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 - 율법주의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3. 04:00 Writer : 김홍덕

이 글은 아래 책 "질그릇의 선택"을 연재하는 글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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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린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 가진 인생을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해보니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약한 육신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관점을 가진 자에게 한없이 부끄러움이다. 그래서 그 부끄러움을 숨기 려고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특히 신약성경 속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이는 신학의 영향이 크다. 공부라는 <행위>로 성경을 대하는 신학은 그 자체가 이미 행위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상식인데 이 상식을 가리고 신학을 거룩히 치장하고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을 행위로 좇는 것은 거리낌 없이 복음적 생활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약성경의 말씀도 행위로 지키려 하면 율법이 되고 복음도 Have To가 되면 율법이 된다


하지만 그런 편법적인 노력들도 엄연히 아담이 무화과 나뭇 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한 것이다. 오늘, 그리고 모든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미리 아담으로 통해 말씀하신 것이다.


문제는 아담의 생각이 우리의 정체성을 보여 주러 오신 예수 님과 자신을 다른 존재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으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음에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 한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을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면 이단시하고 터부시한다.


이는 다분히 성경을 기반으로 둔 많은 이단을 인함이 크다. 하지만 자신이 예수다, 혹은 하나님이나 신이라고 주장하는 이단 들은 예수님의 권세나, 능력이나, 지위를 도용할 뿐 예수님의 생명 이나 정체성,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어 십자가를 지신 본성이 같으 므로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단들의 생각은 낮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원이 다르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 가를 지는 본성을 가진 동일한 생명이 된다는 것이지 복제되듯 동일한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조차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된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으로 생각 한다. 사람은 예수님과 같아질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으니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경건한 신앙 이라고 가르치고 믿고 행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신앙의 실체다.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온전하다면 노력할 필요가 있는지를. 노력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을 부족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그것을 감추거나 메우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끊임없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다. 잎이 마르면 또 잎을 따서 옷을 만들어야 한다. 무한 반복이다. 성경대로 살겠다 다짐하고 실패하고 회개하고 다시 다짐하고 노력하는 반복과 같다.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가죽으로 옷을 해 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사람의 무한 반복하는 노력을 쉬게 하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하셨다고 믿으면 서도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은 입으로는 “예수님의 구속을 믿노 라.” 말하지만 실상은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끊임없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예수님과 같지 않은 자신을 메우려는 것이다.


예수님 같이 되려고, 예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구원을 믿지 못하는 삶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 노력>하는 사람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같이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성경을 행위로 지켜 의로워지려는 무화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사람이다. 그것은 자신을 부끄러운 존재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며, 그렇게 판단했다는 것은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다. 즉 선악과를 먹었고 아직 그 문제를 벗지 못한 상태이다.


이것이 율법주의 신앙이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과 하나 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달력의 시대가 예수님 오신 이후의 세월을 산다는 이유로 자기 신앙을 복음적이라 생각하 고, 또 구약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 라는 기만으로 복음적 신앙이라 생각한다. 성경을 모른다는 부끄 러움에서 시작한 공부라는 행위의 산출물인 신학이 이를 붙들고 있어서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신앙은 서기 30,000년에 살아도 그의 신앙은 율법주의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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