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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유명한 말씀입니다. 지식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떠한지 성도들이 알게 되고 그 아는 것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라는 바울 사도의 간구입니다. 


앞서 간구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기에 구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있고 없는 기준은 육신의 재화나 능력이 아닙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입니다. 온전한 인생의 목적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 곧 정체성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삶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삶입니다. 그 구하는 바는 당연히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인 사람의 삶이 추구하는 바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라면 굳이 넓고, 길고, 높고, 깊음까지 그리스도를 알려고 <노력>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냥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면 살수록 그리스도로 충만해지고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 경륜이 쌓이는 것 같이.


사람들은 신앙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표현이 다양하긴 하지만 어쨌든 좋은 신앙을 가지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 바람을 대변하는 동사(verb)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좋은 신앙을 가지기 원한다.’, ‘신앙이 충만해지려고 힘써야 한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와 같이 말합니다. ‘가지는 것’, ‘힘쓰는 것’, ‘노력하는 것’ 이런 것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자기 안에 혹은 손에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면서 그것은 ‘속사람을 성령으로 강건하게(16절)’,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17절)’,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17절)’과 같이 그리스도의 충만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의 성격에 대하여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 식으로 충만해지면 좋으니 자기 마음을 다잡고, 안 될 땐 기도해가면서 노력해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거나 있었다면 또 모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그런 방법의 세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진 회칠한 거룩한 변명은 ‘우리는 예수가 아니니 노력할 뿐’입니다.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얼핏 겸손한 고백 같지만 사실은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니 여전히 ‘충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뿐입니다.


바울 사도의 간구 속에 있는 충만은 그 충만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적으로 보면 생명의 법입니다. 생명의 법은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고 자라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도 속에서 밖으로 장성해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인용한 넓이, 길이, 높이, 깊이는 모두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 본성이 속에 있고, 그것이 육신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점점 장성함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속에서 밖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 자기 밖에 있고 그것을 얻으려고 달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서 자기 안에 없는 것을 구하는 것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충만>의 방향성은 언제나 안에서 밖으로 향합니다. 즉 그리스도로 충만해지려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충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이 흙이니 땅에 뿌리가 박히듯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삶의 본성으로 굳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는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생명이니 그 생명이 자라면 자라는 만큼 충만해지고 장성하는 것입니다. 자신 밖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없는 사람이 하나님께 돈을 구하듯, 건강을 잃은 사람이 하나님께 건강을 구하듯 그리스도의 충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을 구하려면 먼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이 자기 삶을 주관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장성하면서 충만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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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가 하늘에 속한 족속은 물론 땅에 속한 족속들까지 하나님의 어떠함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로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없는 사람이 가지기 위해서 무릎을 꿇고 구해야 하는데, 바울 사도는 오히려 복음을 가지고 전하는 사도인데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간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실 때 세상에 없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더 가진 사람은 이상하게 가지지 못한 사람 위에 서려하고 그렇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동영상 강의를 들어보면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단지 그 분야에 대하여 배움이 필요하지 실제로는 강사보다 더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지만 강의를 듣다보면 강사는 어느새 반말을 하고 있고, 농담이랍시고 수강생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체질화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세상의 가치관은 더 가진 자가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정상이고, 모든 분야에서 그렇게 되려고 합니다. 애굽의 피라미드가 그것을 상징합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에게 자신의 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피조물과 같은 육신이 되어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도 같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한 하나님 아들의 기준에 반한다고 하여 죄인이 되어 달리심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것을 보이셨습니다. 의로운 분이 불의한 자를 위하여 오히려 불의한 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이들에게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땅에 속한 이들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것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입니다. 의지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게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생명의 법과 그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모든 사도들이 가진 본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들의 표현들이 모두 생명의 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 한다는 것이나, ‘성령의 열매’와 같이 표현하는 것이 다 그 이유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도 마음에서부터 충만해지기를 기도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것 역시 그리스도의 충만이 생명의 법에 의하여 충만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엡 3:16-18)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을 따라’라고 하심에서 영광(doxa)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나타나다’ ‘표현하(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없던 것이 나타나는 것 그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세상에 없었는데 그것이 나타나는 그 자체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영광을 상대적 우위라는 개념에서 생각합니다. 1등이 2등보다 영광스럽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나타나면 그것 이상의 어떤 영광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그 자체가 영광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각과 안목과 가치라는 세계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뜻이 없다가 나타나면 그것이 바로 영광인 것입니다. 아우라 눈부신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뜻을 순종하여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아주 여러 번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세상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 나타나신바 되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몸소 보이시고 그것을 전하신 것을 보고 십자가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순종하는 그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심령 안에 들어오시고 성령께서 그것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순종한 믿음을 인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거하게 되면 그것이 생명이 되어 본성이 되면 그 보다 강하고 굳게 자리하게 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약해보이지만 그 안에 있는 본성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강함입니다. 이것을 사람이 흙으로 지어짐을 인하여 뿌리 내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은 생명의 법을 따르기에 언제나 속에서 밖으로 자라고 충만해집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살 뿐인데 그 삶을 보니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의 의 앞에서 종이 되고 심지어 죄인이 되어 섬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강해서 뿌리가 굳건히 선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본성은 생명이 속에서부터 자라듯 날마다 자라고 풍성해지며 그 본성으로 충만해지는 것임을 바울 사도가 겪었기에 성도들도 그렇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종이 되는 것은 비참해보이기까지 할 것인데 바울 사도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타나는 영광스러운 것이므로 너무 좋은 것이기에 성도들도 그렇게 되기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시니 하나님 아들임이 드러난 것이 그것입니다.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성품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어떤 행동을 보고 아버지 닮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렇듯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보인 십자가의 삶을 보고 자신도 그 모습이 자기 운명임을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면 그 순종하고 받아들인 것을 성령께서 잉태케 하시므로 생명이 되어 그 본성을 좇아 날마다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하늘에 속한 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곧 영적 이방인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모양은 비록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어리석고 비참한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십자가의 삶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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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다보면 의외의 말씀이다 싶을 정도의 말씀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간구의 시작 부분인 에베소서 3장 14절에는 “하늘과 땅에 속한 족속에게”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께 구하는 간구의 대상을 지칭하는 말인데, 하늘과 땅이라는 양 끝단에 속한 사람이 있음을 언급한 반면 그 두 대상 모두가 간구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땅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땅으로서는 불과분의 관계이지만 하늘은 사실 입장이 다르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땅은 하늘의 어떠함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하지만 하늘은 땅이 어쩐다고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하늘의 뜻에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라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하늘은 뜻을 가진 곳입니다. ‘하늘의 뜻’이라는 말은 상용화되어 있지만 ‘땅의 뜻’이라는 말은 판타지 영화가 아니라면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땅은 뜻이 없습니다. 땅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지 뜻이나 의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하기 쉽지만 다음이 어렵습니다. 사람이 바로 땅이라는 것, 땅과 같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경에서 괜히 ‘흙으로 사람을 지으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럼 사람이 땅이라면 사람이 의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란 로봇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앞에서 땅은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것을 다시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뜻을 나타내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고 성취시킨다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늘에 속한 족속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족속을 말하는 것이고, 땅에 속한 족속은 땅의 뜻 곧 사람의 뜻이 삶을 주관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땅에 사는 사람이 하늘에 속했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공중에 거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의와 뜻이 하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가 있어도 대한민국 헌법의 의에 속하였기 때문에 한국에 속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말 그대로 하늘의 의가 땅에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이유가 자기 삶의 목적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 곧 이 땅에 오셔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 속했다고 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땅에 속한 족속은 땅의 가치가 자신의 의와 뜻인 사람입니다.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세상의 가치가 자신의 가치인 사람이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세상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니 자신도 그것이 인생의 목적으로 좇고 있는 사람입니다. 애굽의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도 바벨탑을 쌓고 있는 사람입니다. 땅의 것을 가지고 하늘에 닿아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체성과 전혀 맞지 않음에도 세상에서 상을 받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것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모이는 사람들은 다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가 거대해진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두 피라미드 위로, 바벨탑을 더 높게 쌓으려는 땅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육신이 평안한 가운데 몸을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바를 이루고, 그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을 성공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 속한 족속들의 혈통이자 본성입니다.


그렇지만 바울 사도의 간구에는 땅에 속한 족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기를 구함에 있어 땅에 속한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이방인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방인이라고 지칭한 사람이 바로 땅에 속한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족속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신의 의와 뜻이 되었으므로 하늘 곧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교회에 다니든, 유대교를 믿든, 알라를 믿든, 부처를 믿든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땅에서 가친 있는 것을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이루려는 사람은 다 땅에 속한 족속이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이방인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또 하나님의 복음을 가진 사람이 바울 사도가 말씀한 땅에 속한 족속 곧 이방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을 고귀하게 여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과 자신을 분리하려고 합니다. 그 대표적 현상이 온전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산에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된 사람들, 먼저 하늘에 속하게 된 사람들은 그 신앙이 자라 장성하게 되면 자신이 하늘에 속한 이유가 땅에 속한 족속 곧 이방인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어릴 때는 모든 것이 이기적이다가 자라면서 이타적인 것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원래 속에 있던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원 의미가 ‘속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나아가는 것을 외부 수혈이 아니라 자라는 것으로 표현한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그렇게 장성하면 할수록 땅에 속한 이들을 위하여 자신이 먼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늘은 땅에게 뜻을 보이는 것이니 하늘에 속한 사람은 하늘의 뜻을 언제나 땅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뜻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먼저 가졌고, 더 온전한 것을 가졌는데 그것의 내용을 보니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하여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땅에 속한 족속을 위해서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더 가졌는데 종이 되는, 그래서 세상에 없는 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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