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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의 시대에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인지를 구분하는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그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신으로 이방인이었던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때에는’ 바울 사도가 성도라고 보증하는 신실한 사람들이 이방인(무할례당)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그 때’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라고 칭함을 받는 때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예비하신 것을 행하게 하시려고 예비하신 그 상태의 때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담을 허물어서 화평케 한 두 존재는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상태의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무할례당과 같은 상태로 있었던 사람을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화평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분명한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와 같이 이방인과 이방인의 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순종하므로 거듭난 새 생명이 가진 눈의 안목으로 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즉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생명으로 보느냐에 따라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허무신 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담을 허물었다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보이시므로 그것을 본 사람들이 순종할 수 있는 본이 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을 보이시려 피를 흘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시대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분이 육체의 할례에 있었고, 지금은 기독교의 교리를 지키려고 하느냐 아니냐가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 같지만 사실 같은 것입니다. 둘 다 육신이 그 구분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에 할례를 행한 것이나, 행위로 교리와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나 다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손이라는 것이 행위의 상징임을 안다면 간단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는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행위가 하나님의 벌을 유발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아 지옥에 간다는 것이 바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인데, 구원은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면서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그 황당한 모순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은 그 신앙이 바로 손 곧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생각, 육신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과 같이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서 의로워지겠다는 생각은 항상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 해도, 분을 참고 화를 내지 않으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즘 말로 넘사벽(넘는 것이 사실상 힘든 벽)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허무신 담입니다.


사람들이 육체에 할례를 행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려는 것과 같이 자기 육신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허물어지지 않는 담입니다. 그리고 인생 최대의 갈등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사람에게 화평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갈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로마서 7장에서 바울 사도가 고백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라고 한 것입니다.


그 갈등의 핵심은 스스로 세운 의의 기준, 곧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이 자신을 늘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하심이 그것입니다. 자신이 선과 악의 기준을 속에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과 같이 자신을 늘 심판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스스로를 심판하여 벗었다는 알았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담이 스스로 벗었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한 것은 자신이 먹은 선악과 곧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니 자신은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라고 육신으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갈아야 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육신이 흙에서 왔기에 육신으로 끝없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절대적인 벽이고 갈등이고 심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허무신 담은 그리스도의 경계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경계인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에 할례를 행하듯이 육신으로 노력하여 의로워지려 한 모든 것으로 허물지 못한 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것을 허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갈등에 화평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그렇게 갈등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다는 것으로 그 갈등을 이겨낸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가 담을 허물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아무리 의로워지려해도 넘지 못했던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보이셨기에 그것을 보고 그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순종하는 그 하나만으로 그렇게 넘지 못하여 이르지 못했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화평인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의로워지지 않는 행위뿐인 육신이 알고 보니 온전한 것임을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부정하게 여겼는데,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더할 나위 없이 부정한 존재가 되어 처형을 당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즉 이 육신은 행위가 무결해지는 것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지, 사람들 각자가 먹은 선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종과 같이 섬기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그것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선악과를 먹은 가치관이나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이 육신은 부정한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화평을 얻게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가 정죄함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정체성을 육신으로 보이시므로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이 그것을 순종하기만 하면 그도 그리스도가 되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허무신 담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화평을 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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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2:11-22) 누가 이방인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5. 28. 06:00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운명론적인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절대적으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목적은 존재 이전에 있는 것입니다. 집을 지으려는 사람이 가진 집을 지으려는 목적이 집이나 설계도 그 보다 항상 먼저이고, 집이 어떻게 지어지든 그것은 그 집을 지으려 한 사람의 예정하심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모르면 예정은 운명론적인 것이 됩니다.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구원할 사람을 객체로서 예정하셨다는 식의 말과 주장과 그것을 학문이라면 떠드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목적을 모르고 있다고 실토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정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삼느냐의 문제는 단지 예정론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하게 계시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다는 것은 예정하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하늘에 앉게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구원도, 죄 사함도 없을 뿐 아니라 육신으로 할례를 받았든 아니든 이방인입니다. 즉 이방인이냐 아니냐는 혈통이냐, 신약을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그 목적을 알고 그것이 삶의 목적과 본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때에는 육체로 이방인이요(엡 2:11)”라고 한 것은 에베소 교인들의 혈통이 유대인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없었기 때문에 이방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이 말씀 이전 10절에서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이방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이것은 알면서 이방인을 논할 때 하나님의 의가 본성과 생명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도무지 성경을 어떻게 보면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자기 기준으로 보니 그런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시대에는 이방인이라고 하면 당연히 유대인이 아닌 혈통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은 하나님의 복음이 유대인이 아니라 서구권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종교 프레임 안에 있느냐 아니냐가 기준입니다. 신학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교회에서 교리대로 세례를 받고 그 가르침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것이 아니면 유대인이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유게에 할례를 행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하는 것으로 할례를 행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 육신이 어떤 종교 프레임 안에 있느냐가 이방인과 하나님의 백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프레임이 육체에 할례를 행한 것과 같은 이유는 종교들이 바라는 것은 하나 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추구하는 바를 어떤 신에게 어떤 교리로 구하느냐의 차이일 뿐 모두 ‘육신’의 문제를 종교로 해결하려는 것이니 그것은 육체에 할례를 행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새로운 개념 같지만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사람의 창조 목적이자 우리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면서 스스로 자기 삶의 목적을 정하고 그 안목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은 목적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목표에 가까운 것입니다. 목표는 목적이 있고 정해져야 하는 것인데 목적도 없이 목표만 정하고 그것을 가지고 목적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보기 때문에 이방인의 기준이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하나가 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육신으로 유대인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혈통이 다르고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유대인과 동일하게 인정하는 것을 하나가 되는 것이라 여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혈통이나 육신의 모양이나 삶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이방인이라는 이 간단한 기준으로 사람을 본다면 언제라도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면 그것으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그리스도 안과 밖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는 이방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유대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으로 있었던 때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시기라고 2장 12절에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경을 보면서 누가 이방인인지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넣어보려고 계략을 궁리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자신이 가진 기준에 의하여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이방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저런 핑계 같은 이유들을 끌어와서 자신도 하나님의 백성이라 회칠하고 싶기 때문에 이방인이 누구인지 따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니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자신을 지배하는 것 보다 더 온전히 다스리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제 아무리 어떻게 자신을 채색해도 이방인입니다. 신학박사? 목사? 장로? 오히려 이방인의 증거인 신분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세우고 다시 사람을 모으고 그 안에서 제도로 인침 받은 신분이 육신으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사람은 자신이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압니다. 그것은 생각만 해 보면 아는 것입니다.(엡 2:11) 왜냐하면 피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이고 본성의 상징입니다. 남성의 DNA곧 본성을 가진 사람은 누구의 보증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남자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피로 그리스도와 가까워진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의 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그 십자가의 도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잉태되는 생명인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이 자기 안에 본성이 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전의 삶은 이방인의 삶이요, 거듭난 삶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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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너무 상식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도 그렇지만 상식이라는 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근간 중의 근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는 것을 안다면 생각보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설사 모른다고 해도 신앙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또한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적어도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고 기도하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그 하나만으로 이미 세상은 온전한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실수도 않으시는 신으로 믿으면서 세상이 문제가 많으니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과 그 경영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선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분명히 기준에 의하여 구분된 정의입니다.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어떤 나라에서는 선한 것이 어떤 나라에서는 아주 악한 것입니다. 테러나 전쟁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알고 하나님의 선함을 본다면 사람이 가진 선함의 기준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선함 이외에 도덕적인 관점, 사회 정의적 관점 등을 기준으로 선한 것을 규정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상용구 혹은 무정의 용어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쓰는 말만 온전히 알아도 신앙의 의문점은 상당히 아니 모두 없어진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셨으니 그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의 모든 ‘선함’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기준 그 하나뿐이라는 것, 그 하나만 온전히 믿으면 신학과 같은 것은 개밥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바울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이 기록한 서신들의 내용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단지 용어가 예전 이스라엘 시대의 언어적 개념과 그 시대 사건들에 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 표현이나 내용은 지금 아주 쉬운 용어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시절에 문자를 읽고 쓰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어려운 용어나 개념을 사용했을 리 없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정론이 그렇습니다. 바울 서신에 예정론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단지 목적이라는 것은 모든 구현된 것의 예정된 것이라는 정상적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치 안에 있는 ‘예정’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복잡한 이론으로 만들어서 예정론이 된 것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라고 하신 이 한 구절의 말씀 안에 성경의 모든 근간이 다 들어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아주 쉬운 말들뿐입니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선한 일’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주 하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선한 것인지를 생각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학교에서 배우면 됩니다. 학교는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선함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가진 선함이 과연 하나님께서 선하다고 여기시는 선함과 같은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의 내용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비인격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묵살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단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도살하듯 죽이시는 사건과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을 인간 존엄이 무시된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만 놓고 보더라도 선함의 기준은 당대에게 존엄성은 고사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잔인함이 되기도 합니다. 흑인 노예만 해도 그렇습니다. 미국인들이 흑인 노예를 사냥하듯 잡아서 자기 집에서 부리면서 그 흑인들이 차려 놓은 음식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즉 선함은 행동의 어떠함만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선함, 성경이 말씀하시는 선함은 지극히 하나님의 주관적인 견해입니다. 이것이 자기 마음에 시비 거리가 되거나, “그런 게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작은 논쟁, 선함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관적 기준이라는 이 하나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신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실한 자요 성도라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증함에 있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이 온전히 순종이 되어 모든 선함이란 그 하나님의 주관적 가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도란 선함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주관적 시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것이 이해되고 의문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보증이 아니라도 그것이 인정이 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엄청 어려운 것이 되거나 아니면 대충 시계추와 같이 교회나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의 삶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문에 쌓인 신앙생활을 자기 기준에 늘 부정한 자기 삶에 대한 죄책감에 대한 면책으로 여기고 살면서 막연히 그 삶이 천국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주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은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모든 선함은 하나님의 기준에 딸린 것임을 의심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만 분명하다면 하나님의 예정하심,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 구원과 의, 그 모든 것이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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