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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존재하는 목적을 지향하는 관점에서 능력의 어떠함을 논하여야 함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 특히 그것이 우리 인생들에게 나타나는 것에 관하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만드신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위하여 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연약하게 지으시고 난 다음에 다시 그것을 주신 것 이상으로 강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우선은 이해가 될 수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것이 되려면 동일한 가치를 가진 생명이 되어야만 합니다. 썩은 고기가 늑대나 하이에나와 같은 짐승들에게는 양식이 되지만 소나 양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과 같이 동일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보는 존재의 생명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 가치와 이해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그와 같아서 인생을 평안하게 살고 세상의 사람들이 이루지 못하는 성공이나 위대한 것을 이루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보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은 앞서 설명한 설명 앞에서 잠깐 이해하는 것 같다가도 돌아서면 다시 그것을 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생명의 거듭남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거듭나면 생명이 달라졌으니 같은 것이라도 보는 것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늑대가 양으로 거듭난다면 다시는 썩은 고기를 보고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능력을 말씀함에 있어 ‘마음의 눈’, ‘이름’과 같은 단어를 말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능력으로 알고 그것이 역사하려면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심령이 거듭나서 얻은 이전과 다른 생명이 가진 눈과 안목으로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알 수 있다는 의미이고, 이름이라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절대적 구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릴 뿐 아니라 그 살린 자들을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셔서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보다 뛰어난 이름 곧 정체성을 얻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의 권력보다 더 높은 권력, 세상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이라고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분명 성경을 신학적 접근으로 공부한 사람이거나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사람 그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 곧 구분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것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과 격이 다른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유일 신’에 대한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유일한 신은 하나님이라고 하면 다른 신들은 안 되지만 하나님은 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절에 다녀선 안 되고, 교회에 다녀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일한 신이라고 하시는 것은 인간의 존재 정체성을 정하신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른 신과 달리 하나님만 해결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신이라고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인생의 근원적 문제, 곧 존재의 목적을 일러 주시는 분이며, 창조주이신 것을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의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은 상대적 우위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시가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의하면 모든 권세와 능력 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 상대적 우위가 아니라, 능력이라는 것, 인생의 존재 목적 안에서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죽은 자리에서 목적 안으로 회복되어 생명 있다 칭함을 받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외에는 능력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우리 존재의 목적, 그것을 유일하고 가장 귀한 가치로 인정하는 가치관과 안목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거듭나서 다른 생명이 되지 않는다면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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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존재라도 존재하는 것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존재의 목적입니다. 존재하는 목적을 알면 그 용도와 행위와 의로움과 선과 악이 다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의 목적은 그 존재의 기업이며 능력이기도 합니다. 칼이 존재하는 목적은 자르는 것이기에 자르는 것은 칼의 기업이고, 능력이며, 칼에게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면서 궁리할 뿐 아니라 심지어 서로 죽이는 투쟁을 하면서 얻고자 하고 알고자 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존재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존재하고 난 다음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한 상태에서 스스로 정의내린 인생의 목적을 좇고 있습니다. 자식을 위한 삶이나, 예술이나 자신이 하고 있는 과업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생으로 존재하는 목적을 모른 체 인생으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한 후에 스스로 설정한 인생의 목적을 좇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예정하셨다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존재하게 된 이유를 예정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인생이 존재하고서 그 존재를 인식하게 된 다음에 있을 것을 본질로 보고 주목하다보니 그 세계가 어떻게 예정되었는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운명론적 예정론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도 소망도 모두 그렇습니다. 존재하게 된 목적을 알면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을 소망할 것이고, 존재하는 목적을 알면 그 목적대로 살 수밖에 없는 그것이 자신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기업이라는 것을 알 게 되는 것인데 그 하나를 몰라서 모두들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특정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물건은 그 목적 안에서는 다른 목적을 가진 존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쁘게 만들어진 유리컵은 비록 못을 박거나 공놀이하듯 던지거나 할 수는 없지만 좋은 음료를 담아 놓으면 심지어 감탄을 자아내게도 합니다. 이와는 반대지만 망치는 못을 박는 목적으로 존재하기에 못이 잘 박히는 것으로 또 감탄을 자아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능력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 존재 목적의 세계 안에서 발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육신의 능력이 물리적으로 강하거나 기능적으로 월등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연약하게 지어진 것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흔히 말하는 초능력의 세계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해서 병을 낫게 하거나, 오래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나,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것은 우리 육신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대하셨다면 그런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실 분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일 수 있는 능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연약하기에 소비되고 사용될 때 쉽게 상하는 우리 육신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허물어지는 것으로서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시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이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상하지도 않고 초능력으로 내려오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께 그것을 능력이라며 보여 달라고 하고 또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간혹 간헐적으로 그런 능력을 나타내거나 보이는 사람이나 상황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라고 여깁니다. 심지어 그런 능력에 의지하려고 기도원에 가서 헌금으로 채색된 비용을 지불하기까지 합니다. 또 기도원까지 가지 않아도 교회에서 부흥회라도 하면 역시 돈을 지불해가면서까지 그 능력을 맛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그 능력이 나타나는 존재, 또 그 능력을 나타내는 존재의 목적 안에 있습니다. 사람에게 초인적인 것을 목적하셨다면 분명히 사람을 하늘을 날고 바다 속을 맘대로 다니면 죽지도 않게 만드셨을 것입니다. 이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사는 기초 상식, 논리적 상식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은 오직 뜻하신 대로 사용하시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내실 때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형상과 의와 뜻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들이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란 그 아버지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그것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 안으로 부르시는 것이고, 인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육신이 아무리 멀쩡해도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은 모르고 자신을 인지한 후에 스스로 설정한 인생을 목적을 좇아 사는 사람은 열심히 살아도 생명이 없고 죽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관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 안으로 부르신다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목적의 관점 안에서 죽은 상태에서 생명이 있는 자리로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올바른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 사람이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에서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생명이 되었고,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의가 성전의 양식으로 표현되듯 우리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인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육신으로 표현되는 하나님 의의 총화가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즉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육신이 세상의 죄가 주장하는 것을 인하여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제물이 된다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초능력으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능력이 무엇이라도 오직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회복되는 것을 위하여 사용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목적을 나타내는 것에 필요하다면 나사로와 같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지만 그 궁극의 모습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예정하신 창조의 목적,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게 하시는 것,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지 않는 사망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생명의 자리로 옮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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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 영광스러운 일이 되려면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들 중에서 이루어 내었을 때입니다. 가장 흔한 예로 연예인들이나 운동선수가 상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세계는 그 상을 받는 것이 영광이라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치관에 따라 영광된 일을 정의하는 것은 어쩌면 자유지만 하나님 영광의 기준이 자신들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착각 이상의 오만입니다.


이러한 오만함은 우리가 오늘날 교회로 알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 단체의 근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영광과 동일하게 일반화한 프레임이 교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영광스러운 것을 하나님께서도 영광으로 여기신다고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맘대로 다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우상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은 분명히 기준이 있습니다. 어떤 것을 영광으로 여길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있어야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수상의 영예를 얻으려면 수상을 해야 하고, 수상은 상을 주는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은 육신의 수고와 공로에 대한 평가가 본질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영광은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도 분명히 명확한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는 일들은 상대적 영광이 대부분입니다. 서로 경쟁하여 얻는 것이 대부분이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수상자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이는 그 경합에서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떨어진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경합에서 이긴 자를 영광으로 여기신다면 그 낙오자는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영광스럽게 여기지 않으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고와 공로가 영광을 얻는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께서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기를 기도한다고 한 것을 바로 알려면 이와 같이 영광에 대한 가치관의 교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이 교정이지 생명이 바뀌어야 되는 것이므로 실은 거듭나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 생각하고 추구하며 이루었을 때 고백하는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세상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사람들이 수상의 트로피와 꽃다발을 들고서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면 세상에서 철저히 패한 패배자로요 사형수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도무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광의 기준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면 예수님도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보이시려면 그 십자가에서 내려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세상에서 실패한 예수님께 기도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조차 모르는 눈 먼 자들임을 알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기도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히시므로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려면 하나님께서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실 때 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전제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하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예정하심의 부르심을 받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속하게 된 성도라는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예정하신 목적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기업과 그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경쟁 구도와 그 구도에서 성공한 것을 상급으로 여기는 기준에 의한 수상을 하나님이 영광으로 여기신다고 여기는 것이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을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서 성공하므로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 기준에 순종된 자들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에 속한 자도 아니며,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자들도 아니며 실은 거듭나지도 못한 사망에 거하는 사람일 뿐인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올림픽에서 우승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은 올림픽 정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듯, 하나님의 영광도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날 때에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의와 뜻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의와 뜻을 나타내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육신 가진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이므로 우리가 그것을 나타내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기도하신 것이며, 그 영광과 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 이름으로 세상이 영광으로 여기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의 근원적인 뜻도 ‘나타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기업 안에 속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생 창조 목적을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표준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는 것에 소비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기준으로 상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같은 것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잠꼬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이신 그 뜻,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요, 존재 목적이요, 자신의 일이요 기업임을 아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계시고 주실 때만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는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 그 영이 이끄는 본능 안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며, 그 영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는 그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빈틈 없이 잘 꿰어져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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