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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그리스도와 성령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1. 15. 12:26 Writer : 김홍덕

이 글()의 주제는 <낯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다. 성령께서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형상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조금만 솔직하게 생각해보면 성령에 대하여 많이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상대적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들을 수 없고, 그나마 듣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예수를 열심히 믿게 만드는 일과 같은 것이 거의 전부다.

 

하지만 앞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여 사람에게 기적을 보여주거나 행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 아니심을 설명했다. 성령의 기적이라면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아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하시는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본질적이고 가장 큰 기적이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 삶의 형성한 존재가 아니기에 자기 존재의 목적을 스스로 알 수 없는 절대적 어두움에 있는데 그것을 해소하고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것 이상의 기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a christ)가 된다. 그래서 거듭남을 말씀하실 때 물과 성령으로거듭난다고 하신다. 물론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는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아니면 그것을 사람에게 알게 할 수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스도라는 존재가 가진 생명 본성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먼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시고 표현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님을 통해 보이셨다는 것이 예수님을 바로 만나는 것이다. 이것은 문장으로 표현해 놓고 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도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하게 한 생명 본성을 가지고 있고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존재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이신 것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자칭)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진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 성령을 논하기 전에 예수님도 온전히 만나지 못한 어두운 사람들일 뿐이다.

 

성령은 신앙에 있어 예수님을 바로 만나는 다음의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하고, 그 대가로 성경을 지키는 자기 행위를 드리는 장사하는 자들은 성령이 오실 바탕도 안 된 사람이다. 성령이 오시려면 낮고 낮은 십자가를 지는 자리로 가신 예수님이 세상의 창조주요 통치자인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명의 제자들은 이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목욕한 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가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그리스도라는 자기 믿음에 반함을 확신하고 예수님을 하찮은 종의 값에 팔아 버렸다. 부인하고 싶겠지만 오늘날 자칭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가룟 유다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과 성령의 능력을 자기가 바라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종과 같이 여기는 것이다. 가룟 유다가 종의 값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버린 것이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으로 잉태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온전히 자기 심령에 심겨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 심령에 하나님이 뿌리신 씨고 성령은 그것을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신다는 말씀에 매우 혼란스러워 했지만 그들 속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아주 천한 자들과 함께 하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는 나사렛 사람이었음에도 그 분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이 심겨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려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성령이 오실 수 있다. 성령은 그리스도에 누가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바른 순종이 있는 사람에게 오시는 분이다. 이것은 성령의 관점에서 보면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신다고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이다. 자신들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마음을 가진 베드로였기에 갈등은 있었지만 성령은 오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겪은 갈등의 필연성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와 동일한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갈등을 겪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갈등은 겪는 이들에게는 심히 곤고한 고난이지만 이것은 마치 출산의 고통 같아서 겪지 않고 온전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런 과정이 없다면 당연히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듯 세상에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내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면 반드시 제자들이 마주했던 낯선 예수님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 고난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심판이 될 것이다. 특히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신앙을 가진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는 큰 심판의 말씀이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이것의 심각성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육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확실한 믿음이 자신 안에 있는 사람이 마주한 생경한 세상과 예수님을 인하여 곤고한 이들에게는 정말로 소망의 말씀이 될 것이다.

 

알고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의 많은 선지자와 사도바울과 같은 사도들도 이 심한 고난의 시간을 다 지났다.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심판하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자신이 행위로 심판 받는 세상에 있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던 욥이 그랬고,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 왜 악이 관영한지 알 수 없었던 많은 선지자들이 그랬으며, 하나님 아들이 왜 십자가를 져야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은 당연했고, 자기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하건만 자신은 왜 세상과 죄의 법 아래 있는지 너무 곤고했던 바울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 같이 큰 변화를 보여주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하여 바로 아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는 고백을 했고, 하박국 선지자는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듯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자신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 할 것이라고 했고, 제자들은 오순절이 지나자 돌변하여 그렇게 낯설었던 예수님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낮은 자리로 갔고, 바울 사도도 오히려 자신이 죄와 사망의 법이 다스리는 세상에 속했다는 것이 자신이 정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쁘게 전했다.

 

이런 모든 변화가 바로 성령의 일이다. 그리고 성경이 이것을 전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존재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바로 알고 난 다음에 그것이 자기 생명이 괴도록 성령이 역사하시기 전 힘든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을 제자들과 성경의 선진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바로 보이지 않는다. 욥의 고난이 대표적이다. 성령이 오시지 않은 관점에서 욥기를 보면 욥의 고난 끝에 온 몇 배의 축복에 주목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 위함인 관점에서 보면 욥의 모든 고난은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에 합당한 자격시험이고, 육신의 축복이 고난의 목적으로 둔갑한다. 또 베드로의 배신도 그냥 소심하고 비겁한 배신일 뿐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7, 8장에서 보여준 돌변하는 고백은 이해조차 할 수 없다.

 

제자들과 신앙의 선진들이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낯설음과 그것을 이겨내게 한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도 엄연히 존재하는 일일 뿐 아니라, 성령 충만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의 성장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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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성령을 육신의 한계 이상의 능력을 주관하는 영으로 본다. 성령이 도우시면 육신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 가능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고, 성령의 능력이라면 방언이나 치유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보는 관점도 동일하다. 오순절에 성령이 오시니 방언이 터지고 삼천 명이 회개했다는 표면적 사건만 보고 성령은 곧 기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성령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생각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목적 외의 일이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한 위().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행하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성령도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신 창조의 뜻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이 만든 사람 그 이상의 일을 능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각하시는 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가지게 하시는 분이다. 영이시니 사람 안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하나님 아들의 본성대로 살게 하신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때 사람을 연약하게 만드시고 나중에 오시는 성령은 연약한 육신을 기적을 행하는 능력 있는 존재로 만드시는 모순의 하나님이 아니다.

 

오순절 제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정체성,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심을 보이셨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이 말씀한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부활 이후에도 몇 날이 못 되어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며 땅 끝까지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1:8)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14:17)

 

성령은 진리를 알게 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성령이 오시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예수님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당연히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다.

 

성령이 오시기 전에 알 수 없었던, 왜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즉 진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라는 말이다. 제자들에게 낯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것이 진리라는 것까지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아울러 성령이 충만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장성함에 이른다는 말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성령이 충만하면 암 환자를 낫게 하고,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제 아무리 대단해도 결국은 사랑에 비할 바 아님을 바울 사도가 말씀했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이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 12:30,31,13:1)

 

사랑이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일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것은 내가 행위로 지은 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벌을 대신 받아서가 아니다. 십자가가 사랑인 것은 나에게 예수님이, 또 하나님의 의가 의미가 되었고, 그로 인하여 내 삶의 의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니 사랑인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을 알게 되면 내 삶이 의미 있어 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기적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다. 성령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분량이 장성해지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와 판단 기준으로 이겨서 피라미드의 위로 올라가는 것이나, 바벨탑과 같이 높아지면 선해져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라는 생각이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이겨서 선한 분이라고 여기는 신앙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성령이 알게 하시는 모든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능력 그 이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속심령에서 생명이 되어 자신도 그리스도로 거듭난 증인, 삶 자체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며, 하나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사람들이 알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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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성령께서는 삶의 형편과 질과 같은 형식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정확히 성령의 직임이 그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께서는 삶의 목적,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시킨다. 평생을 살아도 왜 사는지 알지 못하고, 어느 날 철들어서 보니 사람으로 살게 된 자신을 보존하고, 육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귀하다는 것을 무작정 좇으면서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매일을 살다 또 다른 어느 날 왜 사는지, 무엇 때문에 살았는지 모른 체 죽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비참하고 어두운 삶을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으로 바꾸시는 이가 성령이다.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정하신 것이고, 그 정하신 뜻이 육신이 되면 어떤 모습인지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 이들의 심령에 심긴 사람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그 사람의 육신이 되게 하셔서 그 사람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생명 있는 삶이 되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의 임금보다 더 높은 존재’이므로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지 왜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제자들이 성령이 오시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는 말씀은 정말로 온전한 것이다. 다만 이 온전함이 오늘 이 시대의 사람의 것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서 그 제자들의 일을 전하신 것은 우리 역시 제자들의 그 변화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분명하다.


제자들에게 어느 날 완전히 낯선 모습이 되신 예수님이 성령이 오시므로 예수님의 그 모습이 이해되는 것을 넘어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되신 일을 보이신 것은 오늘 우리 역시 그렇게 되어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제자들의 그 변화가 없는 삶이라면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인생이라는 의미다. 방언을 받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살고 있는 자기 삶의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이다.


삶의 목적이 회복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가치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에 순종하게 된다. 이것은 정말로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이 본질이 아니라고 다짐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자신을 다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짐하고 다그치며 금욕적인 절제를 한다는 것은 이미 그 가치를 안다는 의미다. 알고 있지만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과, 그것이 가치 없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게 바로 생명의 차이다.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는 생명은 하나님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가치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처음 생각한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아들은 세상에서 높고 지배적인 존재라는 가치관에 심판 받아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을 가장 귀하고 의로운 것으로 보시는 가치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거듭나게 한 사람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그 가치관과 같다. 그게 정상이고 상식이며 선이다. 거듭났다는 것은 생명이 바뀌었다는 것이고, 생명이 바뀌었다면 그 바뀐 생명이 자기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 본성을 가진 것이다. 그렇게 본성이 바뀌었는데 세상의 가치를 참고 견디고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생명은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에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굳이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본성이다. 


그러니까 유혹을 이기려 기도하고 노력하는 신앙은 거듭나지 않은 신앙이다. 하나님과 가치관이 다른 존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인정하지 않는 존재다. 그것이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는 의미다. 이와 같이 분명한 생명의 법, 생명으로 났다면 굳이 노력이 필요 없다는 것에 순종되지 않는다면 교회를 다니던 목사든 아무 상관없다. 구원도 생명도 없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소망도 없다. 생명의 본성으로 볼 때 자신은 노력하는 생명 없는 자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정말로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과 같이 처절하고 간절한 회개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예수님의 제자들의 일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성령을 받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자기 생명 본성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Have to에 해당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목적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도 모르는 존재가 존재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 의미 없다.


성령, 예수님의 제자들을 변화시킨 그 성령을 받으려면 선행되어야 하는 일이 있다. 예수님과 같이 원래부터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죄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제자들과 같은 갈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가치를 좇아서 살았는데, 그 가치에 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보다 귀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인정하려 한다는 것은 우리가 육신 가진 인생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심히 낯설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인생의 형편이 달라지지 않는지를 인하여 미치도록 갈등하고, 하나님을 미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데 왜 세상의 법이 항상 나를 죄인으로 만들고 패자로 만들어 초라하고 심지어 비참하게 만드는지 그 이유를 몰라 잠 못 이룬 밤이 없었는데 성령을 마주할 수는 없다. 성령은 바로 그런 갈등을 해소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치지만 그런 갈등조차 없다면 성령께서 알게 하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없다는 의미다. 즉 성령이 생명이 되게 할 것이 그 속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조차 모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삶이 어떤 형편과 모양이라도 그것이 온전한 것임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자기 삶에 문제가 있어 개선해야 하고 더 나아질 것이 있으니 그것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자기 삶이 온전하지 않다는 증거다. 그것은 만족이 없는 것이다. 에덴동산(만족의 동산)에서 쫓겨 난 사람이라는 증거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이 없다는 존재다. 오늘 자신이 그렇다면 자신이 죄와 사망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어두운 사람이라는 고백부터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아무 의미 없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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