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17-29) 기독교인과 율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21. 10:13 Writer : 김홍덕

앞선 글에서 율법이라는 것이 구약시대의 십계명과 또 그에 속한 계명들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시대적으로, 달력의 시대 곧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예수님 오신 이후의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율법의 시대가 종식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살더라도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신앙이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의 시대를 사는 것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과 교리야 말로 진정한 율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나 또 다른 바울 서신을 대하면서 그 안에서 ‘율법’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약 2,000년 전에 유대인들이 지키던 계명이나 오늘날 이슬람이나 또 이스라엘에서 전통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삶의 규범이라고 읽고 생각한다면 사실 그 말씀들은 오늘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복음의 시대라고 여기면서 복음 이전의 율법을 논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율법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바울 사도도 2장 14절에서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롬 2:14)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어떤 규범을 정한 조문이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안에서 ‘이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야’라고 규정하고서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안다면 지금 이 시대의 교회들이 가르치고 말하고 있는 복음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복음의 탈을 쓴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율법이라는 것은 어떤 계명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것을 행함으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기도 자체는 복음시대를 대표하는 신앙의 모습 같지만, ‘기도해야 한다.’ 혹은 ‘기도해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라고 하는 순간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에도 유대인,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책망하고 있는 유대인은 넘쳐납니다. 교회에 갔더니 ‘육신이 때로는 싫고 힘들어 해도 기도하고 성경보고 전도하고 봉사해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라는 설교를 하고 있다면 또 그런 설교에 ‘아멘’하고 또 그렇게 믿고 살아야 한다고 공감하고 있다면 그곳은 21세기의 느헤미야-에스라 성전이거나 솔로몬의 성전과도 같은 곳입니다. 당연히 그 신앙 공동체 속의 사람들은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유대인입니다. 육신으로 ~을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공식과 교리가 바로 율법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이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를,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에 온전한 존재이기에 이 육신을 하나님이 주신 용도와 다르게 하나님 앞에 인정받기 위하여 수고하는 도구로 쓰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든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다면 하나님이 온전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런데 왜 이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거스르는 불의며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유대인과 같은 모습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던 책망과 바울 사도가 책망하고 있는 유대인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던 바리새인들이나 바울 사도가 책망하는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이런 말씀들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욕보이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욕보이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도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자랑하며(롬 2:17)

이 말씀을 지금의 말로 바꾼다면 아마 이렇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아, 너희가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라고. 그리고 그 다음의 성경을 읽어 간다면 성경을 몸으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한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여긴 유대인들이나, 시대가 신약 시대이기에 자신들이 복음을 지키는 것이라 스스로 착각하기에 성경을 몸으로 지켜서 의로워지고, 또 그렇게 의로워지는 목적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육신의 삶이 복 받기 위한 것임을 교묘히 숨기는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이나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롬 2:23-24)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설명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기 신앙의 정체성을 자신들의 육신과 삶으로 성경을 지켜내는 것에 두고,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늘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랑하지만 결국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른 것 없이 행함의 죄를 범하므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모든 문제는 하나님 앞에 사람이 자기 육신의 행함과 삶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게 행함으로 의로워지려 한다는 것은 행함으로 도달해야 하는 어떤 기준이 있다는 것이고, 그 기준은 사람을 판단하고, 기준을 통과한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누어 당을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을 모르고 상실한 탓입니다. 먼저 사람들이 가진 이 육신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기 위하여 주신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향이 반대입니다. 나라 지키라고 준 총으로 내란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방향이 반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방향을 거꾸로 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자기 자신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로워져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기 육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맘대로 각색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존재 목적은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불의한 자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들이 되려면, 바울 사도가 책망한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서 어떤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한다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바른 것이다.’라고 사람들에게 또 세상에 주장할 리가 없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방향이 사람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생명의 방향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 유전자가 삶으로 행동으로 발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라는 형식의 행함으로 속사람이 의로워지는 역방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 마음,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의가 생명이 된 사람입니다. 


그 생명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삶의 목적과 이유라는 것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음 안에 있는 사람이 진정한 유대인, 곧 하나님이 택하시고 의롭게 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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