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성령 - 성령충만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1. 6. 15:51 Writer : 김홍덕

생명은 나면서부터 온전하다. 그리고 자란다. 정체성은 온전하고 모든 본성이 완전히 갖추어진 존재로 태어난다. 그리고 자라면서 그 속에 내재된 본성이 자라며 충만해진다. 이것은 상식 같지만 영적으로는 중요한 견해다.


‘성령 충만’이라고 하면 성령이 강제적인 역사와 같이 생각한다. 전혀 예수에 대하여 알지 못하던 사람에게 기적적으로 성령이 임하셔서 이전에 없던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 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성령의 충만 이다. 성령이 사람을 그리스도라는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로 나게 하시는 분이시니 성령의 충만은 당연히 그 생명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잉태케 한 생명의 자라고 왕성하며 충만해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그 속에 없는데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사람을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되게 하시는 분이라는 이해와 믿음은 사실 지금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희박한 개념이다. 정확히 그들 세계에 없는 개념이다.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기에 노력한다는 사람,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을 신학이라 명명된 학문을 익힌 사람이 더 풍성하게 가졌다는 개념을 가진 이들은 성령과 하나님의 법을 생명의 법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앞서서 생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온전하게 나는 것이지 태어나서 팔다리가 붙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나면 거듭 날 때 이미 그 속에 충만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온전하게 나는 것이지 그것을 성경 지키는 노력으로 보완하고, 자기 안에 없기 때문에 무지한 것을 공부로 만화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신학에 입각한 교리에 기초를 두고 성경을 지켜서 더 온전해 질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성령이 생명이라는 개념은 없는 것이다. 성경은 지켜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본성대로 살아가는 그것으로 이미 성경을 다 지키는 것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은 그런 존재다.


성령의 충만은 것은 이와 같이 온전하게 난 생명이 자라면서 더 풍성하고 왕성하며 장성해 가는 것이다. 갓난아기보다 청년의 사람다움이 더 왕성하고 풍성하며 충만하다. 성령도 육신의 그러함과 같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함에 이르기까지 자라는 것,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푯대를 향해 가는 삶이 충만함이다. 더 이상 주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것, 하늘의 천사를 불러 군사를 물리칠 수 있지만 육신이 된 하나님의 의가 가진 생명 본성이 주관하므로 그럴 수 없는 삶과 같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쓰도 그럴 수 없게 되는 것이 날로 많아지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이다.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생명으로 난다는 것이며 생명으로 난다는 것은 날 때부터 생명이 가진 모든 온전함을 가지고 난다는 것이다. 성령이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은 그 생명 본성이 장성해지고 왕성해지며 자라서 충만해지는 것이다. 비유는 달리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생명과 본성이라는 법을 벗어나서 성령의 임하심과 충만함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형편과 형식의 변화가 아니다. 생명이 가진 본성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성령의 강림과 충만은 우리 삶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바꾸는 것이다. 당연히 형식은 내용에 종속된다. 형식은 내용의 표현이다. 본질은 내용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강림하고 그 강림한 성령이 충만해지는 사람은 삶의 형식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바뀌고 그 바뀐 목적이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더 풍성하고 충만해진다. 놀라운 것은 그것을 스스로 본다는 것이다.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자기 삶을 이끄는 것을 자신이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향상되고 나아지기를 바라는 육신의 형편과 삶의 질은 삶의 모습이고 표현된 현상이다. 그 삶은 아브라함, 다윗, 빌레몬, 루디아와 같이 부유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오네시모와와 같이 예수를 믿어도 종이기도 하며, 사도들과 같이 육신의 목숨을 복음 앞에 내어 놓기도 한다. 이렇듯 성령이 강림하고 충만하다고 해서 모든 삶의 형편이 사회적으로 또 세상의 가치고 높고 평안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 아니 모든 종교인들이 자기 신앙을 통하여 세상의 가치로 높고 평안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 반한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한 삶의 형편과 형식은 이렇듯 다양하다. 다양하지 않고 모든 기독교인들의 바람과 같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높아지는 것이 훌륭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외면하면 안 된다. 세상 가치로 높고 평안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다가 얻어지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 생명으로 불어 넣으신 그리스도의 생명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고 예비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천부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씀이다.


우리 삶이 다양한 것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생명 본성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 다양함 중에 어떤 것은 축복이고 어떤 것은 저주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먹은 선악의 기준에 의한 것이고 세상의 가치 기준에 의한 것이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 삶의 다양함은 또한 하나님의 풍성함이다. 다양한 그 삶들 중에 사람들의 욕심과 같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는 어떤 것만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축복은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던 삶에서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각양의 삶이 각자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 성품의 다양성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사는 인생은 거듭나면서부터 온전한 것이며 성경이 오신다고 육신의 형편이 세상의 가치로 향상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충만해진다는 것은 그 생명력이 충만해진다는 의미다. 성령의 충만은 신비한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이 그 삶을 주관함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성령 - 성령충만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1. 4. 15:15 Writer : 김홍덕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낳고 낳는 세계다. 생명의 세계라는 말이다. 생명은 억지로 하거나 노력하거나 신념을 가지고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이끄는 대로 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이 생명은 육신의 호흡이 아니라 존재하는 목적을 이루면서 살면 생명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는 목적 관점에서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그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시는 영(靈)이다.


생명이 기계나 조각물과 다른 것은 안에서 밖으로 자라고 작동한다는 점이다. 또 외부에서 입력된 명령이나 조작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의에 대한 생각과 본성을 따라 움직인다. 행함과 살아가는 이유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이고, 밖에 있다면 생명이 아니라는 의미다. 또 사람이 만든 기계나 조각이 더 커지려면 밖에 무엇을 붙여야 하지만 생명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자란다. 기계나 조각은 움직임의 이유와 방법과 동력이 자신 밖에 있지만 생명은 자기 안에 있다. 그것을 본성 혹은 DNA라 한다.


하나님의 세계가 생명의 세계라는 것은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된다. 성령으로 그리스도가 잉태된다는 것,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경을 지켜야 하는 자기 밖의 이유가 있어서 지키는 사람이 자기 본성대로 사는데 성경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성경을 지키는 이유와 동력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다.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죽어서 천국가기 위해서 성경을 지키고,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까 하는 자기 밖을 넘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이유를 둔다.

 

물론 오지 않은 미래의 축복을 기대하면서 성경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면 미래, 곧 내일은 자기 것도 아니다. 괜히 하나님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자기 힘으로 난 것도 아닌 주제에 내일 일을 목적과 자기 삶의 이유와 동력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 권세에 대한 월권이자 도적질이다.


생명이 본성을 좇아 행동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나면서부터 온전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사람이 날 때부터 사람으로서 온전하다. 살면서 사춘기가 되면서 팔다리가 붙는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온전하다. 그 날 때부터 난 것이 자라면서 점점 능숙하고 온전해진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어른이 되는 것도 자기 안에 있는 본성과 유전자에 의한 이끌림이지 밖에서 어른이 되게 하지 않는다. 자라는 것과 노력하여 성취하는 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특히 그 노력이 본능과 존재 정체성과 목적을 넘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낮아지는 것임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보이신 것과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을 살았다고 말씀하신다는 의미다. 따라서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생명 본성이 아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날 때(났다고 주장한다고 치고)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생명이 없는 존재라는 의미다. 따라서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바라며 성경을 지키는 노력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기에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이 살았다고 여기지 않는데 생명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 성령이 생명이 되게 하신다는 것,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온전한 생명으로 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이니 그 자람이 있을 것이다. 생명으로 났다는 것은 그 생명이 가진 본성대로 살아간다. 그것이 자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삶을 채워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이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장성함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바울 사도가 에베소서에서 말씀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라고 했는데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된 온전함이라는 것이 속에서 넘쳐나는 생수 같은 본성과 같은 것이다. 즉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 바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라 된 온전함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마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나 불가사의적인 일을 행하는 능력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하여 완전히 무지한 것이다. 성령은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고, 성령이 잉태케 하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존재의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살았다고 하시는 것이며 그 살았다는 기준인 사람 존재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낮아지는 십자가를 통해 보이셨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함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속에 있는 성령의 충만은 성령께서 잉태케 한 생명이 충만하고 풍성해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삶이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살아감이 날마다 풍성해지는 것이다. 곧 낮아지는 삶, 자기가 옳다는 주장 앞에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는 일이 갈수록 풍성해지는 그것이 바로 성령의 충만함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 있어서 가장 힘든 일은 어떤 것일까? 그냥 생각하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일, 곧 신앙을 가지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일일지 모른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져야하는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봐도 그렇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만날 때는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에 그저 따라 갔다. 예수님도 조건 없이 오라고 하셨고,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힘들어 한 고민 같은 것은 없이 따라 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는 예수님도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도 하시고. “나를 만지지 말라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말씀도 하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도 십자가를 지러 가는 예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자신이 제자들과 같은 고민을 해 봤는지의 반문해 봐야 한다. 성경이 괜히 제자들의 일을 기록하고 그들의 혼란과 고민이 성령이 오시므로 해소되는 사건을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결국 오늘 나를 위한 말씀이고, 나를 위한 말씀이라는 것은 내가 그 과정을 거쳤느냐 반추할 수 있도록 선지자와 사도와 제자들을 통해 그 여정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오늘 우리가 제자들과 같은 그 깊은 괴로움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성령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신학적 고민이나 통성기도나 금식기도 하는 간절함을 제자들의 괴로움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육신의 일, 세상의 일 그리고 교회나 예수 믿는 신앙이 세상 가치로 인정받거나 의미 있어지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하나님의 관심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이미 천부께서 다 아시고 주신 일인데 자기 육신의 정욕에 쓰려고 구하고 매달리는 것일 뿐이다. 다시 한 번 설명하면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니 노력하는 노력의 고민이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 그리고 그와 궤를 같이 하는 크고 화려한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의와 무관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의 형편이나 도모하는 일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살펴 주시며 함께 하시니 운전할 때 사고 나지 않게 잘 돌봐 주신다고 여기는 생각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흥부가 받은 박씨를 받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거듭나고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고 육신의 형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육신의 형편이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정말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곧 육신의 삶의 형통함을 가져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그것을 담보하시는 것이 그의 사랑이자 은혜라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물론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순교한 모든 이들은 다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항상 죄인이었다. 세상의 주인이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자기 육신이자 삶이 된 고귀한 존재였음에도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걸하다시피 했고 종과 같이 섬기며 수고했다. 높아지는 것을 세상의 선과 의로움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 와 보라”며 예수님께 한 멸시와 천대를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이 없는 것이고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없는 증거다.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하늘의 군사를 부를 능력이 있지만 십자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예수님과 같이 아무리 애를 쓰도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반대로 하나님을 믿으니 같은 일을 해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잘 될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당연하고 좋은 믿음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없는 인생일 뿐 신앙인도 그리스도인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상 앞에 육신의 일을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상 숭배라는 것이다. 자신이 만든 하나님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인생의 형편을 바꾸지 않는다. 바뀌는 것은 인생의 목적과 가치다. 그리고 목적과 가치를 추구하는 법이 바뀐다. 행위로 노력하는 법에서 생명의 법, 곧 생명이 가진 본성에 이끌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살 수밖에 없는 법 아래 거하게 된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수 없이 언급했다. 그 삶으로 거듭나기 전 가장 곤고하고 괴로운 것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는데 육신의 삶이 예수님의 가치만큼 달라지거나 높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러 간다는 예수님이 그렇게 낯설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 여정에서 아주 어려운 과정이다.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 가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다. 가려고 해도 오지 못한다고 하셨을 정도다. 그런 자리로 가는 것,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대로 따라 가려면 성령이 도우시는 것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따라서 육신이 죽을 때까지 제자들의 곤고함이 없는 신앙의 여정을 지나지 않는다면 성령을 받지 못한 인생이다. 


그러므로 아직 자신의 삶이 또 신앙이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는 예수님을 인하여 심히 괴로웠던 제자들과 같은 괴로움이 없다면 아직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의 임금보다 더 나은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게 세상의 가치고, 세상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 낮아지는 예수를 인하여 괴롭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그러함을 시인해야 한다. 그것이 회개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