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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3:15-22) 하나님의 약속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6. 19. 14:34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은 동시 혹은 상호 공존할 수 없다. 약속은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주신 것이고, 율법은 범법자를 위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약속과 율법이 다른 성문(成文)도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 그 하나다. 하나님이 주신 성경은 하나인데 어떤 이들에게 이것은 약속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율법이자 심판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이 되어 그 생명 본성이 육신의 삶을 이끄는 사람에게 성경은 말 그대로 약속이다. 자신의 모든 삶이 성경으로 증명되니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모두 약속이고 자기 심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의 증거다.

 

반대로 성경을 자기 육체로 지켜내려는 사람은 단 하나의 예외 없이 성경의 심판을 받는 사람이다. 성경을 보고서 자신이 더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나, 성경을 보고 이대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성경말씀으로 자신이 심판을 받고 있다는 증거다. 성경을 읽었더니 자신이 부족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 심판이고, 부족하니 육체로 노력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아 행동하고 노력한다는 것은 징벌이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약속의 말씀인 성경으로 심판을 받는 이유다. 아예 교회를 다니지 않고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성경을 읽고 전도에 대한 압박을 받는다. 성경대로 육체가 행하지 않으면 자기 육신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절대로 원치 않는 재앙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즉 육신의 행함을 드려 육신이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얻으려고 하는데, 정작 자기 육신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부족함을 알기에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심판을 받는다. 그래서 범법자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알게 한다. 그러나 이런 분명한 율법의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려고 그렇게 노력하면서도 단지 자기 육신이 신약시대를 산다고 자신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모든 것을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본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이 약속은 쌍방이 정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하신 약속이기 때문이다. 즉 이 약속은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계획이고 피조물에게는 존재의 목적이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신 하나님의 그 계획이 사람에게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약속이다.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역시 이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 역시 이것이다.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 이루시려고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고 예수님께서 육체를 깨트려 육신이 된 말씀을 드러내셨다. 즉 이 약속은 누구나 믿음만 있으면 이루어진다. 이 약속의 성취는 아주 쉽다. 믿음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수동적이란 내가 할 게 없다는 의미다. 믿음은 이래서 쉽다. 이 약속이 이루어지면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심령 안에서 약속이 성령의 능력으로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은 본성이 있다.

 

그 본성의 이름은 그리스도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한다. 그리스도로 났다면 당연하게, 너무나 당연하게 그리스도로 산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전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씀하고 있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심령에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의 본성대로 살면 의도하지 않아도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되기까지 사람이 할 일은 하나님의 약속이자 십자가에서 드러난 인생의 존재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목적임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으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앞에 내 육신의 수고와 심지어 목숨까지 내어줄 수밖에 없는 본성이 바로 내가 가져야 할 유일한 본성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능력만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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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약속은 육신의 풍요가 아니라 인생의 존재 정체성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지시할 땅 역시 흙으로 창조된 인생의 존재 정체성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자리가 자신의 정체성임을 순종하고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이유가 여기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닷가 모래처럼 많은 자손 역시 육신의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의 존재 정체성을 믿는 모든 이들이다. 당연히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법이다. 그래서 예수 이외에 구원받을 다른 이름(정체성)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바울 사도의 한결같은 복음은 이렇게 온전하다.

 

바울 사도는 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 율법의 근원을 설명한다. 율법은 범법자, 곧 하나님의 약속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아브라함의 일과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까지 430년이라는 세월이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다. 하나님께서 율법보다 430년 전에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약속을 주셨는데 의롭게 할 법이 없어서 율법이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으로, 율법을 지켜서, 성경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롭게 여기실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는 온전한 것이 이미 있는데 온전하지 못한 것, 일만 가지를 지키다가 단 하나만 어기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는 온전하지 않은 것을 주실 이유가 없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며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

 

따라서 율법은 온전하지 않은 자들을 위한 것이다. 바울 사도도 율법은 범법함으로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지 그것을 준행하므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다. 문제는 이 범법자가 오늘날도 넘친다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이 범법자인 것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의로운 존재라고 믿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범법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이신 인생의 존재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순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사람들의 생각에 좋은 믿음이 범법이다. 순종과 믿음은 하나님이 정한 것을 수용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수용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 여긴다. 사울 왕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이 종교적이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자신의 그 믿음이 범법임을 알지 못한다.

 

사실 율법이 범법자를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본질적인 증거는 율법 그 자체에 있다. ‘~ 행하라라는 율법의 구조와 본성이 행위를 요구한다. 행함을 요구한다는 것은 법대로 하지 않으면 벌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동전의 앞뒤와 같이 분리될 수 없다. 율법대로 한다는 자체가 자신이 의롭지 않다는 시인하는 것이고, 반대로 하지 않는 것은 법을 어긴 것이다. 따라서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는 마음의 요구가 있다면 범법한 상태에 있다는 증거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의롭지 않음을 시인하는 것이고, 노력으로 100% 이루지 못하면 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이미 의롭지 않다.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그 노력이 없는 상태는 성경대로 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미 이룬 사람은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하는 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대학에 들어가려 노력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할 이유가 전혀 없다. 거듭난 생명이니 그 본성대로 살기만 하면 된다. 그냥 그렇게 살 뿐인데 그 삶을 성경에 비추어보니 모두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뿐인 것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다. 이에 미치지 못하면 단 하나의 예외 없이 범법하였기에 의롭지 않아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다. 성경대로 살려고,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겸손을 가장한 신앙을 가진 범법자 때문에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 66권 전체를 율법으로 만들고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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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은 말 그대로 믿음의 조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의 조상에게 약속하시기를 그 후손이 바닷가의 모래보다, 하늘의 별보다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가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이라는 주제 속에 아브라함을 끌고 온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육신의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두고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인지 논하고자 함이다. 물론 바울 사도의 의도는 육신의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바울 사도는 단호하게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찌어다(갈 3:7)

 

바울 사도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돌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사람은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믿음으로 난 자들이라는 의미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

 

이로 보아 비록 육신의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통행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나, 어디까지나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일 뿐 눈에 보이는 육신의 혈통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지나 본질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관계로 육신의 혈통이나 성별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 나눈다. 이런 어리석음은 단지 중동지방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예수님 및 사도들의 시대나 그 이전 세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날도 목사라는 육신의 신분 그 자체로 하나님의 종이라는 권세를 쉽게 줘 버린다. 그러다 목사나 장로들의 일탈 앞에 허무해 하기도 한다. 그런 신분이나 자격이 하나님의 의로움을 담보하지 않는다.

 

바울 사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것이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던 내용, 곧 믿음의 대상은 육신의 자녀가 번성하는 것이나 아브라함 자신과 자손이 육신적으로 풍족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약속은 쌍방이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약속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하시겠다는 것을 수동적으로 믿고 순종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당연히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오늘날 사람이 자신이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근원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과 다르다. 우선 방향이 반대다. 하늘의 뜻이 땅(흙으로 창조된 사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고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신다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장사>라고 하셨고, 사무엘은 제사보다 순종이 나은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은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지 불분명하다. 이런저런 말들을 하겠지만 결론은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이 잘 된다는 것이다. 육신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육신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한다. 육신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살 동안에 복을 주신다고 믿는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일반적인 믿음의 내용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육신으로 의로워지는 신앙의 본질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의 약속은 육신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것은 지시할 땅으로 가라였다. 지명을 일러 준 것도 아니고, 좌표나 방향을 알려 주신 것도 아니다. 그냥 막무가내로 지시할 곳으로 가라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은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것은 지시할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순종하겠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흙으로 지음 받은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정체성이 나에게 유익하고 의미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존재 목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뜻이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임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운명이 내 인생의 목적이고 의미다. 그리고 그 약속의 실체는 예수님께서 보이셨다. 십자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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