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17-29) 율법이란 무엇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23. 15:40 Writer : 김홍덕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십계명과 또 유대인들이 구약시대부터 지켜오는 신앙적 규범인가? 아마도 대부분은 그렇게,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율법은 구약시대의 규범일까요? 그리고 지금은 신약시대(예수님 오신 이후)이니 율법은 없고 복음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율법에 관해서 이 시대 사람들이 읽고 묵상하게 하실 이유가 없으니 성경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요도 없는 것을 지키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오늘날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율법은 어떤 조문은 율법이고 어떤 말씀은 율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말씀하신 의도를 모르고 행동으로 지키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자기 육신으로 표현되는 방향성의 법을 가지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달리 성경말씀을 육신으로 지켜내어 의에 이르려고 하면 예수님의 말씀도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든 예수님의 말씀이든 심지어 세상의 어떤 사상이라도 자기가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자기 육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라도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닌 다른 것을 의로 여겨 몸으로 행하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십계명이나 모세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이렇게 해야 의로운 것, 혹은 바른 것, 혹은 선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주장하고 그렇게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율법입니다. 


이것을 두고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바울 사도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일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로 나타나느니라(롬 2:14-15)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신앙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하나님을 알고 믿든 아니든 누구나 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율법에 대한 정의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도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든 아니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법은 바로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 곧 사람 스스로가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 생각하는 기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생각하기를 ‘사업이 잘 되면 좋은 차를 탄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사업의 형편과는 무관하게 좋은 차를 타려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사업이 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기준이 법이 되어 모든 것이 결정되고 결국 자신도 그 법 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리해서 좋은 차를 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이 없으면 그 일로 화가 나거나 낙심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떤 팀이 어떤 순위에 있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있으면 늘 그 팀의 순위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응원한다는 것은 이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 바람대로 이기면 선한 일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져서 순위가 내려가면 패한 일,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도 굴뚝을 두 사람이 청소했는데 한 사람은 얼굴이 검게 되었고, 한 사람은 검게 되지 않았는데 얼굴을 씻으러 간 사람은 자기 얼굴이 검게 된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눈으로 본대로 상황을 인식하고, 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2장 17-29절에서 율법이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에 대하여 길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수치를 느끼는 것이나, 죄로 여기는 것이나, 또 자랑하는 것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기 안에 그에 대한 기준이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준이 사람에게서 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과 같으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사람은 업그레이드 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들어진 아담과 동일한 존재고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보는 기준이 자기 안에서 나와서 자기를 보니 부끄러워지게 된 것이 선악과로 인함이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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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사람은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다고 했는데 무화과는 유대인의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육신인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기준이 자기 안에서 나와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자기 육신의 연약함을 감추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가치관, 곧 무화과로 몸을 가리는 가치관이요, 육신의 연약함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행함으로 감추려는 가치관으로 보면 누구나 죄인이 된다는 것을 발가벗겨진 체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그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 율법의 가치관으로 보면 처형해야할 죄인이지만 의외로 바로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모습이고, 그 모습이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에 죽음에 두실 수 없는 법이 표현되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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