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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6-26) 성령의 9가지 열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5. 22:32 Writer : 김홍덕

성령의 9가지 열매는 많이 회자 된다. 성경 퀴즈대회의 단골 문제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신앙의 과제처럼 해야 할 일, 이루어내어야 할 일로 인식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 이 열매를 두고 혹자들은 나는 어떤 것은 되는데 어떤 것은 잘 안 된다고도 말한다. 그것은 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근원적으로 옳은 말은 아니다. 성령의 열매기 때문에 성령으로 난 생명이라면 모든 열매가 다 맺히는 것이 정상이다. 다만 사람은 풍성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존재인 관계로 각 사람이 가진 다양한 성품을 좇아 성령의 성품이 나타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고,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이 이를 대변한다. 서로가 어떤 관계인지, 서로가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이 사랑의 출발이다. 또 요한 사도가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므로 필연적으로 결정된 순서다.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실 분이기 때문이다.

 

희락이라는 것은 세상의 열락과 다르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삶은 우리가 흔히 알고 소망하는 세상에서의 즐거움이나 희락과 전혀 다르다. 십자가를 지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평안하라 말씀하시고 정작 당신께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고, 또 극한의 고통인 십자가를 지셨다. 이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안 그리고 그 제자들이 말씀하시는 희락은 세상의 유흥이나 육신의 평안에 근간을 둔 즐거움이 아니다. 즉 예수를 믿었더니 세상의 일이 잘되고 그것을 연유로 즐거워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아니라는 말이다.

 

화평도 그렇다. 성령의 열매로서 화평, 거듭난 사람에게 화평은 어떤 상황, 어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마찰이나 갈등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검을 세상에 주러 왔다고 하셨고, 예수님을 인하여 가족 간에 불화도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즉 이것은 육신의 일과 그에 얽힌 감정의 화평이 아니라 존재의 안정성이다. 아들이란 존재는 때로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일에 빠질 수는 있어도 아들이라는 존재의 안정성은 절대 깨지지 않는 것과 같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그 존재의 안정성, 아들이라는 것과 성령으로 난 생명이라는 존재 정체성에 불화가 없다는 말씀이다.

 

오래 참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이 성령의 열매라는 관점에서 보면 희락과 화평이라는 열매들과 상충된다. 즐겁고 화평한데 인내나 오래 참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령의 열매로서 명시된 것은 이 또한 육신의 일과 그에 얽힌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 참음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라는 본성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처럼 너 옳다는 고백과 함께 육신의 수고와 심지어 목숨을 내어주는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분명히 성령의 열매이므로 신념이나 훈련이나 연습 혹은 각오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어야 한다.

 

자비와 양선 역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가진 그리스도의 본성에 속한다.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선을 베푸는 것은 육신의 형편을 딱하게 여기는 걸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처음 말씀한 사랑의 연장선이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살아가는 것을 긍휼히 여기고 그 어두움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자비고,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뜻을 다른 사람이 깨닫도록 자기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 자비고 긍휼이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일이다.

 

충성 또한 사랑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어원적으로 충성과 믿음은 같다. 충성과 믿음은 하나의 세트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순종하는 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믿음이고, 이 믿음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충성이다. 그래서 충성되이 여기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충성은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존재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다음의 문제다. 하나님과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 하나님께서 정한 의미로 관계가 정립된 사람의 삶이 바로 충성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 자체가 충성이라는 의미다.

 

끝으로 절제. 그러나 믿음과 소망이 이 성령의 열매에 열거되지 않았다고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성령의 열매가 이것으로 다 표현된 건 아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풍성함은 무궁하다. 이 절제는 어쩌면 그 무궁한 하나님이 주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발산적이지 않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의외로 능동적이고 발산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공격적이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외치는 일면이 대표적이다. 믿음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수동적인 마음이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본성 역시 자신이 옳다는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이라는 점을 안다면 절제가 왜 성령의 열매인지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성령의 열매는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주신 생명의 열매이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표현하시고자 한 하나님의 성품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 것은 이 성령의 열매의 근원적이고 함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십자가라는 사실이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을 보여주시고 그 뜻하신 대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에게 존재의 의미가 되는 사랑을 표현하신 사건이고, 그 사건의 중심에 남에게 나를 내어주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핵심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본성이 표현되는 과정에서 드러난 본성 속에 자기가 옳다는 주장으로 사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 주장 앞에 내 육신의 수고를 내어주는 종과 같이 섬기는 양선이 있고, 그렇기에 그 고된 일을 참는 시간이 있으며, 그렇게 힘든 것이지만 인생의 존재 목적이자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의 의로 사는 삶이 충성이며 그 삶에 희락이 있으며, 그렇게 회복된 존재로서 사는 삶의 안정성, 곧 평안과 화평이 있다. 이 다양한 성령의 품성 일면들을 열거한 것이 성령의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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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032(3:1-12) 주를 향한 소망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요한1서_오디오 Date : 2021. 8. 30. 11:21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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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6-2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8. 28. 12:5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은 공존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보는 신앙인들의 모습, 성령으로 거듭났기에 자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바울 사도가 육체의 일로 열거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회개하는 삶은 공존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부분 신앙인에게 이것은 요원하거나 그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게 하는 말씀으로 보일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일을 보는 관점이 사람과 다른 것에서부터 시작된 어두움이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 의로움은 일반적 사람 사회에서 말하는 의(혹은 정의)와는 다르다. ()’는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의로움의 기준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이므로 모든 정의와 의의 기준이 하나님의 생각인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던 모든 개념과 의로움과 정의(define)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를 기준으로 조정해야 한다. 특히 죄가 그렇다. 바울 사도가 육체의 일로 규정한 간음, 우상숭배, 도적질 등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봐야 한다. 바울 사도가 여러 가지를 열거하고 있는데, 우리가 당연히 악한 것이라 여기는 이 항목들도 사람이 가진 법률이나 도덕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의와 정체성을 기준으로 이것을 다시 봐야 한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간음과 우상숭배를 세부적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간음이라고 하면 결혼한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의 관계나 창녀와 같은 이들과의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간음하는 사람이라고 보시는 사람들의 행위 중 일부 드러난 것일 뿐 성경이 말씀하시는 간음의 본질이 아니다. 또 조각한 불상이나 기이한 나무나 바위에 절하는 게 우상숭배의 본질이 아니다. 조각한 나무나 돌에 절하고 섬기는 것 역시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의 생각이 드러난 것일 뿐이다.

 

간음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자기 짝이 아닌 것과 상관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성적인 문제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근원적인 간음은 사람이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 아닌 다른 것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적으로 아무리 순결해도 존재 자체가 간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삶의 주신 목적, 십자가로 표현된 그 목적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 아닌 모든 사람은 사회적 도덕성이나, 종교적 거룩함이 어떠해도 하나님 앞에 간음 중인 사람이다.

 

우상숭배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가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조차도 어떤 형태로 조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상이나 석상을 만들지 않으면 우상을 조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목상이나 석상에 절하지 않으면 숭배하지 않는다 생각한다. 하지만 우상을 조각하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조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 조각보다 개념적 조각이 더 중요한 쟁점이다.

 

하나님을 자기 생각대로 정의하는 것 역시 우상을 조각한 것이다. 하나님이 가지신 고유한 정체성대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신의 개념에 하나님을 넣고 만드는 게 우상을 조각하는 것이고,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을 조각하는 이유는 자기가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것은 육신의 정욕이나 욕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즉 육신의 평안과 복락을 소망하니 하나님은 사람의 어떠함에 따라 육신의 삶에 복이나 벌을 주신다 믿는다. 하나님을 행위와 소유를 드리면 의롭게 여기고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으로 믿는 것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조각하고 섬기는 것이다.

 

이같이 바울 사도가 열거한 육체의 일은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악행과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간음, 우상숭배 등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삶에 하나님이 보시는 육체의 일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성령이 인도하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하심이 이 뜻이다. 사람이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이고,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육체의 일들을 행하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사람들이 정의한 육체의 일의 범주보다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육체의 일이 없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육체의 일이 전혀 없는 사람이어야 성령에 속한 사람이고, 성령에 속했다는 것은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니 이 생명이 가진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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