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늘 신앙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신앙이 학문이 되어 신학이라는 것이 생겼겠습니까? 제가 늘 “신앙이 왜 학문이 되었느냐?”며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신앙은 의문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主)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생명에 관한 것이기에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자기 본성으로 사는 것을 학습하거나 의문스러워하지는 않습니다.


바울 사도도 이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함이라(롬 2:29 상)

진정한 유대인은 육신에 할례를 받았지만 늘 신앙에 의문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 곧 속사람에 유대인이라는 증거인 신령한 영이 있어 의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 가기 전에는 ‘군에 가면 하루 종일 뭐하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이라는 세계가 제게는 없는 것이기에 그런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에 다녀 온 이후에는 그런 의문은 없어졌습니다. 제 안에 군대라는 할례, 곧 군인이라는 정체성이 증거로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가지려해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포경수술입니다. 남성의 성기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시간만 끌다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다음에 얻은 아들 이삭의 후손이어야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께서 약속한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껍질 곧 외모와 육신의 어떠함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심입니다. 그것이 할례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서 그것이 아들로 나타나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런 사람의 증거가 바로 할례인데, 유대인들은 반대로 할례라는 형식의 증거가 하나님 앞에 의로움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신 것은 마음에 눈에 보이는 형식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이면적 곧 본질적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 육신에 할례를 받음이 곧 의로움이라는 착각에 빠졌고,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의를 할례를 표현하셨는데, 오히려 외모가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속에서 밖으로 향하는 믿음이 아니라, 겉을 바꾸어 속으로 향하고 본질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너무 의문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모든 본질은 속사람에게 있는데 속은 어떤지 모르면서 겉만 어떻게 하면 속이 바뀐다고 여기니 얼마나 의문스러운 것이 많겠습니까?


자꾸 군대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내무반에 갓 들어온 신병이 처음 휴가 갈 때면 고참들이 군복을 2,3일씩 반복적으로 다려주고, 군화도 정말 공들여서 광을 내어서 입히고 신겨서 휴가를 내보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참들이 며칠씩 수고해서 입히고 신겨도 별로 멋이 없습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말년 병장은 대충 군복 빨아서 뚝뚝 털어서 단추 풀어헤치고 입고 있어도 군인의 멋이 납니다. 그게 정말로 신기할 정도입니다. 군복 속에 있는 몸이 군인으로 내공이 쌓여서 그렇습니다. 속이 늘 겉보다는 우선입니다.


그렇듯 속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수고도 필요 없고 의문스럽지 않습니다. 어린 병아리가 마당에 놀다가 꿩이 날아가면 놀라기는 해도 숨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매가 날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숨습니다. 왜 숨어야하는지, 아니면 엄마 닭으로부터 위험한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책으로 배워서가 아닙니다. 자기 본성이 그래서 그냥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병아리를 볼 때 왜 그러는지를 알려면 의문이 있고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는 병아리의 유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율법과 성경의 모든 말씀과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 그 어느 것도 절대로 행동강령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대로 행동하면 그 말씀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이루어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본성적 행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에 성령이 있으면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에 의문이 있습니까? 공부가 필요합니까? 그냥 사과나무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경우도 배가 열리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음과 같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무한히 말씀하시는 그 의가 있으면 그 모든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과나무가 배를 맺을 수 없듯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것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의문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의문이 있다면 단 한 가지만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것은 ‘왜 생명의 세계에 이런 의문이 있는가?’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의문이 없습니다. 하물며 학문이 필요하겠습니까?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에는 의문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할례 곧 율법의 목적이 있는 사람은 율법에 대한 의문이 없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데 어디서 의문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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