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3

그리스도 안에 속한다는 것은 우리 앞에 있는 한 알의 사과가 사과(the Apple)에 속한다는 것과 같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또 하나의 생명이 된다는 의미다. 이것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생명 세계의 일과 법임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로 난다는 것은 강제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유일한 존재인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고 만드는 모든 물건에 목적을 부여한 것과 같이 스스로 존재임을 인식하는 자신에게도 존재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의무인데도 그것이 사람에게 강제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로 난다는 것이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람의 선택에 의해서 시작되는 일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많은 부분과 연관이 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신랑이라는 말씀도 그 중의 하나다.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다는 것인데, 이것은 여자가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듯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그러니까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가진 분으로 선택하고 믿는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 한다. 성경은 이것을 <순종>이라고 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2:19)

 

순종이라는 것은 본이 있어야 한다. 무엇에 순종할 것인지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 즉 인생을 걸어야 하는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것은 의의 문제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고 옳으며 선한 삶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스스로 선한 것을 정하는 것은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인생 자체를 스스로 선택한 이가 없듯 그 결정권 역시 사람 스스로 챙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신앙의 근간은 여기에 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삶과 인간의 본성이 창조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믿는 것이 신을 믿는 신앙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창조주는 피조물을 창조한 목적이 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고 명제다. 더욱이 사람이란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인 만큼 사람이 육신으로 사는 삶의 모든 요소도 목적을 가지고 만들고 사용한다는 것을 보면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주 역시 사람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에게 의미 있는 하나님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은 하나님 아들 예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보고 그것을 선택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에게 장가드시는 것과 같다.

 

사람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순종하면 순종하므로 내재된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성경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프레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게 맞는 단 하나의 존재목적과 삶의 의미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중요하다. 사람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정체성이나 개념은 아무 소용없다. 높아지는 것을 돕는 이로서의 성령이나 그리스도는 우상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생들이 순종하기를 바라시면 보이신 뜻이자 인생의 존재 목적은 낮아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보여주신 것이 그것뿐이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다. 아울러 육신의 문제는 천부께서 다 아시는 것이고 다 예비하신 것이라고 일갈하셨다.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목적 달성에 필요한 것을 주시지 않았을 리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지혜고 온전한 믿음임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는 유일한 법인 거듭남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가 내 인생의 목적이자 의미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그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육신이 깨어지니 향유옥합과 같이 그 속에 있는 하나님 말씀이 드러났다. 육신 가진 인생은 섬기고 낮아지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인 인생의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다는 의미다. 그렇게 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그렇게 이미 온 천하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 본성이자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성하신 목적이자 뜻이며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본성인 생명으로 나는 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그렇게 물과 피와 성령으로 거듭난 존재가 바로 하나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다. 그렇게 났다면 그럴 리 없지만 설사 그 운명이 싫다고 해도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법이 아니라면 제 아무리 목사니 뭐니 자랑하고 남을 위하여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다. 그 인생? 다 헛된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은 단어가 가진 어감 상 공간이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공간과 공동체 이상으로 그리스도가 어떤 개념이나 가치관을 가진 세계라고 해도 비슷하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밖에 있다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Doing이 그리스도 안으로 자신을 이끌어 주는지 알기를 소망한다. 당연하게도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성경을 지켜서 자신이 성경이 제시한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지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확신에 거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어떤 순간 그렇다고 느끼는 순간은 있을 수 있지만 시간을 펼쳐 놓으면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노력을 많이 해 본 사람일수록 더 확실히 안다. 백 가지를 지키다가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그때까지 모든 것은 의미가 없다.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신앙, 혹시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진 신앙이 다 이와 같이 확신이 없는 신앙이다. 그렇듯 그리스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힘들다. 그리고 또 그곳에서 내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얼마든지 안에서 밖으로 내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증거다. 그런 모순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이라는 세계는 밖에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는 어떻게 속하게 되느냐? 그것은 성경이 너무 밝히, 그리고 수없이 많이 말씀하신대로 나는 것(bone)이다. 사람이 태어나면 사람(the Man)의 세계 안에 속하게 되는 것과 같다. 모든 생명이 그렇다. 하나님의 생명 역시 당연하게도 그 생명으로 날 때 그에 속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 안에 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속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려고 지켰던 성경,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인지 알고 싶어 신학이라는 학문까지 만들고 사회의 제도로 승화시키면서까지 알려고 한 그리스도 안에 속하는 방법은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사람이 읽고 들은 그리스도에 관한 그 모든 것이 심령 안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생명이 되어 거듭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지 사람의 생각처럼 높아지는 그리스도,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지거나 행하는 이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즉 보통사람이 도출할 수 없는 결과를 도출하는 능력이나 도움을 주는 그리스도나 성령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셨고, 그 이름(정체성)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너무 자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속한다는 것을 그리스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생명의 법에 속한 사람이 아니므로 그리스도 안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뻔한 말이지만 그 안에서 내쳐지지 않으려 어떤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온전히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그것은 속한 것이 아니다. 아들은 일하지 않고 누워 있어도 아들이지만 종은 어떤 노력을 해도 종인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속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난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정의 자체이고 표준이며 표상이며 특히 맏아들이다. 그와 동일한 아버지, 곧 내 존재 정체성에 대한 의와 뜻을 가진 이가 같아지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났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자기 본성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낮아지는 것이 자기 본성일 수밖에 없다. 행여 자신이 그것이 싫어서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해도 오히려 세상 사람이 그렇게 좋아하는 높아지는 것을 스스로 책망하고 예수님처럼 낮아지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런 본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렇게 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할 수 있는 법은 없다. 세상의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나, 추구하는 자신을 억누르고 참으려 노력하고 수도(修道)하는 사람은 제 아무리 대단한 짓을 해도 노릇하는 자요 회 칠한 무덤이며 외식하는 자 일뿐이다. 그리스도 안에 속했을 리는 만무하다. 당연히.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이 구원하신 세상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물리적 세상과 현실 세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고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드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수도 없이 온전하게 세상을 경영하시고 있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하신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정체성과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가치관이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온전하게 인식되므로 그들에게는 세상이 구원을 받은 것이고, 또 부인하려 해도 그렇게 보인다. 그렇다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에게 구원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

 

구원은 당연하게도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죄와 사망에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바뀌는 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이 있다는 말씀도 결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리스도 밖에는 생명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 곧 태초가 열리지 않은 사람에게 흑암과 혼돈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은 육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육신이 어디로 가야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인지 설명할 길이 없고, 태초 역시 물리적 세계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거듭난 사람들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는 표현을 많이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수 없이 많이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의 무엇을, 어떤 것을 믿는지 알지 못하고,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어디서 어디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듯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디서 어디로 들어가는 것인지 설명하지 못한다. 기껏 한다는 설명은 교회에 다니면서 이전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 종교적인 사람이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성경을 지키는 것은 100가지를 지키다가 단 한 가지만 범해도 아무 것도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의 삶이라고 구원을 받은 삶이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와 괴변일 뿐이다. 아니면 상술이나 기만이거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들어가는 그리스도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이 장소라면 어떤 장소인지, 그것이 세계라면 어떤 세계인지, 그것이 인격체라면 어떤 인격체인지, 그것이 공동체라면 어떤 공동체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곳이든 들어가는 것에는 다 법이 있다. 들어갈 수 있는 자격과 들어가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교회에 다니니 사람들이 의미도 생각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니 그렇게 믿는 것은 바보들의 짓이다.

 

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 글은 많은 설명을 해 왔다. 핵심적인 프레임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른지와, 그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낮아지고 십자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설명해 왔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거하려고 하는 그리스도 안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자기 본성이 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세상과 나를 구원하신 분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구원을 받았다면 나 역시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법의 통치를 받는 세계다. 그렇게 나 자신이 그리스도가 된다면 마트의 사과가 사과 안에 있듯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임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이것은 생명의 법이 적용되는 세계이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개념과 같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생명이 없다고 여기는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면 그 순간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구원을 받았으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며 노력하고 경건하려고 하는 것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 거듭난다면 그리스도 안에 속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기도 전에 바로 속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고, 그래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그리스도를 믿고 앙망하는 신앙에서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믿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들어가는 순간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사람들의 그리스도는 실존하지도 않지만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사람 밖에서 사람의 바라는 것을 도우는 존재지만,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사람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거듭난 존재이므로 사람 안에, 그 사람 자체로 임하는 그리스도다. 성령이 생명이 되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육신이 되는 것, 곧 육신 가진 삶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높아지는 것을 앙망하던 가치관을 버리고 낮아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육신 가진 내 인생을 통해 나타내려 하신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렇게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심이 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을 믿고 순종하는 것, 그 자체다. 그렇게 되면 약속대로 성령께서 생명으로 잉태케 하실 것이고, 그렇게 생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 되는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가 되므로 그리스도 안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 속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당연히 거듭난 것이 아닐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