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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3:1-13) 그리스도의 비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6. 5. 14:42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는 자주 하나님 나라의 일과 그리스도의 일은 비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밀은 감추어진 것인데, 역설적으로 복음은 또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십니다. 말씀 자체는 감추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은 온 세계에 항상 공개적으로 전해지지만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공개되었지만 비밀인 것입니다.


이 비밀은 복음 자체를 감추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감추신 것이 아닙니다. 선악과도 그냥 노출해 놓았던 하나님이신데 복음을 감추실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밀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게 보기 때문에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그것이 비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비밀인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날 문자가 사용되는 모든 문명에서 예수님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더욱이 많은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가 있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고, 우리나라만 해도 얼마나 많은 교회가 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리스도가 비밀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나 유대인의 왕이라 할 수 없는데 그렇게 주장했다는 이유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에서 실패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 위에서 정립된 법에 의하여 사형을 선고 받는 것보다 더한 실패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의 신앙을 보면, 그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 정체성을 떠나 언어적으로나 상식적으로도 완전히 잘못된 생각임에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십자가와 완전히 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그리스도의 일은 비밀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엡 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세대는 달력의 시대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들의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가 없는 사람들의 세대, 그런 사람들의 형통이 이어진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일이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들은 사람의 의가 자신의 삶이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그 아버지의 의를 육신이 되어 표현하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에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면 사람의 의가 자신의 삶이 된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 곧 육신의 정욕을 좇는 생각이 삶이 된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세대는 바로 그 사람의 아들들이 또 아들을 낳고 그렇게 이어지는 세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일은 언제나 비밀입니다. 그들의 의와 가치는 전적으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영광에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에 매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감춘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음으로 본질을 덮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비밀은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의가 육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구분을 육신의 할례로 구분하는 사람이 육신으로 이방인 사람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을 이해할 방법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에서도 같습니다. 교회에 가서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기도하고 바라며, 또 같은 맥락에서 헌금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은 육신의 어떠함으로 신앙을 가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좋은 신앙은 행위에 있습니다. 할례를 대신하여 육신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로 그리스도 안과 밖을 구분하려 합니다. 그게 육신의 할례로 이방인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목사도 아닌 사람이 성경을 어떻게 풀 수 있어?” 라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에베소서를 읽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비밀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비밀은 단지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성공하는 비결에 불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 여기는 이들에게 비밀입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로서는 지금의 목사나 장로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엄연히  있는 시대에 심지어 사도를 핍박까지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교회를 욕하고 신학교는 구경도 못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외면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의 편지를 보고서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이야 말로 진정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와 같이 지금도 이런 글을 보고, 이 안에 그리스도의 비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알게 하지 않는 세대에 속한 사람의 아들들일 것입니다. 분명 그들은 교회에 가서 아니면 하나님을 믿어서 육신으로 사는 세상에서 바라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거나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랐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18-20) 단지 육신의 정욕, 그 하나만 버리고 자신의 삶이 스스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너무나 당연한 그것을 주목하고, 그렇다면 나를 존재하게 하신 이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겸손함만 있다면 언제라도 열린 것이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종교의 틀 안에 갇히고, 육신이 바라는 것을 위하여 신앙을 가지고 있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니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는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에게 그 존재의 목적마저 감추는 인색한 사람일 리가 없는데 그것을 그렇게 묻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비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개적으로 인생이기만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전하셨는데, 심지어 그 아들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보내시면서 까지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이 자기 안목으로 하나님을 보니 그것이 비밀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도라고 인정하기 어려웠던 바울 사도의 글을 보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계시와 비밀이 있음을 알았던 것과 같이 지금도 목사나 장로나 신학자가 아닌 글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뜻이 보여야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며, 이방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하나가 된 사람인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을 이유조차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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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에 들어가면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이방인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리스도의 일로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가 옥중에서 쓴 편지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 자체로만 보면 바울 사도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 즉 사도로서의 영역이 한정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당시 베드로와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담당하였습니다. 요한 사도의 경우 복음을 전하러 다니기보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도들 각자의 사명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울 사도는 이방인, 제자들은 유대인’으로 사도들의 사명을 한정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 2장에서 언급한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이방인의 기준은 육신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생명이 되지 않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 곧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도들은 다 영적 이방인을 위한 사도들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논조를 이 말씀과 접목을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괴변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십자가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이방을 위하여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로서 그것을 전하고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고치시고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출근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존재하는 한 그것을 나타내게 되는 본성 그것으로 인한 모든 행위와 나타남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인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고, 천지창조의 때에 사람을 만드시고 안식하셨다고 하심에서 보듯 그리스도의 성품이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에게서 안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의가 나오게까지 역사하시는 그 역사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일은 먹고 살려면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동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봐도 교회 안에서 ‘그러면 안 돼!’라는 것이나 ‘이렇게 해야 복 받는다 혹은 천국에서 상급이 크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노동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려고만 하면 이 시대의 신앙이 얼마나 부정한 것인지 그것을 말하지 않기 너무나 힘들 지경입니다.


이 일은 하지 않는다고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으면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남자로 난 사람은 남자로 사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여자로 난 사람 또한 여자로 사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여자로 나서 여자로 사는 것은 여자라는 본성에 따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도 이와 같습니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그리스도로 사는 일을 그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거듭난 삶을 사는 사람만 체휼하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니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갇히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구속은 한 편으로는 생명의 구속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났기에 그 본성에 구속되어 그것을 벗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생명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이 생명의 구속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에 대접받고 귀하게 여겨질 것 같은데 그 생명의 본성은 어이없게도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인한 것이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외침이 그것을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힘을 내시고 신념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해도 원래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그 생명의 본성이 그렇게 이끄는 것을 어쩔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생명인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성은 아주 존귀한 것인데 그 존귀함은 세상의 가치와 같이 귀한 것이 대접을 받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아는 존재인데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그런 존귀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귀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귀하게 대접해야 한다며 강대상 위에 올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것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 그것은 너무 귀한 것이고 세상에 비교할 것도 없는 귀함이지만 세상의 가치관대로 귀한 것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귀한 것이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다른 것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유일한 이름 곧 정체성이고 가치인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본성에 의한 것이기에 신념을 가지고 하는 것이나 천국가면 고래등 같은 집이라는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었기에 그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본성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일은 귀한 것을 가졌기에 대접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귀한 것이 대접 받지만 그리스도의 일은 귀하기에 종이 되는 세상에 없는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것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 의하여 갇히고 죄인이 되지만 그것을 인하여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밀인 것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이방인을 위하여 갇혔다고 하신 것이 바로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방인이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이고, 그렇게 세상의 가치를 좇는 이들에게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보이는데 그것이 세상과 다르게 종이 되고 갇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본성에 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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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이것을 부인하거나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거하시기만 하면 성전이냐고 반문하면 망설입니다. 그것에 머뭇거리지 않고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교회를 화려하게 짓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누는 것에 필요한 시설이기만 해도 감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논리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인데 가장 좋은 것으로 해야 한다면서 세상 가치로 귀하고 좋은 것으로 성전을 치장합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기만 하면 성전이라는 것도 부인하는 것이고,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을 섬기는 간음도 함께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심각한 것은 자신들의 그 행위가 하나님을 위한 정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에 대하여 사람들이 가장 어두운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을 언급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뜻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그 형상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 성전에 대한 기본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용이 되시고 건물이나 사람은 그것을 나타내는 표현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막힌 담을 허물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을 그리스도 안과 하나가 되어 화목하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그에 이어서 그리스도로 화목케 되어 육체로 할례를 받은 이들에게 이방인이라 칭함을 받던 에베소에 거하는 신실한 성도들이 이제는 성전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하나가 되면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육신이란 하나님의 의가 속 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본성과 같이 육신으로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의 본질입니다.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면 그 겉모습이 어떻던 그 존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것은 거하실만하기 때문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것은 그 곳이 하나님의 정체성에 부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자신의 존재 목적이요 삶의 의미라는 것이 순종이 되므로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거하시는 곳이 성전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곳이 사람의 심령 안이든, 쓰러질 것 같은 건물이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동시에 성전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한 유명한 말씀 중에 “너희 몸은 거룩한 성전”이라고 한 것도 궤를 같이 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 에베소서 본문에서 “건물과 건물이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라고 한 말씀은 결정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심령의 본성이 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고, 그 사람들이 서로 화평하므로 연결되어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간다고 말씀하신 것은 각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에 기초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앞서 교회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교회 건물을 지어 놓고 사람들을 모아서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니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하신 말씀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교회란 그렇게 되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교회가 세워지는 개념이 하나님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임을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속 심령에 본성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고, 하나님의 의가 속 심령에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하게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세상의 지식으로 교회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건물로서의 성전도 마차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라고 건물을 지은 것이 성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그 자체가 성전인 사람이 출입하고 거하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같은 이치로 그 생명을 가진 사람이 모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고, 그 의가 거하는 육신을 가진 삶을 살다가 그 육신의 장막을 벗은 사람이 가는 곳이 천국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거하던 육신을 벗고 나면 남는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의 그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 가려고 해도 하나님 나라에 속하게 되고 의의 본체이신 하나님의 품속에 거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안다면 이렇듯 천국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 우리 인생의 죽음 이후의 이치까지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개념이라는 것도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계속 설명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의 본질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고 그런 사람이 모이면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전하고 있고 모든 사도들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전끼리 만나서 성전을 이어가는 것은 성전인 각 사람이 서로 교통하게 되는 것이기에 그것이 서로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교제이고 교회의 기능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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