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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1:18-2:10) 광야를 거쳐 복음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5. 19. 22:13 Writer : 김홍덕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9)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이 멀고 아나니아에게 고침을 받고 바로 사도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보냈다는 것을 고백한다.(1:17) 이런 바울의 과정은 사도가 되는 필수적인 과적이었다고 하기는 어려워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에서 꽤 깊은 의미가 있다. 복음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에게 바울에게 아라비아의 3년과 같은 세월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 광야가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율법의 시간이라는 점이다. 율법의 삶을 사는 시간은 곧 율법의 시간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광야가 가진 중요한 의미는 머물러서 되지 않는 땅이라는 점이다. 즉 율법 아래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광야를 벗어날 때 세례를 상징하는 요단강을 건넜다.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세례는 사람이 물속에 살 수 없듯 율법 아래 살 수 없다는 고백이다. 광야의 삶을 살아보니 광야에서, 율법 아래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끝으로 약속한 땅에 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바울은 자신이 지나칠 정도로 율법 아래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면서 아라비아 광야에 3년을 머물렀다고 했다. 머물러서 안 되는 율법의 세월을 거치고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러 갔다는 것은 율법 아래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된 바울 자신의 여정 자체다. 어쩌면 바울에게 이 3년은 진정한 세례의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율법 아래 있었던 자신의 신앙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먼저 사도로 칭함을 받는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갔으나 이때는 야고보 만 만났고, 이후 14년이 지나서 다시 올라가서 베드로와 여러 사도를 만나 자신이 이방인에게 전한 복음을 말하고 이에 대한 보증을 받았다는 것을 사실적인 표현으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울의 말에 대한 객관적 사실 여부의 확인이 아니다. 이는 바울 사도가 자신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힌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바울 자신의 일이 오늘날 복음 안에 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의 여정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개인적 경험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모델이 되고 표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전 광야 같은 율법의 세월을 보내기 때문이다. 누구나 세상과 종교 그리고 자기만의 율법 아래 살다가 존재의 그리스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그리스도를 만나면 자신의 지난 모든 삶과 신앙이 광야의 세월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경 말씀이 마치 호각과 같아서 하면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런 구분에 의지한 것은 자기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바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처리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성경은 세례라고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기 안에 있는 믿음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것을 먼저 존재의 하나님을 만난 이들을 만나 보증을 받는 여정 또한 빠질 수 없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행함으로 의로워지려고 지키는 법을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율법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율법은 법이다. 구속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의 시작에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율법은 능동적인 것인데 그 능동성을 이끄는 원동력이 육신의 정욕이라 했다. 육신의 정욕이 어떤 법을 지키게 구속한다. 하나님 혹은 신에게 얻고자 하는 육신의 평안, 세상에서의 성공, 자녀의 성공 등이 육신을 구속한다. 육신의 정욕이 구하는 것을 얻으려면 하나님이나 신께 정성을 드리도록 구속한다. 그 법과 섭리와 프레임 안에 있는 모든 정성이나, 신앙적 경건과 행함과 헌신과 헌금 그 모든 것이 바로 의로워지려는 행함이다.

 

따라서 사람이 세상을 살 동안 육신이 평안하기 바라고 세상에서 성공해서 건강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단속하는 행위와 경건 그리고 행동이 모두 율법이다. 따라서 성경이든 불경이든 그런 목적과 법 아래에서 지키는 모든 행위는 전부 율법이다. 즉 인생은 누구나 육신의 정욕을 추구하며 사는 율법의 삶을 살다가 하나님을 만난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이 그런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광야 같은 세월이 자기 삶에서 종식되어야 한다. 바울처럼. 그리고 나면 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자들을 만나게 되고 또 자신의 믿음에 대한 보증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은혜로 의롭게 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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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의로워지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전하면서 자신이 아주 율법적인 사람, 곧 행위로 의로워진다는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보다 지나치게 열심이었음도 밝힌다.(1:31-14) 하지만 자신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음을 말하면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자신이 모태 속에 있을 때부터 그리스도의 계시로 택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유대교 안에서의 열심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과 전혀 무관한 일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바울 사도가 사울이었던 시절의 열심보다 더 열심인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생각을 하려면 자신의 신앙생활이 율법적이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있어야 한다. 성경대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도 율법적이며 행위로 의로워지는 삶이라는 것을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육신의 평안이나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얻기 위하여 성경대로 살려는 모든 신앙이 바로 바울 사도의 사울 시절의 신앙이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어서 육신이 바라는 바를 얻고자 한다면 최소한 바울 사도의 사울 시절보다는 열심히 있어야 일말의 기대라도 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안타깝게도 바울 사도는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사도가 되는 것과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일갈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의 방향성이 틀렸다는 말이다. 이는 바지를 반대로 입은 것과 같아서 완전히 새로 시작하지 않는 이상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전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이와 같이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서 의로워지려는 신앙에 지극히 열심이었던 바울 사도가 의로워지는 것은 그 길이 아니라고 일갈하면서 진정으로 의로워지는 법을 설명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계시란 사람의 노력이나 기여로 인하지 않은 것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의로워지는 것이 사람의 능동적 노력으로 될 것이 아니라는 말씀과 궤를 같이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정한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이 삶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다. 창조주가 정한 목적이자 계획인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가 그리스도다. 그 첫 열매이자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의 본질을 보이신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그 몸이 십자가에서 깨어지시니 드러난 인생의 본질이자 삶의 목적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계시다. 하나님이 사람에 대하여 또 창조의 목적과 삶이 된 사람을 일컫는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정의하셨고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이것은 육신 가진 모든 인생에 대한 구원의 섭리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께 모든 주권이 있다. 사람이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그 계시가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하고 믿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이 자기 존재의 목적이며 십자가를 지신 이유와 과정이 우리 삶의 이유고 모습인 것을 순종하고 그것을 좇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그게 믿음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는 것에 있어 사람이 할 것은 없다. 즉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 같은 이치로 그 구원을 전하는 사도 역시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이다. 바울 사도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유다. 육신 가진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 구원 받고 의로워지며 그 뜻을 좇아 살아가는 유일한 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유심히 바울 사도의 서신들을 묵상하면 자신의 삶과 사역 그 모든 것은 자신의 행위나 공로가 아님을 곳곳에서 밝히고 있다. 이는 그가 전하는 내용 자체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자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아 구원을 얻는 것이나 그 구원을 전하는 모든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기에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있다. 그 본성대로 사는 모습이 바로 행함 있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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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복음 혹은 의로워지는 법이 행함에 있는지 아니면 믿음에 있는지에 대하여 기록한 갈라디아서의 초반부는 바울 사도의 개인적 입장과 경험을 바탕으로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며,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먼저 설명하고 있다.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이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그의 개인적 경험의 시작은 바로 자신이 어떻게, 또 왜 사도인지를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모든 서신의 시작을 하나님 앞에 의롭고 또 사도가 된 것 자체가 행함이 아니라 은혜와 믿음을 인한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한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갈라디아서 역시 여느 서신서와 같이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이러한 상용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울 서신의 첫머리를 성경을 학문으로 보는 사람들은 당시 바울 사도의 사도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바울 서신의 시작마나 나오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사도라는 선언은 단순한 자신의 입장과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 아니다. ‘의롭게 된다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의 뼈대다.

 

만약 육신의 어떠함, 곧 신분이나 이력 그리고 공로가 있어야 사도라고 할 수 있다면 예수님과 함께 한 세월이 없고 오히려 예수를 핍박한 전력이 있는 바울은 사도가 될 수 없다. 그런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것이다. 유대인이라는 율법적인 신분이나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의로워진다는 것을 전하는 바울이 사도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의 증거다.

 

오늘날은 바울을 당연히 사도로 인정한다. 성경을 보는 대부분의 관점, 그것이 학문이든 묵상이든 간에 바울이 사도라는 것은 수학의 무정의 용어처럼 고정된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사도로서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바울의 말은 당연히 사도인 그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당시 사람들의 편견이라는 관점이 중심이 되어 해석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당시의 바울은 사도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를 사도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가 어떤 특권이어서가 아니라 사도가 되는 것이나 구원이나 의로워지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를 순종하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단순히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을 사도로 인정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사도라는 것을 늘 선언하고 말씀을 전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바울 사도의 말씀을 전하려면 행함으로 이룬 신학적 자격과 그 자격을 가진 자로서의 공로가 있어야 전할 수 있다. 육신으로 사도가 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사도가 될 법한 육신의 공로가 별로 없는 바울은 무정의 용어처럼 사도로 인정하는 오늘날 오히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전하려면 신학적 자격이나 성령의 역사로 오인하는 신비한 능력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교를 하려면 신학이라는 학문의 수고, 그 학문 이수를 자격으로 한 교회에서의 공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신앙과 교회의 교리인 것이 그 증거다. 너무나도 분명하게 신학적 업적은 육체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는 자리에 이르려면 얼마나 많은 경쟁을 이겨내야 하는지 모른다. 신학생일 때는 동료들보다 더 많이 공부해서 시험에서 이겨내고, 졸업해서 교회에 전도사로 가서는 많은 업적을 쌓아야 부목사가 되고 다시 그 공로를 인정받아 담임목사가 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세계다. 경쟁에서 이겨내어 높고 좋다는 자리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육신의 공로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씀을 전하고 설교하려면 신학이라는 허들을 넘어야 하도록 해 놓고 그것을 교리와 정통적 신앙의 가치로 삼는 모순에 빠져있는 것이다. 신학과 오늘날 신앙은 무엇이 행함인지, 무엇이 믿음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증거다.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사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갈라디아서가 전하고자 하는 본질적 내용인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 의롭게 한다는 말씀의 주제 위에 있다. 바울 사도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육체라고 전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사도가 되는 것 역시 행함이나 육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순종한 믿음이다. 만약 사도가 되는 자격이 신학을 이수하는 것이나, 예수님과 일정 기간 같이 말씀을 전하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렇게 된 사도가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의로워지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시작되는 것이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이 그랬다면 오늘날은 신학이나 교회에서의 업적 혹은 40일 금식 이력과 같은 능력으로 착각하는 공로로 의로워지고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믿는 믿음이 시작된다. 당시의 사람들이 자신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아서 혹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사도의 말씀이기에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못하면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 또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있어야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굳어 있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행의로 의롭고 더 거룩하게 된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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