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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 낯선 그리스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1. 27. 16:41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언제나 구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믿고 신학으로 어떻게 정의하든지 그것과 무관하다는 말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이 아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증거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땅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또 그리스도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문장을 믿는 것만으로 예수를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그 문장 하나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내어주는 엄청난 일로 바로 잡으려고 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과 일치 되었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타당한 생각인가?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원을 쉽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이란 사람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존재 목적대로 회복되어 사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가장 쉽고 평안하며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다르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서 그 가치관을 바로 잡아야할 정도 사람이 자기 목적을 회복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고,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심도 그것이다. 예수님이 쉽다고 하신 예수님의 짐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대로 사는 짐이기 때문에 쉬운 것이지, 그 과정은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통을 지나야만 했다.

 

예수님과 육신의 삶을 공유하며 직접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을 보면 이 문제가 쉬운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 마주하고 함께 했으며 인류 역사상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그런 과정 없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바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제자들의 낯설음을 필수적인 신앙 과정이나 관문이라고 표현하여야 하는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낮아지는 예수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느냐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 누구도 낮아지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는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문장을 믿는 것만으로 사람이 낮아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고 순종하는 일은 없다.

 

이 격차와 간극,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기 전과 순종하고 믿는 그 간극이자 높아지는 세상의 가치를 좇다가 세상사람 모두가 멸시하는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는 그 사이 간극에는 절대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서 여러 장의 글로 설명한 <성령>이 그것이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 사람이 높아지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세상 모두가 멸시하고 천대하는 낮아지는 것이 본성이 되는 법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이나 또 이런 글에 관심이 없는 사람 누구라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고 순종하는 과정에 아무 걸림이 없었고 그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육신으로 와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어서야 비로소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적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만 있다면 자신이 낮아지는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자기 삶 안에 넘치고 넘친다. 그럼에도 그것을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안데르센 동화일 뿐이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뭔가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육신에 좋지 않은 일을 당할까 염려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것이라고는 자식의 성공과 사업의 성공과 가족과 자신의 건강이다? 그렇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성공과 평안은 세상 가치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자기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그럼 에덴동산 곧 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니 당연히 구원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고의로 낮아지려고 삶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성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사울 왕이 맘대로 제사 드리는 것을 징계하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괜스레 수도생활 한다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신부나 수녀나 중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의지로 낮아짐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징계의 대상일 뿐 아무런 신앙적 가치가 없다.

 

또한 낮아져야만 좋은 믿음이란 이야기도 아니다. 세상에서 사는 모양은 어떠해도 상관없음을 아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성령이 임하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중에는 제자들과 바울 그리고 초대교회 집사들과 같이 순교한 사람들도 있고, 빌레몬이나 루디아와 같이 부유한 사람도 있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할례당이라는 것을 버리지 않은 유스도라는 사람도 있었고,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 삶을 헌신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런 다양함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이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삶이 어떻게 이끌리든지 순종하므로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자기 맘에 드는 것을 정하고 하나님께 그런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떼쓰고 노력하는 것 역시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목사나 선교사를 한다고 자신이 뜻을 정하고 그것을 간구하고 노력하는 것은 다 부질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징계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므로 거듭난 것이 아니다. 본성은 생명의 논리고 생명은 나는 것 이외에 존재하게 되는 법이 없다.

 

이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는 목사다 신부다 수녀다 혹은 예수 열심히 믿는 사람이라 칭함을 받을지 모르나 실상은 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본성이 자기 안에 없고,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까지 건너게 한 간극을 건넌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간극을 마주하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너무 낯설고, 자신이 사람으로 가지고 있었던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가치를 어찌할 줄 모르는 심각한 혼돈이 있고,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그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스스로 아무리 부인해도 할 수 없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기억 속에는 낮아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말씀 앞에 정말로 어찌할 바 몰라서 죽을 만큼의 고민과 곤고함과 갈등의 세월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욥이 그랬고, 하박국과 같은 선지자가 그랬고, 바울 사도가 그랬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신 제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오늘날도 그 선진들의 여정과 같은 삶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의 심령이 그렇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신이 세상에서 낮아지는 존재라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낯설고 어찌할 바 모르는 세월과 그 세월을 지나 성령께서 오셔서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솟아나는 것이 멈춰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거듭남과 구원이 없다는 말과 가깝다. 거듭났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 애쓸 이유도 없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그런 삶이 아니라면, 또 낯선 그리스도를 만난 적 없다. 그러면 당연히 낯선 그리스도, 낮아지는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할 것이다. 노력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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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하였듯이 사람들의 그리스도는 높아지는 자이자 사람을 높아지게 하고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진 자로 만드는 존재다. 반면에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다. 사람들은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앙망하지만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 안에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2:36)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이 그렇게 낯설었던 베드로 사도의 설교다. 이 설교를 인하여 삼천 명이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는 유명한 설교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였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이며, 이전에는 높아지는 것이 그리스도라 믿었던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을 때, 믿는 사람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은 모든 기독교 신앙,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모든 신앙의 뿌리 중의 뿌리요 근간 중의 근간인데 사람과 하나님의 생각이 이와 같이 다르다. 그리고 달랐던 사람이 높아지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낮아지고 낮아진 예수님이 자신의 그리스도가 되는 결정적 전환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이 오심으로 일어난 기적이다. 단 한 명의 예외 없이 높아지는 것을 가치로 여기는 사람들 중에 낮아지고 낮아져서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되는 가치관은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기에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가장 온전하고 위대한 기적이다.

 

또한 우리가 그렇게 신앙하며 지키고 살려고 하는 성경은 바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착각이고 그들의 착각처럼 예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그렇게 높아짐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사람에게 알리려 기록된 것이 성경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중요하다. 어떤 존재를 그리스도 곧 메시아요 구원자로 인정하고 믿고 순종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높아지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에 의해 죄인이 된 예수를 구원자로 보는 것과, 자신을 세상의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자를 그리스도와 구원자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자,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자기 안에 이루어졌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며, 자신의 구원과 성령 강림과 충만을 결정하는 핵심적 기준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성경이 그렇게 수없이 말하는 거듭남과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거듭난 생명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자신의 구원자로 믿을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안다는 것은 죄는 자신이 지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고 그렇게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의 격에 맞게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게 하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관을 가진 자들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 예수님만이 자신의 구원자인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게 믿음이고 그것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에 순종한 사람이고,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성취된 사람이다.

 

이 믿음과 순종은 단지 세상 사람들은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는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선 글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다르다는 것은 구원을 받아야 하는 형편, 곧 수렁과 죄와 사망과 위험과 어두움이 다르다는 의미다. 세상의 더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아는 사람에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자리는 낮고 천하고 가난하며 실패한 자리다. 하나님께 그런 자리에서 벗어나기기를 기도한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세상의 가치관에 매몰된 사람들이 벗어나기를 바라는 그 자리로 가서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구세주로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얻어야 할 구원은 가난이나 실패가 아니라는 고백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없이, 아니 오히려 그것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이를 그리스도로 믿으면서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10) 도적일 뿐이다. 당연히 그것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들은 거짓 목자요 거짓 그리스도일 뿐이다.

 

낮아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낮아지고 실패하는 것이 구원을 받아야 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이 비참해지는 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보이신 구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면 절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의 성공을 구하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볼 수 없다. 예수님이 보이신 구원의 본질을 알고 나면 그런 것들은 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구원의 삶을 살다보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본능으로 안다.

 

따라서 어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느냐는 단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종교적 이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지배하는 원리의 문제다. 삶의 목적과 삶의 의미에 관한 문제라는 것이다. 삶이 실패로 가는 것에서 구원해 주시는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믿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의 삶에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비중은 아주 낮다. 사실 비중의 어느 정도냐는 것, 얼마나 중하게 여기느냐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삶의 실패라는 상황은 이미 삶의 일부분이다. 그 부분을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역시 삶의 일부분이라는 증거다. 그것은 비중이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일부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 육신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다. 그래서 아들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 법과 결을 같이 한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육신이 된 말씀이 옥합이 깨어지므로 향유의 향기가 넘쳐나듯 육신이 깨어짐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가지신 하나님의 의와 뜻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향유옥합 사건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항상 전해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라는 의미는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십자가로 갈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본성이 하나님의 사람을 지으셔서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을 나타내심이다. 즉 세상에서 이기는 것을 의로운 것으로 여기고 그런 사람의 의를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그 의를 추구하려는 육신의 욕망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람의 그릇된 가치관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정도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보이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죄를 다 보이시니 그것을 본 사람이 찔림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 곧 인생의 진정한 존재 목적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과 세상의 높은 곳으로 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자신은 죄인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 고백을 이끌어낸 예수님의 말씀 곧 십자가에서 육신이 상하심으로 물과 피로 드러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생명이 되게 하시므로 사람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고,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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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헬라어다. 고대부터 사람의 직임 중에 높고 귀한 직임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어 그 직위를 부여했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히어로도 그에 해당된다. 그리고 육신의 여러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 속에서 구원해 주는 존재를 그리스도라 여기고 늘 그들의 도움을 앙망한다.

 

이와 같이 사람들 생각 속 그리스도는 자신이 벗어나고 싶은 문제 속에서 구해주는 구원자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필요한 상황은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다. 문제는 어떤 상황을 구원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느냐다. 그것에 따라 구원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과 사람의 인식이 다르다. 상황의 인식이 다르니 그리스도의 정의도 달라진다. 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그리스도인지는 문제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원과 도움이 필요한 문제는 육신에 관한 것이다. 가난과 질병 그리고 국가와 민족의 상황에 따른 정치적인 문제와 같은 거시적이고 역사적 문제도 있고, 취업이라는 절박함, 개인의 건강과 사업 같은 개인별 문제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문제 해결을 구하는 것을 육신의 정욕에 쓰려고 구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런 것은 사람에게 어떻게 필요한지 이미 다 아시고 들풀도 먹이신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나 권위를 해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먹는 것, 입는 것과 같은 육신의 필요에 대해 알아서 하시는 분이다. 자기 목적을 위하여 만든 사람을 위해 준비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4:3)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육신의 문제 해결을 구원이라 여기는 사람들의 그리스도는 당연히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해 환호하던 사람들이 그랬다. 옥합을 깨어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붓는 모습을 보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이 그랬다.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했던 사람들이 그랬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그랬다. 그리고 다르지만 성령이 오시기 전 제자들도 그랬다.

 

무엇보다 오늘날 아니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리스도가 바로 이 그리스도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사람들의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천국에 가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그리스도도 이 그리스도다. 도대체 천국에서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왜 필요한지 전혀 알 수 없는데도 그것을 소망한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 분명한데 오늘날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기독교 계통의 모든 종교가 이 근간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육신이 가진 가장 근본적 문제인 가난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신의 소임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는데 교회나 성당이나 유사한 신앙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더 큰 문제까지 안고 있다.

 

신앙을 떠나 일반적인 상식만 가지고 생각해도 자신이 겪고 있고 벗어나고 싶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는 혹 믿었던 그리스도가 문제 해결은 고사하고 그 문제의 최고봉인 죽는 자리로 스스로 간다는데 그것도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된다는데 그 그리스도가 낯설지도 않고 용납하기 어렵지 않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생각없이 예수님을 믿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당연히 십자가를 지러 가겠다는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믿고 있는, 자기 육신의 문제 해결을 기대하고 구했던 그리스도가 아님에 당황해야 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되는 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구세주가 이해되지 않느냐다.

 

그것이 낯설지 않다면, 둘 중 하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가룟 유다의 후예다. 특히 내가 기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니 가룟 유다처럼 종과 같이 취급하여 버린다면 희망이 없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신앙이 바로 예수님과 하나님을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종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이들은 자신은 구원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모든 어려움을 들어주리라 생각하겠지만 미안하게도 예수님을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도깨비 정도로 생각하는 이상 구원도 거듭남도 없다. 그 세계에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16:1-3)

 

이와 같이 육신의 문제 해결을 신앙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사실 세상의 가치로 좋은 것을 얻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긴 자가 되는 것이 곧 문제의 해결이란 의미다. 그렇게 높고 이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그리스도는 항상 높은 곳에 있다. 성경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는 것도 높은 강대상에서 해야 한다 여기고, 신학이라는 이상한 학문의 세계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더 하나님의 말씀을 안다고 생각한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을 학문으로 공부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인데 그 세계에서조차 높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이야기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말씀의 진실성을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이다.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에서 초라한 꼴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예수는 높은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도무지 그리스도가 아님에도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이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 가치관과 뿌리와 DNA가 같은 높아지려는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서 이기고 높아지고 평안하게 기도하면서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이런 외식과 기만은 제자 이후 모든 세대에서 항상 같은 모양이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높이 있고, 세상에서 세상의 법과 가치에서 이긴 자를 그리스도라 여기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신학이나 세상의 성공이라는 경력이 없다면 그리스도에 모르는 것이라 일축한다. 그들의 심령에 있는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그리스도고 예수님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라고 한 그리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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