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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과 믿음은 일반적으로 연관성이 크게 없는 단어지만 의롭게 된다는 것에서 하나의 대조군으로 묶어 두는 것은 의로워지는 주체와 방향에 있어 완전히 상반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과정 어느 한 절에라도 의로워져야하는 사람의 능동적 기여가 일말이라도 있다면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인 반면, 의롭게 여기는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행사 외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는 수동적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앞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설사 신약성경에 있는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야 의로워진다거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여긴다면 신약성경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눈앞에 나타나셔서 하는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해도 그 말씀은 율법이 되고 그 말씀을 준행하는 것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행한 어떤 기여가 의롭게 되는 것에 영향을 1%라도 미치기(미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의 의롭게 되는 일에 사람이 능동적 기여가 있으면 모두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믿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에 있어 자신의 어떤 기여도 무의미할 뿐 아니라, 기여하려는 그 자체가 불의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더욱이 성경을 지켜서 답보 받고자 하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자 세상 살 동안의 성공적 성취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사실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믿는다는 것에 있어 믿어야 하는 자의 어떠함은 중요하지 않다. 믿어야 할 내용이나 믿을 대상의 존재성, 그 어느 것에도 믿어야 하는 자가 기여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믿어야 하는 상대가 어떻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는 설사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믿는 자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을 알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하여 얼마나 그릇된 안목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깨달으면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의의 정의도, 의롭게 하는 주권도 모두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엿장수 맘대로 한다고 해도 나는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따라서 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기도하고 봉사하고 성경 읽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게 여기는 것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정성을 보실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할 것이 아니다. 더욱이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의로워지는 방법이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의로운 이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의에 관하여, 믿음을 가지는 것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리실 마음을 가지시도록 사람이 어떤 것이라도 능동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목적으로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의지와 주권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것이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든, 봉사든, 헌신이든 상관없다. 심지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 준다고 해도 그런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모두 불의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진 믿음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반대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정작 자신이 의로워져야 하는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의의 정의도, 의에 이르는 법도 모두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나는 순종할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 기도나 헌신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의롭게 되는 믿음의 시작이다. 이것은 평범하게 상용화된 교리 같지만 돌아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사를 도우시기를 바라며 늘 능동적이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의로워지는 법에 관하여 하나의 대조군으로 묶여 있는 행함과 믿음은 많은 신앙인들에게 어려운 문제다.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에 대하여 헷갈리기도 하고 어려워한다. 그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식으로 자기 맘대로 정의한다. 어쩌면 능동적인지 혹은 수동적인 것인지로 이러한 혼돈을 정리하고 의롭게 되기 위하여 자신이 어떤 법을 좇고 있는지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 모른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심이 있다면.

 

여기까지 본격적으로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무엇인지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해 보았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오늘날 신앙인들이 자기 육신이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 신약 성경의 말씀을 준행하고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설명한 바와 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삶의 형통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믿고 준행하는 것은 믿음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과 신약성경이든 구약성경이든 성경대로 사는 자신의 능동적 노력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것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자기 신앙에 한 절이라도 있다면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신앙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래본다. 믿음은 지극히 수동적이라는 것과 성경말씀은 의롭게 된 자,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지 의롭게 되는 매뉴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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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008(1:1-4) 나타나신 생명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요한1서_오디오 Date : 2021. 4. 28. 11:22 Writer : 김홍덕
 

(요한일서 1장 1-4절) 나타나신 생명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은 ‘살아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물학적 혹은 의학적인 개념만으로 한정된 의미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와 목적에 부합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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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어떻게 의로워질 것인지에 대한 것, 행위냐? 믿음이냐?’의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은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실상은 거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다. 앞서서 이것이 시대적 관점에 대한 착각 때문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설명했다. 예수님이 오신 시점은 2,000년 전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동일하게 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생각지 않는다는 것까지 설명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것은 구원의 다른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 된 존재라는 의미다. 성경은 거듭나므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의로워진다는 것은 의로운 생명으로 나는 것이라는 의미다. 생명으로 나는 것은 자기 행위로 인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 누구도 자기의 행위로 태어난 것이 아니듯 의로워지는 것 역시 자기 행위가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생명으로 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태어난 생명은 그 유전자에 의한 고유한 행동이 있다는 점이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대로 살고, 생명대로 산다는 것은 그 생명 본성에 따른 행동이 반드시 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생명으로 나는 것이라는 것만 분명하게 자신의 말씀이 되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말씀이 같은 법을 따르는 말씀이라는 것이 이렇게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생명의 법이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면 성경을 대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은 기도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을 수 없고, 봉사를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거듭나지 않고 외식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려고 노력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여기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분명하게 할 것이 있는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도나 봉사와 같은 것이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유일하게 가르치신 기도 어디에도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에 관하여 구하라는 말이 없다. 자식의 문제, 건강의 문제, 사업의 문제, 나라와 세계 평화와 같은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아니라 모두 육신의 정욕에 관한 것이라 말씀하신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이것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다.

 

봉사나 헌신 역시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으로 일갈하셨다. 육신의 일로서 구제와 봉사는 그리스도의 직임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그것 역시 직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육신의 일인 자식이나 건강이나 사업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나, 육신의 삶의 평안을 척도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가(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면 세상에서 잘 살 기회가 있어도 버리고,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사람인가?’라고 반문할지 모른다. 사실은 이런 반문은 기독교 안에 더 많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기만 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게 된다고 전하면 거듭나기만 하면 도둑질해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질문이 아니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도둑질하는 생명이라면 그리스도가 도둑질하는 존재라는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본성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역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어리석음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신 분이 아닌가? 세상을 창조하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하나님의 경영 아래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십자가에 죽이고자 할 때 순종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이다.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 죽임을 당하므로 죄인을 구하신 분이 그리스도이고, 그와 같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인데 그가 도둑질을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진정한 어두움일 수밖에 없다.

 

이 어두움은 육신을 본질로 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놀랍게도 눈에 보이는 육신을 본질로 본다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의 뿌리다. 즉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믿음의 근원이다. 성경을 지켜서 얻으려고 하는 모든 것이 육신의 일이고 육신과 세상을 본질로 보니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된다. 즉 육신을 본질로 보는 사람에게는 성경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히 보시므로 주시는 은혜가 육신의 일, 곧 본질적인 일이며 인생의 목적, 신앙의 목적이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지켜야 하는 것(have to)’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 성경 말씀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났다면 그 본성을 거스를 수 없고 성경은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설명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남자로 났다면 그 모든 본성이 남자의 유전자를 따르는 것과 같다. 행여 성전환을 한다고 해도 보이는 것만 바뀔 뿐 유전자와 염색체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경을 어기면서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에게 성경은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살아도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며, 살다가 성경을 펼치면 자신의 삶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의 차이는 무엇을 본질로 보느냐의 차이다그리고 그 차이는 성경 말씀과의 관계로 나타난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육신에게 해로운 일이 생길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독력하면서 성경대로 살려고 애쓴다. 육신과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기에 육신이나 세상의 일이 그릇되면 안 된다는 강박 아래 산다. 그런 사람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상관없이 율법이며, 서기 30,000년에 태어났다고 해도 율법의 시대를 사는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 사람이다. 나타난 것은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육신이 되는 말씀이 본질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육신과 세상의 일을 본질로 보는 것은 요한 사도가 말씀한 것과 같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속한 세상의 신앙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와 반대가 되는 것이기에 적그리스도에 속한 것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

 

그러므로 율법적인 신앙이 무엇인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 무엇인지는 연구하고 지식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성경대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며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신앙이다. 특히 성경대로 살아야 육신의 일이 잘되고 복을 받고 성경대로 살지 않으면 육신이 바라지 않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하는 것이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라면 두말할 것 없이 율법적인 신앙이요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이다.

 

성경대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며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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