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논할 때 특히 주목을 받는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분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모든 인생들은 이미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어떤 인생으로 살 것인지가 정해졌다고 보게 됩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것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a man의 삶은 이미 창세전부터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그런 것인가?’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 무엇이든 문자 그대로 보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예정도 문자 그대로 a man의 운명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사람들은 흔히 ‘운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삶은 이미 정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모든 인생들을 그렇게 정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전도는 왜 하러 다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다 정해 놓으셨지만 그것을 알도록 알려야 한다고? 그럼 하나님은 자신이 정한 사람이 스스로 알게 할 능력이 없는 분이시거나 괜히 사람을 시험하시는 분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러한 운명론적 예정론이 성경의 기본 말씀과 근본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운명론적 예정론이 사실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선악과를 만드시고 선택의 여지를 두셨다는 것도 항상 의문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운명론적 예정론대로라면 아담이 따 먹을 것을 아셨어야 하는 것이고, 그럴 값이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사람을 시험하느냐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명성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은 각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양에 대한 것을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정하신 정체성을 자기 삶의 목적이자 의미요 본성으로 순종하는 사람은 그 예정하신 뜻 안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그 뜻에 순종하여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을 살았다고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산자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예정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예정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 사도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 사도도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요일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 1:1)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말씀은 바로 ‘로고스’는 계획, 즉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과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은 만드시기 전에 먼저 뜻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표현되니 세상이 되고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이 가지신 뜻, 그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세상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로서 나타나니 그것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고 계획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예정의 유일한 본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개인의 삶과 운명이 예정되었는지를 관심을 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계획을 순종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정한 인생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선악과를 두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정녕 죽는 것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의 진정한 내용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생명의 여부는 하나님이 정한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늘 예로 들었듯 시계가 시각을 알려주지 못하면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의 예정이 태초, 곧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정해진 것이라는 것도 너무 밝게 열리고, 또한 우리가 어떤 예정하심 아래 있는지도 분명하게 열리며, 바울 사도가 또 성경이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며 그 하나님을 함께 우리라고 부르는 것이 진정한 성도요 그리스도를 주를 섬기자요, 또 그리스도와 형제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 그 하나를 아는 것만으로 그렇게 왈가왈부하는 예정이라는 의미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마가복음 74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9. 4. 28. 21:17 Writer : 김홍덕

모든 계명의 첫번째, 그것을 알려면 먼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것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이 유일하게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인생의 목적을 가지신 이가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올바른 신의 개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미디어 말씀 파일 > 마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가복음 76  (0) 2019.06.23
마가복음 75  (0) 2019.05.12
마가복음 73  (0) 2019.04.16
마가복음 72 -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0) 2019.03.24
(마가복음) 포도원 비유  (0) 2019.03.11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 중에서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예정론>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우리를 택하사…”(약 1: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약 1:5)과 같은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는 것에 있어 예정하셨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구원할 자를 선택했다.”라는 논리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그럼 선택받지 못했다면 믿어도 소용없네?”라는 반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대화가 명쾌하지 못하다면 말을 한 사람이 불분명하게 했거나 아니면 듣는 사람이 자기 맘대로 해석했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충돌에 있어 하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해결책이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틀린 말을 하실 리 없다.’라는 것까지는 믿는데, ‘하나님은 사람이 알기 쉽게 말씀하셨다.’는 믿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아리송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정론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이 큰 받침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육신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지고 하나님의 예정을 논하는 것에 있습니다. 육신을 본질로 본다는 것은 줄곧 이야기하고 있는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도 눈에 보이는 세계를 예수님께 미끼로 던졌는데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육신의 일이 잘 되면 하나님의 복이고, 육신이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어렵게 되면 벌이라는 생각, 그래서 육신이 평안히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영광이라는 생각은 육신이 신앙의 본질이고 척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나 사도들의 삶이라는 것은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육신을 본질로 보는 이들이 예수님께 기도하고 사도들의 말을 좇아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육신의 평안을 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고 하니 그마저도 육신의 삶의 단위를 예정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각각을 하나의 예정하시는 객체로 보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택하지 않으셨다는 식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어떤 사람이 택하심을 받고, 또 어떤 사람이 택하심을 받지 않았는지 분석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어이없게도 자신들이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하나님께서 택했다고 정의내린 사람의 삶을 좇아가는 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a man에 관한 것이 아니라 the Man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특정한 어떤 사람이나,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 어떤 습관을 가진 사람, 어떤 신앙적 신념을 가진 사람, 어떤 신학적 수준이 있는 사람, 어떤 신비한 능력을 일으키는 사람 등으로 특정되는 한 개인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육신을 본질로 보는 안목을 가졌기에 그것을 예정하신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바울 사도는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성도라고 한 사람, 신실한 자라고 한 사람, 하나님을 함께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을 예정하셨다고 하였지, 어떤 특정된 사람을 예정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성경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예정하셨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을 인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예정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정은 어떤 정체성 곧 the Man에 관한 것이지, a man을 예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만 알아도 이것은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창조 목적을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자기 인생의 본질이 된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우리를 예정하사…”에서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예정이나 계획이라도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예정도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예정됨이 증명되는 것이지, 아무 것도 실현되거나 나타난 것이 없다면 예정은 그저 몽상일 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라고 칭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나올 때 비로소 그 예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형상을 표현하는 자니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시고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정체성이라고 순종한 사람들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받는 은혜를 입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사람인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