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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1서 011(1:1-4) 하나님과 사귐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요한1서_오디오 Date : 2021. 6. 9. 12:20 Writer : 김홍덕
 

(요한일서 1장 1-4절) 사귐(1)

사도요한은 자신이 듣고 보고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사귐을 위한 것이고 또한 그것이 기쁨이라고 하고 있다. 이 사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이라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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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1-4절) 사귐(2)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적 중에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을 먼저 생각한다.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는데 예수님은 걸으셨고, 또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는데 예수님은 살리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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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 장) 율법과 성령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6. 7. 17:30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이야기하면서 성령을 언급한다.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 받은 것인지 아니면 믿음으로 받은 것인지를 반문한다. 바울 사도의 질문을 생각해보면 의로워진다는 것은 곧 성령을 받았다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행위냐 믿음이냐인 논리에서 성령을 받은 것이 행위냐 믿음이냐로 표현했다는 것이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 3:2-3)

 

성령을 받았다는 것과 의로워졌다는 것이 같은 의미인 이유는 의로워지는 것이나 성령이나 믿음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고 믿음이 있어야 성령을 받는다.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를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믿고 순종한다는 의미이듯, 성령 역시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 임하신다. 이는 성령은 진리의 영이자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고 깨닫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님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실존과 그 행하신 일이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것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여기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다른 종교와 비교 우위에 있다는 것으로 자랑을 삼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육신 가진 인생의 본질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것을 말한다.

 

의롭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 역시 믿음으로 받는 것인 이유는 성령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영이기 때문이다.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과 같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이 성령의 본성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이신 진리가 우리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되게 하시는 것이 성품인 분이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저것이 내 존재의 정체성이구나!’라고 믿고 순종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이 생명으로 여기시는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신다.

 

성령 역시 믿음으로 받는 것인 이유는 우리가 의롭게 되는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영이기 때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의로운지에 대한 기준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의미인 것을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는 존재,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이셨다. 그래서 말씀(하나님의 의)이 육신이 된 존재라고 한다.

 

그리고 성령은 진리인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육신이 되게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을 본 육신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육신의 삶이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다. 성경은 이것을 성령으로 잉태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인생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것을 순종하고 믿는 믿음을 생명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자신의 존재 정체성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어야 의로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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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바울 사도는 자신이 율법을 매우 중요히 여기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소환하여 율법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전한다. 그리고 그 자신의 경험을 일단락하면서 자신이 율법을 떠나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십자가에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고 이제 육신으로 사는 것은 믿음을 인함이라는 말로 정리한다.

 

바울 사도의 이런 고백은 사도의 모범적인 모델로 박제할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바울 사도와 동일한 신앙, 동일한 경험을 가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일을 전한 것은 자신이 전한 말씀을 듣는 이들 역시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행 26:29)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 사도의 경험과 같이 율법을 좇던 삶은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남은 육신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성경을 지키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율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하고 또 믿음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율법이라는 것이 능동적이며 자신이 바라는 것을 위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생으로서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정체성임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도 앞서 설명했다. 아울러 행위는 능동적이며 믿음은 수동적이라는 것까지 강조하였었다.

 

이와 같은 율법과 믿음에 대한 개념은 기존의 기독교 안에 있는 것과 차이가 있고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 이는 오늘날 기독교가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려는 모순을 벗지 않으면 자신이 율법 아래 있음에도 오히려 그것이 믿음 안에 있다는 착각을 벗을 수는 없다. 그것은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설명함에 있어 먼저는 자신의 경험으로 볼 때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이어서 성령과 율법, 약속과 율법 등의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 곧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하여 설명한다.

 

어떻게 보면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시작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지를 설명하는 모순적인 전개 같지만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것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육체 가운데서 산다는 말이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의로운 행함을 자아낸다는 것을 온전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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