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1-16) 지금은 율법이 없을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20. 12:52 Writer : 김홍덕

로마서 앞부분은 로마에 있는 혈통으로 이방인인 사람들이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는데 유대인들이 유대인이라는 것, 할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세워서 복음도 그런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로 인하여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음 없는 사람이 되고 또 신앙적인 갈등 가운데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는 마음으로 바울 사도가 글을 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은 혈통으로 이스라엘인이라는 것 이외에 무엇보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과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자랑이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한 증거라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것은 실제로 그런 증거들을 있기 때문이지만 바울 사도는 그런 것을 모두 행함으로, 육신의 것 곧 형식에 관한 것으로 규정하였고, 그런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것을 책망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불의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다른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삶을 허락하셨으니 그 사람의 혈통이나 생김새나 성격이나 지혜로움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같은 피조물인 사람이 그것을 판단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는 의로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의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는가 하면 그것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의는 결국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면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행위의 바르고 그름은 율법으로 가늠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설명함으로서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의로 여기시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오늘 우리가 이 말씀들을 대하고 있다는 것은 지금도 이 말씀으로 깨달아야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사람들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 생각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본질이라고 여기고 가르치며 믿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적으로도 정말로 강조하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약성경에 있는 기도하라 기뻐하라 감사하라는 것과 같은 말씀들을 지키려고 애쓰고 노력하고 몸을 행함으로 지키려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단지 그 말씀이 신약성경에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율법이 아닌 복음을 듣고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명백한 착각이고 무엇보다 엄청난 신앙적 오류입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신약성경의 말씀대로 사는 것(행하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신약시대라도 자칭하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십일조를 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할례는 구약의 말씀이라 행하지 않아도 되고, 십일조는 부자가 되어야 하니 지켜야 한다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말씀도 행함으로 지켜서 의로워진다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행하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다 율법이 되는 것이고, 자기 안에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표현되다 보니 행동으로 표현되면 구약의 말씀이든 신약의 말씀이든 무엇이라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 또한 같은 말씀입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것이 먼저고 그것이 생명의 본성이 되어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으면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없으면 행함이 아무리 대단해도 불의한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법이고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말씀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와 같은 말씀을 읽고, 또 듣고서 자기 안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기뻐하신다고 하니 때로는 싫고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은 자기 마음의 갈등과 겨루어가면서 행하려고 하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은 다 율법 가운데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지 않으면 미안하지만 신앙의 발전이나 더 나아가서 거듭남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 안에 자기 삶을 바꾸는 새 생명이 없는데 거듭남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생명이 있다면 성경을 읽고서 지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그 생명이 자기 행동과 삶을 성경과 같이 만들기 때문입니다. 생명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고자 하는 신앙이 얼마나 율법적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통해서 또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시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그것을 말씀하셨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육신이 신약시대를 살고 있다고 복음이라 믿고 살면 그것은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착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로마서를 연구해도, 또 성경을 외워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 역시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그 의가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이것입니다. 사람은 겉을 바꾸어 속이 바뀌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먼저 속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법이 영이신 하나님께서 형식을 가진 사람으로 표현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법으로 사람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람도 그 속사람이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시고 생명으로 여기시는 것이 있어 그것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지키려고 하는 말씀이 신약이냐 율법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법이 무엇이냐가 율법인지 복음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자신의 의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삶으로 나타나는 방향성,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기에 그 의가 행함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 행함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 행함은 바로 하나님의 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성경을 보고서 그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의로워진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의 어떤 부분을 지켜낸다 해도 다 불의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지켜낼 수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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