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02

(갈 2:11-21) 율법으로 인하여 죽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5. 27. 15:35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자신이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말한다. 죽었다는 것은 다른 면에서 보면 가치가 없어진 것, 목적이 상실되거나 목적 안에서 수명을 다한 것이라는 의미다. 성경적 의미에서 보면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살고 있지 않으면 육신이 살아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늘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그렇고, 또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뜻대로 잘 살고 하나님의 계획대로 수명을 다하면 육신의 장막을 벗는 육신은 죽지만 영혼이 영원함에 들어가는 것도 완전히 반대지만 죽었다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율법 역시 그렇다. 율법 안에 있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운 존재가 아니므로 죽은 것이고,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졌다면 사람이 아닌 율법이 그 목적을 다한 것이므로 율법이 죽은 것이 된다. 율법이 죽었다는 것은 율법 안에 살던 사람의 세월과 가치관이 죽은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을 예식으로 표현하면 세례가 된다. 율법 안에서 살면 사람이 죽은 것이고, 율법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율법으로 살던 세월을 버리니 율법과 그 가치관을 귀하게 여기던 자아가 죽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으로, 또 육체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종말적 전개가 아니다. 죽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기에 영으로 죽은 상태지만 육신으로 살아 숨 쉬는 세월이 허락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본성으로 삼는 거듭난 생명이 되기 위함이니 영적으로 죽은 세월은 거듭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율법으로 죽는 것은 율법으로 살던 세월이 무익하니 모든 것을 끝내고 포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의와 뜻이 본성이 된 세월을 사는 거듭난 생명이 되기 위함이다. 죽는다는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 죽고 다시 나기 위함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육신의 죽음을 맞는다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십자가에 그리스도에 못 박혀 죽은 것이 나를 위하여 자기 몸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바울 사도가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의 이 고백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먼저는 자신은 율법과 육체로 의로워지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고 고백한다. 십자가가 죽음의 이유고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행위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본질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어떠함으로 의로움을 논하는 유대인과 사람들이 육신으로 보잘 것 없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용잡할 수 없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육신의 행위나 어떠함으로 의로워져야 한다는 법을 인하여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바울 사도 자신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역시 육신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에 순종한다는 것이자, 육신을 가진 인생은 육신으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찬양을 부르고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고자 한다면 육신의 어떠함을 인하여 신앙적 가치를 부여하는 자신의 가치관과 세월이 끝나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그렇지 않다. 목사라는 <신분>에 대한 생각, 성령의 <은사>를 행한다는 사람에게 신앙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그렇다. 그런 가치관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치관인데 오히려 경건한 것이 되어 있다. 그러면서 갈 2:20절을 가사로 한 찬양을 한껏 감정을 넣어 부른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외식이며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 사도의 고백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 다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육신의 어떠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순종하고 믿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육신으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이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신이 목사나 장로라서 의롭게 되거나 의롭기에 목사가 되고 40일 금식을 했기에 영적인 능력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생각들 앞에 심판을 받아 육신으로 의롭지 못하다고 쓸모없는 죽임을 당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뿐 아니라 바로 그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 육신의 어떠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고 믿는 이들에게 심판을 받아 십자가를 지신 분이 바로 하나님께서 가장 의롭게 여기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요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므로 우리가 그것을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고, 그 믿음이 예수님과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로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는 아들이 되는 것이 성경의 법이고 우리가 의로워지는 법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염려에 대하여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21. 5. 26. 15:49 Writer : 김홍덕

사람은 늘 염려하는 일이 있다. 그래서인지 성경은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늘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연려하는 일이 마치 사명이라도 되는 듯이 쉬지 않고 염려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사람으로서 너무나 벗어나기 힘든 염려를 성경은 왜 하지 말라고 하실까?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 성경대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염려는 의외로 사람이 가진 자기 기준이나 기대를 인하여 생긴다. 사람이 하는 염려라는 것은 사람이 가진 자기 생각이나 기대 혹은 기준과 다른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생각이다. 이는 사람이 자기 뜻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희망이라고 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는 염려는 모두 자기 생각이나 기준이 원인이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의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모든 생각과 근심 그리고 궁리가 염려다.

 

반면에 성경은 우리에게 늘 자신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에 순종하기를 바라신다. 하늘의 땅 곧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의 말씀은 육신의 일이 잘못될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본질이 아니라 자기 기준으로 인생을 바라보지 말라는 의미다. 성경이 하지 말라는 염려는 이것이 본질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갈 2:11-21)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5. 23. 11:52 Writer : 김홍덕

바울의 광야 생활은 그에게 세례였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제자들의 상당수가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였기에 그들 대부분도 세례를 받았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무엇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셨다. 하지만 바울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우리가 세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형식에 있지 않다. 물에 들어갔다 와야 한다는 주장을 기준으로 침례교 장로교 등으로 갈라지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일이다. 세례의 핵심은 고백이다. 어떤 세계, 어떤 가치관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세례의 핵심이다. 그리고 살 수 없는 가치관의 뿌리가 바로 율법이다.

 

이 율법에 대하여 앞선 장에서 율법은 구속력이라고 설명했다. 뭔가를 해야만 결과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인하여 그 뭔가를 행하는 생각이 바로 율법이다. 기도를 하고 운전이나 일을 해야 하나님께서 잘 보살펴 준다고 한다면 기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율법이다. 세례는 바로 그런 가치관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광야에서 살았던 세월을 이야기 한 다음에 율법에 대하여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것이 진정한 세례고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자기 안에 생명과 본성이 되었다는 고백이다. 율법에 관하여 연갑자들 보다 더 열심이었던 바울 사도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이 진정한 세례이고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복음의 본질이 자기 생명이 된 증거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갈 2:19)

 

그리고 바울 사도는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 죽는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였다고 설명한다.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말씀을 준행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죽음이 헛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자신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했고 모든 선교의 핵심 중의 핵심이 이것이므로 자신이 율법을 다시 세운다면 자신 역시 범법자가 된다고 말한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순순히 끌려가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만의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절대적인 선함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세상의 악함에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이 자기 안에 있게 된 사람이어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신을 악한 것 앞에 내어주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스스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람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사람을 교훈하려 한다. 세상의 악함을 성경과 신앙으로 바로 잡으려고 한다. 그렇게 세상을 바로 잡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피라미드 꼭대기로 보내려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가장 낮은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세상의 악함이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에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렇게 했더니 드러난 것이 물과 피, 곧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삶이 된 것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본질과 반대로 신앙으로 세상을 능동적으로 이기려고 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신앙의 능동성은 무엇으로 의로워질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 행함이라는 능동성으로 의로워지려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연갑자보다 율법에 더 열심인 이유로 그리스도를 핍박했다는 것에서 진정한 능동성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믿음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다.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 역시 전혀 능동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세상을 신앙으로 바꾸려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훈계하려 드는 이들은 그리스도로 죽은 사람도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아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장 앞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이라는 것을 망각하면 안 된다.

 

믿음은 그 어이없는 예수님의 모습과 삶이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이 내 삶의 목적이라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이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기준 앞에 죄인이 되는 어이없는 상황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또한 자신의 운명이요 본성이 되어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 본성의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지극히 능동적인 자신의 과거를 소환하고 그것을 떠난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고 고백한다. 율법 아래 살 수 없고, 능동적인 신앙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관철시키는 것을 의로 여기는 가치관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이고 세례다. 그런 자신을 고백하면서 율법과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전하는 말씀의 증거를 삼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에 대한 진정한 고찰과 묵상 없이 함부로 뇌까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을 의롭게 여기는 것 앞에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님의 본성이 내 존재와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자 증거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본성이 같은 생명이란 의미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이유다.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삶이 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한 존재이기 때문에 의롭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