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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6-10)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12. 04:00 Writer : 김홍덕

육체를 위하여 심는 사람은 썩은 것은 거둔다는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은 육체는 나중에 썩으므로 육체를 위하면 썩을 걸 거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제다. 거두는 것이야 나중 일이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 곧 거두는 때에 육체가 썩을 것이니 지금 육체를 위한 것이 의미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 나중에 얻기는 얻는데 이미 썩은 것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육체를 위하는 것은 위하는 그 자체로 이미 아무 값어치가 없다는 말씀이다.

 

반면에 성령을 위하여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다. 그리고 영생은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다. 수명이 유한한 육신에 거하면서 수명의 한계를 허무는 것을 영원으로 생각하는 개념에서 세워진 영혼의 영원한 존속이 영원함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원함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모든 것을 알게 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신 뜻도 여기에 근간이 있다.

 

그렇다면 육신을 위해 심는 것은 어떤 것인지, 또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미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육신을 위하여 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쉬지 않고 설명해 왔다. 그것은 바로 육신의 평안과 육신이 세상을 살 동안 세상의 가치로 성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의 수혜자는 바로 썩을 육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육신이 평안해지고 세상에서 삶이 성공적이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크게 착각한다. 그건 착각을 넘어 자기 합리화다. 바울 사도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된 줄로 아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고 하심도 이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속여봤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만에 당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언해 두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사람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이유는 육체의 어떠함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보시는지의 기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어떠함이 세상의 기준이라데 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잘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불의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는 육신이 잘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영광스럽고 본받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가치는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임을 잊으면 안 된다. 세상에서의 평안과 성공을 가치로 여기는 이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은 반대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사람이 교회에서 듣고, 그 들은 바를 인하여 소망하고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과 육체의 평안을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아무리 떼로 몰려가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우겨도 하나님은 그것을 신앙이나 믿음이나 의로 여기시지 않는다. 그들에게 하실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도무지 누군지 모르겠다는 말씀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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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1-5) 짐을 서로 지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9. 11. 12:02 Writer : 김홍덕

앞서 바울 사도의 서신 속에 너희저희가 있는 것을 설명했다. 성령의 열매를 설명한 다음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 것이라고 말씀한 뒤 성령으로 사는 삶을 포괄적으로 이어간다. ‘형제들에게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 설명하는 말씀이 그것이다. 형제들은 너희, 사람은 이전에 설명한 저희로 볼 수 있다.

 

사람들과 기독교인 대부분조차 인정하지 않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범죄는 도둑질과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을 벗어나서 사는 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이므로 그 상태에서 도둑질이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은 실질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다. 도둑질과 같이 사람들이 공통으로 죄로 여기는 것은 죄인들의 삶 속에 있는 죄가 심화하거나 드러난 것일 뿐이다.

 

바울 사도가 사람이 범한 죄가 드러났을 때라고 하신 말씀 속의 죄 역시 그렇다. 이 말씀을 풀어보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이 드러났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대하라는 말씀이다. 주목할 것은 죄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실상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보실 때 죄인이기에 달리 드러날 것도 없는데 드러나거든이라고 한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고백했을 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을 본 사람은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처럼 성령으로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고백하게 된다. 그것은 곧 그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때 성령으로 사는 형제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그를 바로 잡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바로 잡는다는 것은 어긋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로 사람이 벗어난 존재의 정체성에서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회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게 다소 생소한 관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렇게 서로 짐을 지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으로 설명한 의미가 확정된다. 그리스도의 법은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육신과 수고를 종과 같이 내어주는 법이고, 또 그 모습이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이자 자신 역시 그렇게 사는 게 자기 존재의 목적임을 깨닫는 자를 회복시키는 법이기에 이 법을 성취한다는 것은 종과 같이 짐을 지는 것이고, 서로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면 서로가 육신의 수고를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으로 살기에 서로 짐을 지는 삶을 산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또 하나 우리는 이 에서 사람의 죄가 드러나는 것은 죄를 시인함이고, 이 죄가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짐은 형제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나서 한 아버지의 본성을 가진 형제들이 지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남을 위한 수고가 아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이 주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또 그것을 인함이 아니라면 아무짝에도 쓸데없다. 이 짐 역시 그렇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형제들에게만 있는 짐이다. 이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짐이다.

 

이 짐은 두말할 것 없이 십자가, 곧 자기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이 짐은 쉽고 가벼우니 지고 따라오라 하신 십자가다.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라는 짐을 지시니 그리스도의 법이 온 세상에 드러나고 성취되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보고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인생인 자신에게 보이신 존재의 목적임을 깨달을 때 그릇된 자리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므로 죄가 드러남과 동시에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렇게 먼저 형제가 된 사람은 또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렇게 산다. 그것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그 자체가 를 위하는 본성이다. 그릇된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주신 목적을 깨닫도록 자기 육신의 수고와 또 육신을 종과 같이 내어주는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은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이자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짐을 지는 것이다. 이 짐을 서로 지려면 서로가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이자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본성대로 사는 것이고, 또 행위로 얻은 것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도 없다고 했고,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자 그 본성이 이끄는 삶을 자기가 보므로 자기에게만 자랑할 뿐이다. 이 말씀은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이야기이므로 너무 당연하지만,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을 가진 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 행위로 공로를 쌓아 의롭게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남을 통해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 성령으로 살고 행하는 사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이같이 자기 안에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으므로 그 삶이 짐을 지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언제나 자기 짐을 지라고 하신 것은 괜한 수고를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거듭난 생명이 되면 누가 뭐라 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의 자리를 떠난 그릇됨에서 회복되도록 예수님과 같이 자기 짐을 지고, 그런 형제들이 모여 서로가 되면 서로가 짐을 지는 관계가 되며, 그 짐은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기에 자기 짐을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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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성과나 공로를 열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시는 마음의 표현이다. 성령의 열매는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위로 당신 앞에서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나 생각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즉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분명하게 보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온전히 구속하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보이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보고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을 바라실 리는 없다.

 

성령의 열매는 열매라는 말을 통해 생명의 개념이고 생명이 본성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분명히 했고, 또 생명이 그 본성을 나타내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법으로도 금할 수 없다는 말로 그 온전함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많은 이들에게 연결이 멀어 보일 수 있지만 사람들이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은 결국 육신의 욕심과 육신의 정욕에 이끌린 것이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이는 앞선 여러 글에서 사람이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여기시는 마음이 육체의 형편으로 나타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즉 육신이 평안하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육신을 깨끗하게 하면, 육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면 육신이 평안해진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정과 욕심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같이 육체로 의로워지거나, 육신의 평안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시는 증거로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육신의 평안함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증거라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된다. 이런 단순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에 이끌린 어두움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성령으로 행하려고까지 노력한다. 그러나 이같이 어두움 속에서 구하는 모든 것이 바로 헛된 영광이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갈 5:26)

 

헛된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다투는 이유는 육신의 평안을 구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평안은 육신의 정욕에서 비롯되었고, 한 육신이 평안하려면 다른 육신이 수고해야 하기에 욕심이며, 그런 욕심이 충돌하기에 서로 다툰다.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툰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들의 주장 앞에 자신을 내어주시며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위하여 서로 다툰다. 그러고도 자신을 구원받은 사람이라 말한다. 헛된 영광에 매몰된 사람의 모습일 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람, 곧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에게 육신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도구나 증거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삶을 표현하는 실존이다. 그리스도로 난 사람은 곧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고 말씀하신다. 성령의 열매는 바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 그 자체다.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 난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기쁨이 육신으로 보답받기 위해 육체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살면 되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는 모습이다. 그리고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의 말씀을 수동적으로 순종하여 들음으로 그 말씀이 그 사람 안에 있어야 일어난다. 성령이 난데없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생명으로 잉태케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심기려면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한 약속, 계획, 창조 목적이 자신의 존재 목적임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기에 그 믿음이 있어야 성령께서 생명이 되게 할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거할 수 있다. 그 믿음으로 심긴 하나님의 말씀, 그것을 성령이 생명이 되게 하시면 그 사람의 삶이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되고, 그 삶의 모습이 바로 성령의 열매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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