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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본질적으로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은 사람인 존재에게 의미가 있어져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성경을 대하는 각 개인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드러났다는 것 역시 오늘 우리 자신의 이야기, 우리 자신의 사건과 삶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이 아니라면 성경을 믿을 이유가 없다.

 

흔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나는 다른 존재라고 말하는 것을 당연한 겸손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 아니라면 예수를 믿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TV보는 것과 같은 여가생활도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를 몰라도 다들 교회에 가고 헌금도 하는 등 삶의 일부를 투자해야 하는 일인데, 그런 투자를 해 가면서 예수님 같이 될 것이 아니라면 그건 인생 낭비다. 그러니까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거나, 자신은 이 세상 살 동안 예수님과 같아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교회에 다니는 것은 그냥 어리석은 인생낭비라는 의미다.

 

물론 여기에서도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 같아진다는 것의 의미다.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는 것이 중요한 핵심이다. 이것은 사실 <그리스도 안>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은 예수님 같이 물 위를 걷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자신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같아진다는 것은 바로 앞서 열거한 것들이다.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나와 같은 존재가 되라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에게 립서비스나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따라 오라고 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그래야 하고, 무엇보다 따라 갈 수 있는 존재며, 예수님 가신 길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를 대하는 우리의 마지막 여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끝이 아니라 거기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즉 우리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십자가를 지는 낮아지는 존재인 그리스도라는 존재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는 것의 목적인 것이다.

 

물론 시작은 이 글에서 많이 설명한 것과 같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을 나의 이야기로 받지 않는다면 육신을 가진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가 될 여지가 없다. 육신 가진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라는 것을 믿지 않는데 육신 가진 인생이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다. 시작부터 믿지 않는데 그 다음은 논점조차 되지 않는다.

 

육신을 가진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다들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냥 예수 믿으면 하나님 아들이 된다고 믿는 것과, 육신 가진 인생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의 언어다. 사람 이상의 능력을 행하는 존재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육신을 초월한 존재다. 그런데 육신으로 사는 자신이 그리스도가 된다고 믿는다는 것은 완전한 모순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했는데 교회에 다니면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식의 믿음은 거짓 목자들의 감언이설이지 복음이 아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약속대로 그 믿음은 이루어진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는 존재로 창조하셨으니 그 피조물인 사람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데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는 없다. 그것이 거짓이라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거짓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이 그리스도가 되는 존재이기에 육신 가진 자신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사실상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시작이다. 그것이 하나님 세계가 창조되는 것이다. 물리적 세상의 창조가 아니라, 자신이 살던 세상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곳이라고 새롭게 열리는 존재로 자신이 재창조되므로 세상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그 시작이 있고나면 본격적인 신앙의 여정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아담에게 말씀하셨듯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계속되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존재로 살 수 있는 존재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존재가 나면서부터 사람이라는 존재로서의 온전함과는 또 다르게 사람으로서의 자람이 또 있다. 예수님께서 성인으로 오시지 않고 말구유에서 나시고 자라시면서 더 은혜로워졌다는 것을 말씀하심이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기까지 자란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심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4:13)

 

이 글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본 <낯선 그리스도>는 사실 여기서 만난다. 쉽게 이야기하면 육신인 인생이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낯설지 육신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신앙 여정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가 낯설지 않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믿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낯설게 다가와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가 이것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바로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든 황금마차를 타고 가시든 어차피 모르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가진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라는 것을 믿지 않으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든 황금마차를 타고 하늘로 가시든 어차피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과 다르니 단지 노력할 뿐이라는 사람은 결코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낯설 일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 갈 때는 낯설음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께서 목욕한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기도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자기들과 함께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던 자신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그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고백하고 나서 오히려 예수님이 낯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욥의 고난과 바울 사도의 고백과 궤를 같이 한다고 몇 번에 걸쳐 설명하였다.

 

그것이 낯설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하는 존재인데 어떻게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이해할 수 없는 낯설음과 괴로움도 우리 각 사람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렇게 되어 보자라는 시도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일이다. 이 과정이 없다면 당연히 성령의 오심이 없고,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니 성령 충만도 없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언감생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이 낯설어야 한다고 많이 설명했던 것이다.

 

정말로 육신을 가진 자신이 하나님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가 된다는 믿음을 얻게 되면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때껏 하찮게 여긴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이 내용이 된 형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 아들로서 살게 되었는데 그것이 기쁘지 않으면 하나님의 편이 아니다. 그것은 실로 기쁜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아주 존귀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기에 스스로 느끼는 존귀함도 예사롭지 않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본성이 되었으니 그 보다 귀한 존재가 또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그 귀함에 걸 맞는 대우를 세상에서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임금이 되고 자신들은 그 좌우에 앉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김치국부터 마시는 오지랖처럼 다들 생각하지만 그것은 주제를 모르는 생각이다. 아직 육신을 가진 자기 인생이 예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위하여 지음 받았다는 믿음도 없는 주제에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가진 제자들을 반면교사 삼듯이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로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된다면 이 제자들의 일도 당연히 자신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로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기에 그에 상응하여 세상에서 높아지고 좋은 대우를 받으며 또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모두가 굴복할 것이라 여기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낯선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이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세월을 겪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놀라운 반전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 세상을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만유의 주제이신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는 가장 귀한 것을 받고 그 내용을 보니 그것은 어이없게도 세상에서 가장 천한 자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구걸하듯이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만유의 주제이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삶이 된 존재인데 사람들은 오히려 무시하고 이단시하기까지 하는 욥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황스러움은 겪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을 겪어보면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베드로가 비겁해 보이는 모습으로 빌라도의 뜰에 갔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왜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까지 다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낯선 그리스도를 만나므로 알게 되는 일이다. 그렇게 성경이 나의 이야기, 나의 사건이 되었을 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받아서 속을 보니 세상 가장 낮은 자리로 가는 본성이라는 반전과 같이 또 다른 반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령이 오시는 것이다. 당연히 성령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 그래서 육신을 가진 자신이 그리스도가 되기 위한 존재며,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며, 그 아는 것의 귀함에 심취했지만 그 내용이 세상에서 낮아지는 생명 본성이라는 것에 당황스러워 혼돈스러운 사람에게 오시는 것이다.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성령을 생각하고 앙망하는 것은 여기에 비할 것조차 아니다.

 

결국 그렇게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약속과 같이 이 모든 비밀이 자기 안에서 열리는 것을 넘어 자기 안에서 계속 넘쳐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 나의 사건이 되어야 하는 푯대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나의 그리스도가 되는 사건이라는 의미다. 그것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다. 따라서 그것이 나의 사건이 되지 않는다면 인생은 헛것이다. 존재하게 된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나의 이야기, 나의 사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내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가 되는 사건 없는 인생이라는 의미다. 그것은 그냥 헛되고 헛된 것일 뿐이다. 삶의 모양이 어떠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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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십자가를 지신 낯선 예수 그리스도는 어쩌면 오늘 우리 신앙 여정에서도 반드시 만나야 하는 분일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는 듯이 쉽게 말하고 또 쉽게 자신은 그 예수님을 인하여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모든 사건이 완결된 성경을 대하고 있기 때문이지 자신이 그 과정을 다 거쳐 내었기 때문이 아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자신의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죄인이 되어 처형된 분이 자신의 구세주라고 믿는 것이다. 성공과 평안을 가치로 여기는 세상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어떤 형태로도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세주가 될 수 없는 존재다. 그런 분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구세주로,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평안을 얻고 성공하는 것이 자신의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세상에서 살 동안 평안하기를 구하고, 또 육신으로 도모하는 일의 성공을 도와주시기를 바란다는 것이 정상이냐의 문제가 있다. 양심과 상식 그리고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특히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죄는 예수님께 세상에서 이긴 것을 선과 하나님 은혜로 아는 가치로 볼 때 예수님은 미달이었기 때문인데 그 예수님께 자기 육신의 삶의 평안과 성공을 구한다는 것은 지극히 파렴치한 짓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이 과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안과 성공으로 대변되는 세상의 가치를 얻는 것이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믿음이다. 이 믿음을 가졌다면 육신의 수고스러움과 가난으로 인한 불편, 피라미드 꼭대기가 선이라는 세상의 가치 앞에 초라해진 자신을 서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을 인하여 서럽고, 그 자리에서 구원 받는 것을 구원의 문제나 예수 믿는 대가로 여기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아니다. 이것을 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세상 가치를 가지지 못한 서러움을 벗고 싶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하나님께 기대한다는 것은 구원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구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을 좇는 세계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세계로 세계가 바뀌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로 보면 천지창조의 사건이고, 복음으로 보면 거듭난 것이다. 세계가 바뀐다는 것은 물리적 세계가 바뀐다는 것이 아니라 여상한 세상을 살지만 전혀 다르게 인식하므로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생명이 바뀌는 것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구세주 그리스도라고 믿는다는 성경의 대 명제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곤고한 것으로 여기며, 어떻게 하면 오늘보다 더 나은 육신의 삶을 누릴 것인지를 고민하고, 그 괴로움에 겨워 자신이 부유하지도 평안하지도 않은 이유를 가까운 사람의 탓으로 원망하는 삶을 살면서 그 괴로움을 위로해 주시기를,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삶을 바꾸어 주시기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구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커녕 오히려 욕보이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인 것이다. 당연히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구원이 있을 리는 없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문제나 종교적 범주의 사안이 아니다. 이것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자기 삶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육신으로 겪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법 안에서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준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곤고함은 단지 존재가 목적을 위하여 소비되는 과정의 열화일 뿐 죄도 아니고, 벌은 더더욱 아니다. 당연히 벗어나야 할 구원이 필요한 자리도 아니다. 이러한 인식과 순종이 자기 안에서 도저히 멈춰지지 않을 때 비로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생각할 때,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에 대한 어떤 구원인지 생각지도 않고 성급하게 자기가 벗어나고 싶은 문제나 자기 힘으로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천국 입성과 같은 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어서 사람을 구원하시겠다고 생각하실 때는 사람이 처한 어떤 상태에서 사람을 구하신다는 분명한 뜻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생각 있는 존재로만 인식해도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게 보면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는 하나님이 아시고 준비하신다고 하셨으니 그것이 부족하여 겪는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다. 그리고 천국이야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니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산다면 어쩔 수 없이 그 속에 거할 것이니 따로 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쉽게 자기의 것인 양 생각할 것이 아니다. 자신이 정말로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찾고 있는지, 자신이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 반대급부로 육신의 정욕을 구하는 것은 아닌지 확인할 일이다. 그런 신앙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들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란 육신 가진 존재를 만드시고 그 안에 거하시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함이고, 그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성품은 육신을 드려 서로를 높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랑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고, 서로를 높이려면 자신이 낮아져서 종과 같이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이들이 생각하듯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생명으로 나서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이고, 성령이 생명으로 잉태케 하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전체적으로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양심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좇아서 그 힘을 의지하여 자신도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본성으로 거듭나서 그러지 않으려 해도 낮아지는 본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는지를 말이다. 그 본성이 없다면 그것은 당연히 구원이 없는 것이고, 그것을 찾지 않는다면 소망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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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 낯선 그리스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1. 27. 16:41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높아지는 그리스도를 언제나 구하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여기고 어떻게 믿고 신학으로 어떻게 정의하든지 그것과 무관하다는 말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셨다는 것,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이 아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증거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이 땅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또 그리스도를 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문장을 믿는 것만으로 예수를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그 문장 하나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내어주는 엄청난 일로 바로 잡으려고 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의 생각이 하나님과 일치 되었다고 믿는다는 것인가? 그리고 과연 타당한 생각인가?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원을 쉽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이란 사람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존재 목적대로 회복되어 사는 것은 모든 존재에게 가장 쉽고 평안하며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다르게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아들을 그리스도로 보내서 그 가치관을 바로 잡아야할 정도 사람이 자기 목적을 회복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신 것이 그것이고, 나더러 주여, 주여 부르기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심도 그것이다. 예수님이 쉽다고 하신 예수님의 짐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대로 사는 짐이기 때문에 쉬운 것이지, 그 과정은 십자가라는 엄청난 고통을 지나야만 했다.

 

예수님과 육신의 삶을 공유하며 직접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을 보면 이 문제가 쉬운 것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 마주하고 함께 했으며 인류 역사상 누구보다 먼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던 제자들이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그런 과정 없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바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제자들의 낯설음을 필수적인 신앙 과정이나 관문이라고 표현하여야 하는지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낮아지는 예수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었느냐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 누구도 낮아지는 예수님을 처음부터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는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문장을 믿는 것만으로 사람이 낮아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고 순종하는 일은 없다.

 

이 격차와 간극,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기 전과 순종하고 믿는 그 간극이자 높아지는 세상의 가치를 좇다가 세상사람 모두가 멸시하는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거듭나는 그 사이 간극에는 절대적인 요소가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앞서 여러 장의 글로 설명한 <성령>이 그것이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 사람이 높아지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세상 모두가 멸시하고 천대하는 낮아지는 것이 본성이 되는 법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이나 또 이런 글에 관심이 없는 사람 누구라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고 순종하는 과정에 아무 걸림이 없었고 그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육신으로 와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어서야 비로소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가 구원을 받는다는 결론적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낮아지는 것이 본성인 그리스도로 거듭날 수는 없는 것이다.

 

양심만 있다면 자신이 낮아지는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는 자기 삶 안에 넘치고 넘친다. 그럼에도 그것을 시인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안데르센 동화일 뿐이다.

 

교회에 가지 않으면 뭔가 하나님께서 벌을 내려 육신에 좋지 않은 일을 당할까 염려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세상에서 낮아지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것이라고는 자식의 성공과 사업의 성공과 가족과 자신의 건강이다? 그렇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성공과 평안은 세상 가치로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자기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그럼 에덴동산 곧 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니 당연히 구원도 없다.

 

물론 그렇다고 고의로 낮아지려고 삶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성이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사울 왕이 맘대로 제사 드리는 것을 징계하신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괜스레 수도생활 한다면서 자신을 학대하는 신부나 수녀나 중과 같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의지로 낮아짐에 도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징계의 대상일 뿐 아무런 신앙적 가치가 없다.

 

또한 낮아져야만 좋은 믿음이란 이야기도 아니다. 세상에서 사는 모양은 어떠해도 상관없음을 아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성령이 임하고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중에는 제자들과 바울 그리고 초대교회 집사들과 같이 순교한 사람들도 있고, 빌레몬이나 루디아와 같이 부유한 사람도 있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할례당이라는 것을 버리지 않은 유스도라는 사람도 있었고, 바울의 사역을 돕기 위해 삶을 헌신한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사람도 있었다. 이런 다양함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이자,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삶이 어떻게 이끌리든지 순종하므로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이 자기 맘에 드는 것을 정하고 하나님께 그런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떼쓰고 노력하는 것 역시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목사나 선교사를 한다고 자신이 뜻을 정하고 그것을 간구하고 노력하는 것은 다 부질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징계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니라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므로 거듭난 것이 아니다. 본성은 생명의 논리고 생명은 나는 것 이외에 존재하게 되는 법이 없다.

 

이와 같은 사람은 세상에서는 목사다 신부다 수녀다 혹은 예수 열심히 믿는 사람이라 칭함을 받을지 모르나 실상은 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본성이 자기 안에 없고, 하나님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 까지 건너게 한 간극을 건넌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간극을 마주하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너무 낯설고, 자신이 사람으로 가지고 있었던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가치를 어찌할 줄 모르는 심각한 혼돈이 있고, 그리고 성령이 오셔서 그 갈등을 해소하고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는 스스로 아무리 부인해도 할 수 없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기억 속에는 낮아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말씀 앞에 정말로 어찌할 바 몰라서 죽을 만큼의 고민과 곤고함과 갈등의 세월이 있을 수밖에 없다. 욥이 그랬고, 하박국과 같은 선지자가 그랬고, 바울 사도가 그랬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신 제자들이 그랬다. 그리고 오늘날도 그 선진들의 여정과 같은 삶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의 심령이 그렇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로 거듭난 자신이 세상에서 낮아지는 존재라는 사실이 몸서리치게 낯설고 어찌할 바 모르는 세월과 그 세월을 지나 성령께서 오셔서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솟아나는 것이 멈춰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다. 그것은 거듭남과 구원이 없다는 말과 가깝다. 거듭났다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려 애쓸 이유도 없고,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다. 따라서 그런 삶이 아니라면, 또 낯선 그리스도를 만난 적 없다. 그러면 당연히 낯선 그리스도, 낮아지는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할 것이다. 노력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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