명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마귀가 시험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태어나서 바뀌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이미 육신의 삶에 대한 관점이 하나님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 보면 사망 가운데 있는데 그것을 아무리 마귀 사탄이라고 해도 무가치한 것에까지 유혹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 사도가 또 성경이 마귀의 유혹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 부정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 대한 유혹이 아닙니다.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의롭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마귀의 유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유혹이라고 여기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선악의 기준에 자신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으로 볼 때 사람이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스스로 마귀의 유혹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즉 그들에게 마귀는 그들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과 다르게 스스로 가진 선악의 기준에서 비롯된 생각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마귀의 유혹은 육신이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데 그것을 방해하는 육신이 가진 본성에서 비롯된 욕심이나 정욕이나 성욕과 같은 것으로 방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마귀의 유혹을 받는다고 하려면 최소한 거듭난 생명이어야 합니다. 거듭나지도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성경(신구약 어디라도)을 지켜 의로워져서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어떤 기도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듯 어떤 마귀의 시험도 금식한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범주를 벗을 수 없습니다.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이라 인정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자기 인생의 목적임을 아는 거듭난 사람에게 있는 마귀의 시험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 그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 사도의 이 권면도 그 앞부분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함이 충만하게 되는 것을 간구하고 권면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유혹이 마귀의 유혹, 마귀가 노리는 틈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유혹은 참으로 교묘하고 끊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 그것을 위하여 성경을 지키려는데 육신 안에 있는 본성들이 방해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순종하느냐는 삶의 문제에 있어 유혹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귀의 유혹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 이상의 것을 할 수 있고 보여주고, 추구하여야 한다는 그 생각이 마귀가 노리는 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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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루는 오늘날 아침에서 저녁까지의 개념이라기보다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를 이르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창세기에서 하루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고 저녁, 곧 해가 질 때를 나누는 시점으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해가지도록 분을 품지 말며’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의 시간 기준은 또 다른 날이 왔는데 그 때까지 분을 품고 있지 말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로 분을 내어도 그것이 새 날, 곧 더 장성한 생명이 되면 이전의 일로 분을 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설사 주의 일로 분을 낸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새로운 날을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새로운 날의 기본적인 개념은 삶의 정체성이 바뀐 후 맞이하는 날이자 세계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늑대로 살다가 양이 되어 맞이하는 새 날과 같은 것입니다. 입대 후 맞은 첫날, 결혼 후 맞는 첫날과 같은 날도 이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분, 곧 정체성이 달라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해가 지고 새 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한 세계, 하나의 가치관이 새롭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도 그 장성함이 충만해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예레미아의 말씀과 같이 아침마다 새로운 생명의 안목으로 세상과 삶과 자신과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장성해져가는 생명에게 하루하루는 늘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란다는 것은 더 십자가의 삶이 자신을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제보다, 또 단 하루의 과정에 비교되는 덜 장성한 생명보다 더 낮아지고, 자신이 좀 더 수고하고, 더 속상해하는 자리로 갔다는 것입니다.


어제보다 더 낮아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분을 내고 화를 낼 일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화를 내었던 것이 오늘은 화를 낼 일이 아닌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는 말 그대로 고분고분한 모습으로 순종하심과 같은 것입니다.(이것은 예수님께서 자라셨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변하는 단계를 보이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사람이 분을 내는 것은 그 자체가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에 분을 내느냐가 문제이고, 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은 분을 낸다고 해도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넘어서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 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하면 분을 내는 것은 사람이 가진 기본 본성의 하나라는 것이고, 본성이란 것은 억제하고 조절하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의를 가지고, 어떤 가치 세계에서 그 본성이 발현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 가진 인생은 그 존재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심히 좋은 것이라고 여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이 가진 모든 것들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신 것은 그 본성들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충분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분을 내는 것이나 반대로 사람이 누구나 사랑을 느끼는 것과 같이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자체로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을 사랑하는 본능도 사회적 불륜과 같이 사회를 헤치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자체가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본성이 어떤 생명 아래에 있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의가 훼손되는 것을 보고 분이 나지만 결국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충만해지면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훼손하는 사람들과 그 가치관 그리고 그 근원인 선악과에서 비롯된 의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하루하루 새롭게 될 때 마다 십자가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기에 그것이 새로운 날을 맞이하는 장성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그리스도의 장성함과 그 충만함으로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바울 사도의 권면이 자기 삶에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말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것, 그 노력을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포함한 삶은 자기 안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안에 없기에 그것을 얻고 이루려 하지만,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자기 안에 있고 그 생명이 매일매일 자라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정리해 본다면 사람이 분을 내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을 내는 본성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안에 있는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다만 어떤 일로 그 본성이 드러나느냐의 문제로 죄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안에 무엇을 의로 삼고 있느냐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인 사람은 하나님의 일로 분을 낼 것이고, 선악과를 먹고 육신의 정욕을 좇아 자기 의가 본성인 사람은 육신의 일로 분을 낼 것입니다.


또한 설사 하나님의 일로 분을 낸다고 해도 그것을 인하여 죄, 곧 자기 정체성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를 훼방하는 사람도 하나님이 주인이지 내가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내 자리를 벗어나서 그것을 심판하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서 충만해지면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십자가의 도가 더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이 하루하루 자라므로 새로운 날, 생명이 더 장성함으로 맞이하게 되는 또 다른 새 날이자 그리스도의 충만함이 더 장성해진 날이 오면 자신은 더 낮아지고, 더 의로워진 만큼 더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므로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의 삶을 이끄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바울 사도의 권면한 자리로 자신을 이끄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노력이나 훈련하지 않아도. 왜냐하면 이 모든 권면은 바울 사도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권면한 것이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우리, 곧 자신과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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