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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6-26) 성령을 좇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8. 17. 17:53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예수님께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 이루셨음을 본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로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게 모든 율법의 완성이라 말씀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지 않고 물고 먹으면 서로 패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성령을 말씀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아울러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이라는 것도 함께 생각해보면, 구원을 얻었다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는 말씀이 된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마다 육신의 욕심을 추구하는 자신을 회개한다는 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성령을 좇아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증거다.

 

또 하나 사람들이 무심코 생각하는 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하니 자기 자아 밖에 계신 성령을 좇으려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성령뿐 아니라 성경 말씀도 자아 밖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을 좇으라고 하면 관광 가이드 깃발 보고 따라다니듯 성령을 따라가는 것처럼 생각한다.

 

생각 외로 기독교인들은 성령에 대하여 밝지 않다. 성령이라고 하면 방언과 같은 신비한 은사나, 병이 낫고 귀신 들린 자를 회복시키는 분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성령의 가장 본질적인 직임은 바로 그리스도로 잉태케 하는 능력이다. 사람을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리고 십자가를 순종하면 심령에 심긴 말씀이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즉 성령은 절대적으로 사람 안에 거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성령을 좇는 것은 자아 밖에 있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나 징조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 본성을 따르는 것이다. 당연히 이 생명 본성은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는다는 것은 자기 심령에 생명이 된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는 것이다. 성령을 좇아 살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별도의 조치나 신념 혹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종교적 다짐이나 신앙적 열심 같은 것이 필요 없다.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은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대변되는 육체의 일을 목적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산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형식이나 그림자가 없고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에 성품을 표현할 형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같은 이유로 사람에게 육체를 주셨다. 따라서 이 육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아래 있는 형식이자 도구다. 그래서 인생은 세월 따라 약해진다. 즉 소비되는 존재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인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육체는 삶의 목적이나 가치가 아니다. 육체는 오직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자 그릇이다. 육체가 본질이 아니고, 육체 자체의 어떠함을 가치로 보지 않기에 육체의 욕심도 없고 또 육체의 어떠한 모습이나 행위를 기준으로 의를 판단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성령을 좇아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온전하게 이룰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은 말씀대로 살려고 사람이 할 게 없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나는 것이 곧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이자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나면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다. 그게 생명의 이치다.

 

여기서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행위나 육체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누구나 육체의 욕심을 불의한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리스도라 난다면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고 계신 뜻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자 의미로 믿고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의 목적과 가치가 새롭게 되는 것, 그것이 거듭남이다. 그렇게 거듭나게 하시는 이가 또 성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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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5:13-15) 율법의 완성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8. 13. 11:08 Writer : 김홍덕

지금까지 율법은 범법자를 위한 것이라는 것과 믿음이 오기 전까지의 세월이라는 것 그리고 종의 신앙인 것을 이야기해 왔다. 물론 이와 같은 율법에 대한 설명은 모든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기 위한 설명이다. 본질적인 목적은 믿음이 사람을 의롭게 하므로 모든 이들에게 믿음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율법의 완성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율법도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이를 위하여 자유를 설명했다. 이 자유는 율법이 의무감으로 사람을 종으로 삼기 때문이다. 행동해야 의롭게 된다는 것은 행함이라는 의무를 부여한다. 의롭게 된다는 목적이 사람을 종으로 삼는다.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도하는 것’, ‘성경 읽는 것’, ‘교회에 봉사하는 것도 분명히 행동이라는 것과 분명히 그 행위를 통해 보상을 받으려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기대하는 보상은 행위 없이 안된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으므로 종의 신앙이자 율법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된다.

 

바울 사도는 율법적인 압박이 없는 자유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불렀다고 하신다. 율법이 믿음이 오기 전, 약속 이전의 세월이므로 율법 다음에 오는 믿음이 곧 자유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다. 그리스도로 났으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다는 것인데, 이 그리스도의 본성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끈 본성이다. 종노릇의 본인 십자가.

 

그리고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는 모두가 알고 있듯 사랑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자리가 십자가다.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에 의하여 죄인이 되신 자리가 십자가다. 의인이 스스로 죄인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죄인이 되었으니 자유로 종이 된 표본이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 사랑으로 인하여 거듭나는 게 그리스도로 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리스도로 나야만 예수님께서 자유로 종이 되신 것 같은 본성을 가진다. 이것 외에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사랑으로 종노릇한다는 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에게만 있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가 있어야 할 수 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가진 자유로 종노릇하는 유일한 본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랑이 무엇이길래 율법의 완성이 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성경의 지식이나 학문으로 성경을 대하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구원으로 표현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이 가장 큰 사랑이다. 그 사랑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표현되었다. 이 모든 게 죄에서 우리의 구원하기 위함이다. 죄는 자리 곧 존재의 목적을 벗어난 것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으로 사람인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는 존재의 의미가 회복되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의 본질은 존재의 의미다.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에게는 존재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육신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 사람의 존재 의미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 스스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사람에게 늘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고, 사람은 그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기에 사람의 존재 이유와 의미는 오직 창조주이신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사람에게 알게 하시려고 언제나 성실히 일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가 그 사랑에 화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자기 인생의 목적으로 순종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형성된다. 그게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면 그게 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그리고 그 표현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 그것이 바로 종과 같이 섬기며 서로 사랑으로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종이 되려면 자유가 있어야 한다. 종은 할 수 없다. 율법은 의무감으로 하지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 종이 된다. 바로 이 자리로 이끄는 것이 몽학선생인 율법이다. 율법의 존재 목적이 범법자를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므로 사람이 거듭나서 서로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려 종과 같이 섬기면 율법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본성을 인하여 스스로 종과 같이 섬기는 자가 되면 그 사람의 세계에 율법은 완성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바울 사도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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