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간구 곧 그리스도로 충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고’라고 하신 것은 사람을 지으시고 인생을 주신 뜻대로 행하라는 의미라는 것을 먼저 글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권면대로 행하면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고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4장 3절에서 아주 눈에 띄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안으로. 그러면 성령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하나 되게 하셨을까? 언뜻 이것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하나로 합하여 서로 용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나타나는 모습은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행하는 근원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성경 에베소서에서 서로 용납하라고 했으니 서로 용납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그런 노력이 효과적으로 성과를 나타낼 수 있도록 말을 선하게 하는 규칙을 정하고, 봉사의 당번을 정하고, 기도하여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길 수 있도록 하여 서로 용납하게 되려고 하면 그것이 바로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의지와 신념으로 성경을 지키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그렇게 이 말씀을 봅니다. 다른 말씀도 물론.


그러나 그런 모습, 즉 성경에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각종 제도와 법과 규칙을 만들어서 행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이고 그렇게 지키려는 말씀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무관하게 율법인 것입니다. “어떤 구절은 율법이고, 어떤 구절은 복음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신구약 무관하게 다 복음인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율법을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지키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정말로 어폐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서 얻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간구와는 달리 율법적인 신앙이 그런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바울 사도의 간구가 나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성경을 율법으로 받은 사람들이 신념으로 노력하는 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흔히들 하나 된 모습이라고 말하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은 현상이지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다름 아닌 성령의 하나 됨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면 앞서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하는 것은 본능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신앙을 벗어나는 것이 성령의 하나 됨으로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분이십니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을 가진 사람을 하나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일이신 것입니다. 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아는 것은 모두가 어려워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고, 그것이 육신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면 그리스도이며,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인생이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삼위 하나님은 하나이신 것입니다. 하나의 뜻하신 바가 뜻이 그대로 있으면 성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뜻이 육신이 되면 그것이 아들이니 성자 예수 그리스도시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께 그 뜻을 나타내시려 지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아들이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이자 뜻이며 사람을 지으신 의가 사람과 하나가 되게 하시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성육신(成育身) 된 존재입니다. 그러면 그 삶은 당연히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뜻대로 살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데 다르게 살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그 없는 것을 연구하고 시도하니 성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육신을 가진 인생 그 둘을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성경에서 여러 가지로 명하신 ‘~~하라’는 말씀들이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만 있으면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것도 너무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앞서 언급한 삼위일체도 상식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 사도의 간구와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어 그것이 시간과 함께 절로 충만하게 되고, 겸손하고 온유하므로 서로를 용납하는 것도 본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살기만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 즈음에 이르면 예수님의 짐은 수고하지 않고 가벼운 것이라고 하심도 몸소 체휼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이 나지 않음보다 감사한 삶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심 그것에서 비롯되는 현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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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간구는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토록 무궁하시기를 구하는 것으로 일단락됩니다. 영광이라는 것이 누차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정체성이 나타나고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지극히 제한된 조건 안에서만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물론 그 조건은 범위가 좁다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무궁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 영원하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과 같아서 실로 많지 않기 때문에 영광이 지극히 제한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은 일면 너무 쉬운 것이지만 실상은 너무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서면 바로 뒤에 있는 것을 돌아서지 않고 계속 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하나님의 성품이 있어야 합니다. 없는 것을 나타내거나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 세상에서의 성공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 무궁히 나타나기를 간구한 바울 사도의 간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그 간구함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를 또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의 간구가 어떻게 성취되는지, 그런 간구가 이루어진 모습은 어떤 것인지를 4장 이후에 설명해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보려고 하는데 먼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 간구가 이루어진 삶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육신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를 구하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본성은 세상의 가치 앞에 자신이 종과 같이 또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본성이지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바울 사도의 간구가 이루어지는 모습은 그 본성 없이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신념이나 의지 가지고 행하거나 혹은 닥칠 재앙을 두려워서 얼마 정도는 할 수 있지만 항상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과 같은 것이 노력한다고, 신념을 가진다고 자기 본성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마저 속이면 한 마디로 하나님 세계에서 가망이 없습니다. 그것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선 글에서 간구라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으로 났으니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이 된 사람은 항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름이 곧 생명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자기 밖에 있는 것을 구하게 됩니다. 돈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경제적 부유함을 구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온유와 사랑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자신이 성령으로 생명이 된 존재가 아닌데 성령의 열매를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사과의 유전자를 가지지 않았는데 사과를 열매로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데 그리스도의 본성을 나타낼 법은 없는 것입니다. 시늉이나 흉내를 열매로 착각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지자 노릇’이라고 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이치입니다. 부르심은 에베소서 1장에서 말씀하신 예정하신 뜻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 안으로 사람이 순종되기를 부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을 알고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신 그 뜻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예정이고 부르심이며 뜻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육신을 주신 이유를 깨닫고 그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자 의미라고 순종한 사람은 성령께서 그 순종함을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잉태한 생명이 되고, 생명이 있다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있을 것이며 그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부르심에 합당한 존재가 되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밀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르심에 순종해서 그 부르신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고, 그 목적을 기준으로 생명을 가늠하시는 하나님 앞에 생명 가진 존재로서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은 당연히 그 부르심에 합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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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성도를 향한 간구는 그리스도의 지혜와 사랑이 충만하게 되고 그 안에서 능력대로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능히 주시는 분께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선언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 말 가운데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구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능히 주시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미 앞선 글에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졌는데 뭣 하러 구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은 신앙이 구원에서 끝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구원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알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이 전혀 새롭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이 나면서부터 사람 의로서의 삶이 시작되고 더 사람답게 살려고 많은 것을 구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 세계에 의문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올무인 것이 분명합니다. 좀 과한 비판일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신학이라는 것이 그 위에 있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아직도 모르니 공부하고 있는 것이고, 아직도 모른다는 것은 의문에 속했다는 것이니 신학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구원도 거듭남도 없는 사람들인 것이 명확한 것입니다.


특히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정체성이 나타납니다. 몇 번의 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 그것이 자기 삶으로 나타나는 세계로 자신이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살게 됩니다. 아니 그것은 생명의 본성이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남자로 난 사람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에 성경에서 하나님을 생명의 주관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바울 사도의 이 간구를 보면 능히 이루어 주신다고 하는 성도들의 간구와 생각이 무엇인지 분명해 집니다. 그것은 적어도 입사시험이나, 사업의 성공 혹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것을 기도하면 얻는다고 가르치고,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감동하실 수 있도록 성경을 잘 지켜 행하고 언행을 선하게 하라고 가르치고 따르는 것 역시 바울 사도가 언급한 간구하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서 능히 들어 주신다는 간구와 생각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의 충만입니다. 거듭난 사람으로서 거듭난 생명으로 살아가고 싶은 소망에 사로잡힌 그 소망에서 비롯된 간구와 생각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과 같이 육신의 평안이 아니라 자기 선악의 기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주장하는 법 앞에 죄인이 되어 육신으로 사람을 섬기고 죄인이 되는 것을 위하여 간구하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도 역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그 자리로 가는 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말씀, 처음 육신이 되게 했던 그 말씀이요 하나님의 의며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시는 데로 가시는 것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간구가 아니라 육신이 어떠하든 육신은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신 것이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육신이 십자가에 드려지는 것을 간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하실 때 이루어졌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신 간구와 생각은 어떻게 하면 육신으로 살 동안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나타내며, 한 번이라도 육신을 섬기듯 더 움직여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것인지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념이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이끌리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삶의 어떠함을 압니다. 사람이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듯,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본성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자기 삶을 봅니다. 밖에서 책을 보거나 산에 가서 기도해서 그리스도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은 살 동안 항상 사람이듯,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고, 언제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기에 항상 하나님께서 시뻐하시는 존재인 것입니다. 자녀가 어디 있든 부모의 기쁨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복음을 표현하고 전하는 것을 위하여 사용하려 합니다. 이것은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 그렇게 되는 세계입니다. 흔히들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 같이 사람이 나태해지려 하는데 스스로 깨고 각성해서 그런 삶을 살려는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과는 전혀 반대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살까 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선지자가 “다시는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이라고 하신 것 또한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살려고 원하지만 잘 안 된다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버리려 해도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본성이 이끄는 간구와 생각은 언제나 충만하고 항상 넘치게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보십시오.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듣는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보이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은 연구하고 찾는 것이 아닙니다. 무심한 듯 살아도 생각이 장성해지고 의문이 가만히 있어도 풀리는 세계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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