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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1-18) 오늘날의 할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23. 16:13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에게 행위냐 믿음이냐?’는 복음 전파의 일관된 말씀이다. 사도로서의 환경적 요인 중에 이방인도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끊임없이 권면하고 책망했다. 할례를 권한다는 것은 할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특권 혹은 자랑이나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 생각의 뿌리는 육신의 어떠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 혹은 구원의 증거로 여기는 것에 있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행위에 관하여 할 만큼 해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만나지 못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만났다. 그런 그에게 있어 사람의 외모나 행위가 아니라 중심과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전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 경험이나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을 특징적으로 집중한 것은 아니다. 사실상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복음의 뼈대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할례로 함축시켜 권면하고 있다.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는 말로 할례로 대변되는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무익함을 일갈하고 있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간절한 바울 사도의 권면은 그 당시에 있었던 시대적 상황에 맞춘 말씀이 아니라데 있다. 어느 시대나 사람은 육체의 행위로 하나님께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 믿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교묘해졌다.

 

행위로 의로워질 것이라고 믿는 신앙은 어쩌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세포에 각인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뿌리 깊다. 그 모습들은 글을 이어오는 중간중간에 많이 설명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그들의 기도와 간구에 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간구는 모두 육신의 평안과 성공 그리고 육신이 사는 세상의 안녕에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게 창조주 하나님께 유익이 되는지, 피조물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신앙인들의 이런 모습 속에는 초대교회 시절 할례와 같은 자격지심이 있다. 그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것’, 교회에 나가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을 얻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애착이나 구분이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믿음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육신으로 같은 노력을 해도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께서 잘 되게 하실 것이라 믿는 마음이 바울 사도의 때에 할례와 같이 자랑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육신의 행위다. 오늘날 믿음은 모두 육신의 행위에 있다는 말이다.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신다고 하는 것,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것, 어쩌다가 아프거나 사업이 안 되면 교회에 가 보라고 말하는 것들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거나 벌을 받는다고 믿는 말임이 분명한데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다.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육신의 일을 형통케 하신다고 믿고 있다. 교회에 다닌다는 자격지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신이 도모하는 일은 잘 되리라 믿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교회에 다니면 하는 일이 형통할 것이라고 권하는 모양새는 두말할 것 없이 할례를 받아야 의롭게 된다고 권하고 자랑하는 것과 같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책망한 일이 이렇듯 교묘하게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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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것은 육체로 행하는 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생과 삶의 목적과 의미로 믿는 믿음으로 된다. 그런데 성경에는 생각보다 행하라는 명령이 많다. 이것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살았다는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함은 생명이 가진 본성이 이끄는 행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전하는 갈라디아서 속에 있는 바울 사도의 선을 행하되라는 말씀 역시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물론 여기서는 이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적인 선함, 행위의 선함이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선은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뜻과 생각과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다. 따라서 선을 행하려면 당연히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별개는 아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은 사람에게 칭송받는 것을 안다면 그럴 수 없다. 사람이 생각하는 사회 도덕적인 선함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하나님의 선한 본성 중의 일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비롯되었을 때만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 선을 행함에 있어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어떤 일을 행하고 낙심하지 않으려면 결과를 자신이 주관하려고 하지 않아야 한다. 결과까지 자신의 의도한 대로 되기를 바라고 관철하려 하면 결과에 따라서 낙심한다. 그런 낙심하는 마음이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하지만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낙심할 리 없다. 당연히 피곤하지 않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흔히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속내는 하나님께서 내가 기대하는 대로 하실 것이라는 아전인수적인 기대다. 하지만 이것은 말이 기대지 어떤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협박에 가깝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그런 기만에 당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런 하나님의 행사로 인하여 사람이 자기 생각과 다른 결과를 받으면 피곤해진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든, 어떤 행동을 하든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하신다. 그래서 순종이 중요하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보면 이는 더 확연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본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맏아들이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며 간절한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이 드러난 것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하나님의 선을 행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긴다. 이는 순종의 본성이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이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선을 그리스도의 본성이 이끄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는다. 자기 존재의 시작에서부터 거듭난 생명으로 사는 것까지 어느 하나 하나님의 의와 뜻 아닌 게 없음을 아는 사람이 결과를 자기 뜻대로 기획하고 관철하려 할 리 없기 때문이다.

 

선은 사회 도덕적인 행위가 아니다. 행하라는 말씀이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노력을 원하심도 아니다. 선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고 행함은 하나님의 의와 뜻대로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 이끄는 삶의 모양이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로 났기에 사는 삶도 하나님의 뜻대로, 삶의 결과도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에 순종하니 낙심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니 또한 피곤치 않다. 이 모든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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