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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성령이 오시면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0. 31. 15:51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높아지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을 보는 것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높은 존재로 보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자신 역시 세상에서 높은 사람이라고 여기거나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니 세상의 임금 이상의 대우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예수 믿으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 성공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DNA가 같은 생각이고 믿음이다.


즉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하고 기도하며, 화려한 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고 육신의 삶의 질이 세상 가치로 상승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기는 관점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 세상의 임금보다 너 높은 자리와 권세를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기도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증명한다. 예수님께 육신과 세상의 일을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가치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그런데 이 모순을 외면하고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구한다는 것은 극도로 파렴치한 모습이다.


사람들이 가진 이 외식적인 신앙이자 일반적인 신앙은 비단 기도와 간구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한다.>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그런 말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잘 살아야 한다.’, ‘모범적이어야 한다.’와 같이 기독교인들에게 아무렇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문율에 가까운 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 = 세상 모든 가치에서 높아지는 것>이라는 등식이 진리가 되었다는 증거다. 물론 안타깝게도 기독교인은 이 문제를 모른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어두움>의 본질이다.


이런 사람들의 어두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신 빛을 만나 밝아지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그런데 이 밝음이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이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구원과 거듭남이 없는 사람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상태가 이런데 정작 자신은 교회에 가서 세례문답 등을 통해 자신이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문제가 개선되려면 문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괜히 자기 죄(어두움과 존재 목적에 대한 무지)를 시인하면 죄를 사하신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제까지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이가 성령이라고 알던 사람이거나, 방금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며 기도하고 간구한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그런 모습이 어두움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누가 베드로와 제자들만큼 예수님을 잘 알겠는가? 그런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낯설어하며 힘든 시절을 거쳐서야 성령이 오셨는데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가, 예수님이, 하나님이 단 한 번도 낯설지 않고 줄곧 자기 생각과 같은 신인데 성령이 오실 리가 없다.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소망하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 가치와 도덕과 법으로 높은 지위에 이르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아버지의 피조물인 사람들의 가치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잘 수밖에 없는 낮아지는 생명 본성을 보이셨는데 그것이 낯설지 않다? 그것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의 삶일 수 있나? 그럴 수는 없다. 이런 낯설음과 회개가 없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뇌까리고 그것을 증명한답시고 생명 본성에 관한 법을 학문을 만들어 합리화한 무덤을 칠하는 횟가루에 자기 영혼을 의지할 수는 없다. 그것은 구원도 거듭남도 없는 것이다. 성령? 오시기는커녕 성령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성령이 오신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돌아봄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낯설어야 한다. 예수님이 낯설다는 것은 낮아지는 예수님이 눈에 들어왔다는 의미다.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께 늘 세상에서 높아지는 것을 추구하던 사람이 죄인이 되어 낮아진 예수님, 곧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면 낯설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이것도 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실리 없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이 곧 죄와 사망이다.


성령을 기다린다면, 아니 정말로 구원을 받은 영혼이 되고 싶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이니 세상의 임금보다 높은 존재며 그에 상응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제자들과 예수님 당시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오늘 자신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고백되어야 한다. 그것은 Have to 같아 보이지만 양심과 상식만 있으면 되는 일이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 가치로 높고 높은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 가치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낮아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높은 존재로 본다. 사람들의 그 가치관과 안목을 바꾸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이 오셔야만 되는 일이며, 성령을 그 일을 위하여 오신다. 그 바뀐 안목과 가치관은 생명에 있다.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다. 물론 그런 변화는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성령에 대한 말씀의 본질이다.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 베드로 - 두 가지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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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성령이 오시면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0. 29. 13:02 Writer : 김홍덕

제자들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는 세상의 임금 이상으로 높은 존재인 만큼 당연히 세상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욥은 하나님은 행위로 사람을 판단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적어도 하나님을 사람의 행위대로 복주고 벌주는 신이라 믿는 빌닷과 소발과 엘리바스와 같은 이들에게 멸시는 받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육신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모두 변했다. 욥은 엘리후의 책망과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이후에 자신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므로 죄와 티끌 가운데서 회개한다고 했다. 바울 사도는 “누가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해줄까?” 신음했는데 특별한 계기 없이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완전한 반전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령을 인함이라고 설명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지 못하여 괴로워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그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온전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전할 뿐 아니라, 그것은 전하는 것에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일어난 이런 변화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이고, 성령의 강림이다. 암 환자가 수십 명씩 치유 받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사람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령이 오시면 성경에 대한 의문이 없어진다는 말씀이다. 성령이 오신다면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한 의문이 없어진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신앙과 관련하여, 예수님을 믿는 삶과 관련하여 의문이 있고, 알지 못함을 인하여 곤고함이 있고, 자기 삶과 또 사람들의 삶을 보며 ‘왜 그런가?’라는 의문이 있다면 성령이 오시지 않은 것이다.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다. 본성은 노력하지 않는다. 생명은 자신이 생명인 것을 의문스러워하지 않는다. 생명이 없기에 의문스러울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안다’라는 개념도 도움이 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안다’는 지식이나 머리로 아는 것이나 이해가 아니다. 자기 안에 그럴 수밖에 없는 동일한 이유가 있어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말한다. 체휼되었을 뿐 아니라 생명이 자기 본성을 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에 대하여 또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 역시 같다. 예수님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자기 안에 그 말씀의 의와 생명이 있어서 화답하는 것과 같다. 수가성 여인에게 “네 속에서 생수가 넘칠 것”이라고 하심도 같은 맥락이다. 이것을 알면 신학(神學)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우롱하는 것인지 분명해진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이 임한 사람은 성경을 넘어 세상과 삶을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 본성이 된 사람이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다. 귀하고 귀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지,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온전하게 알지만 세상에서의 삶, 육신의 형편과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것이 왜 달라지지 않는지 그 분명한 이해가 자기 안에서 나온다. 성령이 오셔서 그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생명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렇게 알지 못한다면 성령이 오시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남도 없다.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오늘날 신앙인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은 사람은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정상이고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착하게 살고 성경을 지켜서 자신들이 생각한대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런 자신들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자신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대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도록 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그것을 믿음이라 여기는 한편 자신들의 목표치에 이르기 전에 겪는 힘든 과정을 하나님의 시험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신의 삶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의 척도로 삼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즉 외식하는 신앙의 산물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바로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로 하나님 아들의 권세와 지위에 맞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가치로 심판 받아 낮아질 뿐 아니라 죄인과 같이 오히려 육신을 섬기고 수고하는 것에 내어주는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도록 하시는 능력이다. 성령이 오시면 그것이 자기 본성이 된다. 성령께서 그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이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능력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다. 본성은 생명이 가진 고유한 것이므로 당연하게도 생명이 바뀌는 거듭남이 아니면 바뀌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아 성경 속 하나님의 사람들과 제자들이 성령이 오시므로 겪은 변화가 자신에게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도 잘 되어야 하는데 왜 자신이 그렇지 않은지 답을 얻는 과정은 실로 괴롭다. 어쩌면 이 괴로움을 겪지 않으면 성령이 오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고, 욥과 바울 사도의 모습도 그랬다. 개인적인 경험 역시 그렇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살면서 이 과정을 지난 사람을 만나는 것도 힘들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이고 아직 세상이 하나님께 멸망당하지 않았으니 그런 사람이 세상에는 많겠지만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성령에 대하여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오순절 성령 강림이 보여준 결과는 사람들이 성령에 대하여 아는 것과 전혀 다르다. 사람들이 아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과도 다르다. 기적을 일으키고 방언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본질이 아니다. 그런 현상은 부속적인 것이고 현상의 일부지 성령의 본질이 아니다. 성령은 예수님에 대하여 알게 하시는 영이고, 하나님의 의가 내 속에서 생명이 되어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되게 하시는 영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 오순절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못 박히는지를 밝히 알게 하신 성령이 자기 심령에 오셨다면 성경은 의문스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밝히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을 공부해서 알려는 사람, 기적으로 성령을 체험하려는 사람은 이 성령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이자 보혜사 성령께 그런 본성은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바로 성경과 삶에 대한 의문이 없어진다는 의미다. 그게 아니면 다 거짓 영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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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 성령의 능력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7일간의) 낯선 그리스도 Date : 2020. 10. 26. 21:47 Writer : 김홍덕

성령의 능력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변화시키는 힘이다. 이 변화를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사실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개념에 가깝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세상에 없는 것이므로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하신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니고데모다.(요 3장)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이 어떻게 나이 들어서 모태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는데, 이는 니고데모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거듭난 사람이 아니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사람에게는 없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하여 어둡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생각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이라고 하면 불치병을 고치거나, 망할 수밖에 없는 사업이 전혀 알 수 없는 도움으로 회생하는 것과 같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언이나 신유, 예언, 환상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성령의 능력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신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문자적 의미로서만 맞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가 성경과 다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피조물인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가장 본질적인 것, 곧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피조물인 사람이 스스로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이시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 목적,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한 목적을 알지 못하는 존재에서 알게 되는 것이 사람으로 변한다. 그것이 성령의 능력이다. 이렇게 변한 사람,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육신의 삶의 목적이자 본성이 된 사람을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 즉 생명이 있는 존재로 보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의도대로 된 사람만이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글에서 목적적 관점에서 생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였다.


성령의 능력을 이와 같이 사람이 피조물이기에 스스로 알 수 없는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을 일컫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성령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즉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성령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육신으로 행할 수 없는 현상과 능력과 신비를 성령의 능력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모른다는 말이고, 성령의 능력을 모른다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이니 구원도 거듭남도 그리스도의 생명도 없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오해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육신은 눈에 보이지만 육신의 존재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왜 사는지 모른다. 그러나 목적 없이 존재하게 되는 실존은 없다. 사람이 목적 없이 만드는 물건이나 형성시키는 이론이나 생각이 있는가? 그런데 정작 사람은 자기 육신의 존재 목적은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본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것을 그것을 기준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영광은 모두 육신의 일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믿고 이해한다. 그래서 육신이 평안하면 복을 받았다 여기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기신다 생각하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고 육신이 바라는 바가 뜻대로 되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런 신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에 성령의 능력 역시 그런 문제를 기적적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볼 뿐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하나님의 의를 아는 생명으로 잉태되게 하시는 것임을 생각지 못한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 그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갈등을 겪은 제자들의 변화로 나타났다. 그 뿐 아니다.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전환되는 바울 사도의 갈등도 성령을 인함이라는 것을 8장에서 밝히 말씀하고 있다. 욥도 같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인하여 자신이 겪는 것과 같이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아는 욥의 인생이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죽을 만큼 힘들어 했던 자신의 모든 푸념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 역시 베드로와 제자들 그리고 바울 사도에게 나타난 성령의 능력과 궤를 같이 한다. 



성령을 인한 변화들

 하나님을 아는데 왜 육신의 삶은 곤고한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육신의 삶을
 평안과 축복으로 변화시킨다고 생각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었구나!

 베드로와 제자들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라면
 높임을 받아야 하는데
 왜 낮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가?

 예수님이 보이신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본성이 바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였구나!

 바울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데
 왜 육신은 죄와 사망의 법인
 세상의 법에 종속되는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세상의 법과 무관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이런 모든 성경의 일들은 결국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 역시 성령으로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어야하기에 성경으로 전해 주신 것이다. 오늘, 아니 어느 시대라도 성경을 통해서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고 그 말씀을 믿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생명과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사람 스스로의 가치관이나 힘이나 생각이나 철학이나 신앙이나 믿음으로 알 수 없는 존재의 목적을 깨달은 이전과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다. 그 의와 뜻은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가지신 변치 않는 것이며, 사람을 향한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거듭남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셨다는 것, 성령 체험이라 또 성령 강림이라고 하는 것은 기도 열심히 했더니 기적을 일으키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령의 본질적 능력은 사람을 하나님의 의가 육신의 삶이 되는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는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존재의 표상은 오직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다. 즉 순종하므로 심령에 심긴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잉태시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정리해보면 성령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말씀을 그 의도대로 듣고 순종한 사람 안에 있는 듣고 순종한 말씀과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의 본성이 되도록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이며, 성령의 능력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생명과 본성이 되도록 변화, 곧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조건이 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의도대로 심령에 심긴 사람, 즉 순종된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라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에 순종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대로 하나님 아들은 낮아지는 존재며, 세상 가치로 높아지는 것을 의로 여기며, 하나님 아들과 그리스도 역시 높은 존재라는 사람들의 의 앞에 죄인으로 자신을 내어 주는 본성을 가진 존재다. 그것이 순종되어 있어야만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의 능력을 기적으로 안다. 다시 한 번 설명하는 것으로 기적은 성령이 오시므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성령 강림의 본질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을 그렇게 알고 있다면, 성령의 능력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순종된 사람의 심령에 있는 하나님의 의와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자신을 거듭난 사람이라 뇌까려도 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은 태초 이래로 변한 적이 없다. 그 법대로가 아니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게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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