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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죽음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6. 11:30 Writer : 김홍덕

성경의 기록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살리신 죽은 사람은 3명이다. 야이로의 딸(마 9장, 막 5장, 눅 8장),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장), 그리고 나사로 (요 11장)이렇게 3명이다. 물론 각각의 사건들 안에도 많은 하나님의 교훈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은, 그 직임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람을 살리셨는가? 사람들이 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인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리와 목적을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이며, 하나님과 사람은 어떠한 관계인가 하는 것을 회복시켜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나는 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모든 생애는 십자가와 부활에 집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이고, 죽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곳이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회복되는 자리인 것이다.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보며, 이것이 옳다 저것이 악하다 판단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는데, 사람들이 보니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영 어설픈 인생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세상에서 위대하고 고상하고 예의 바르고 반듯하며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라에서도 알아주는 가난한 동네인 나사렛에 사는 목수의 아들이 나타나서는 안식일도 맘대로 범하고, 성전에서는 상을 엎어 버리고, 가는 곳 마다 스스로를 거룩하게 여기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뿐 아니라, 세금도 잘 내지 않는 아주 형편없는 행태를 보이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자기를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소리를 하니 그들이 볼 때는 어이없는 개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어이없는 말들이 자신의 하나님을 모욕한다 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 버린 것이다.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가 하면,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생각은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의 아담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기 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모든 것은, 마치 아담이 스스로가 벗은 것을 정죄하여 무화과로 몸을 가리듯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모습은 부끄러운 모습이고, 사람이 저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여 버린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달리시게 된 이유이고 죄목인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이 악하다고 해서 처형했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원래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악과를 먹기 전의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이다.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전부터 벌거벗고 있었던 자신을 정죄함과 같이……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와 그 모습을 자세히 보고 그 모습이 나의 모습과 같다고 여겨진다면, 그것이 내 모습이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다면 나의 정체성도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를 먹기 전의 모습,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어떤 선악의 기준을 들이대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저게 바로 나의 모습이다!”> 인정이 되면, 하나님과의 방향성과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이 회복되어 수리된 시계와 같이 죽음 가운데서 구원을 얻게 되는 그것이 바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권능인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신분이 무엇인가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된다는 것은 곧 그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 분이신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이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어떤 이 안에 있는 보이지 않던 것이 형상화 된 존재를 우리가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는 것, 즉 하나님 어떤 분이신지 표현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바라시는 본연의 관계성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라는 것은 위대하지도 않고, 추악한 죄인의 틀에 박힌 죄인의 모습인데, 그것이 어떻게 나의 모습일까 생각해보면 금방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아도,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법을 보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가 연약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를 늘 단련하려 한다. 하지만 나를 단련해야만 제대로 된 것이라는 법 앞에서 우리는 늘 죄인이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모세는 간음하지 말라 했는데,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다 간음한 것이라고 하시고, 살인에 관해서는 사람을 보고 욕을 하면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이 자신을 다스려서 간음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거나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그 마음 안에 음욕과 살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본성인데, 그것을 제어하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다. 즉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이다.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대한 말씀이 있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하늘까지 탑을 쌓아서 하나님께 이르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벽돌을 만들었다고 했다.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굽자는 것은 사람을 단련하자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흙은 사람이다. 그 흙을 벽돌로 만들었다는 것은 가공한다는 것이고, 불에 굽자는 것은 단련시키자는 것이다. 즉 사람 안에 연약함을 없애고 그것을 쌓고 모아서 하늘에 이르자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관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 예수님을 심판한 그 법 앞에 서면 다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어떤 분야에서 노력해도 1등이 되기 어렵다. 1등이 싶어 위를 보면 또 위에 누군가가 있다. 늘 옥상 옥인 것이다. 그러다 설사 1등이 된다 해도 곧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1등이 뭔가, 그 아래의 모든 등수에 있는 사람을 이겨서 죄인을 만든 자리가 1등인 것이다. 도덕에 관해서도, 재물에 관해서도, 공부에 관해서도 가도가도 끝이 없고, 끝에 이르지 않은 모든 인생은 다 1등이 되는 법 앞에서 죄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심판한 법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 박은 사람들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시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종교적인 규례를 잘 지켜야 하나님의 아들이지’라는 가치관 앞에 서면 누구나 죄인이 된다. 우린 누구도 성경에 나오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 모든 것을 지키다가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것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을 문둥병에 관한 성경을 통하여 확인했다. 또한 세상적으로 성공해야 왕이 될 수 있다는 가치관 앞에서도 우리는 늘 죄인이다. 누가 어느 곳에 종사한다 해도 언제나 위에 누군가가 있고, 또 항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또한 우리가 그렇게는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태초로부터, 이 땅에 예수님께서 사람이 보는 형태로 오는 날까지의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 자신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요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심판 받으신 그 법 앞에서 다 죄인이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이것이 너의 모습이다 하시는 것 안에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심판 받으신 그 법대로 심판 받는 존재이지만, 그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 발견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존재 목적이 회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말 자체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직임이고, 또한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에 있었는데,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것이 발견됨으로써 나도 살아나는 존재가 되는 완전한 치유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과 나의 삶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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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죽음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3. 10:19 Writer : 김홍덕

지금도 세상에는 NGO와 같이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정의구현 사제단이다 뭐다, 또 무슨 단체다 하며 그 수를 다 아는 사람도 세상에 없을 만큼 많은 소리들이 있다. 그들의 주장을 다 하나로 모으면 <잘못되었으니 고치자 !> 그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고치자고 한다는 것은 뭔가를 보고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선행되었기 때문에 고치자고 하는 것이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데, 왜 그런 소리를 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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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일을 보고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마음에 어떤 것은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는 판단 기준이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선악과라고 하는 것이다. 아담도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벌거벗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스스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고, 그 마음 안에 벗고 있는 것은 악한 것이고, 입고 있어야 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무화과로 몸을 가렸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도 신혼 부부라면 서로가 벗고 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에덴 동산이 둘 밖에 없는데 그게 큰 문제가 아닌데도 그 마음 안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가렸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기 전과 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있는 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전혀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서 사람이 세상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주장하고, 또 어떤 것은 잘 되었다, 어떤 것은 잘못되었다 하는 관계로 방향이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이 수동적인 관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나에게도 꾸준히 정치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의 동참을 독려하는 문자를 보내는 후배가 하나 있다. 그런 문자를 받을 때 마다 나는 바울의 말씀을 생각해보곤 한다. “하나님이 지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는 말씀을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세상이 아무리 잘못된 것 같아도, 다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세상을 방치한 듯이, 아니면 아예 하나님이 무능한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부르짖는 것이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엄청 사람을 많이 죽이셨다. 성경에 나오는 기록들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노아의 홍수만 해도 다 쓸어버리신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실 그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목적하신 경륜 안에서 다 알아서 경영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 앞에서, ‘사람을 그렇게 죽여서야 하느냐?’, ‘그럼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에 있느냐?’, ‘저렇게 불의한 일이 일어나서 부녀자를 약탈하는 것이 옳으냐?’며 이것을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고 나서자고 선동하는 것이다. 이는 방향성이 아주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한 목적을 이탈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멈춰 버린 시계와 같이 죽은 것과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그럼 사회적인 문제를 방관하는 것이 신앙이냐?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다 문제는 같은 것이다. 문제가 생긴 이유가 무엇인가? 전쟁이 났다면 그것은 일으킨 주체가 침공당한 나라를 볼 때, 자기는 선하고 저 나라는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회적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항상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선하다고 여기는 것이 자신의 이익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문제는 뭔가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거나 소란스럽게 한다거나 외치거나 하지 않는다. 뭔가가 옳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것에 대응하는 것도 동일하게 그것은 악하다고 하면서 대응하는 같은 싸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볼 때, 이런 모든 동일한 싸움과 갈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죽은 자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방향성이 틀어지고,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의 자리를 벗어나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 하여, 위대한 것을 추구하게 된 상태를 죄라고 한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죄와 사망에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죄라는 것은 자기의 자리를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하말티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서 보듯,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처럼 위대해 지려고 하는 자리로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선악과라는 것이고, 그렇게 자리를 벗어난 것은 고장 난 시계와 같이 생물학적으로 아무리 살아 있다고 해도 죽은 것이라는 말씀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 놓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람들이 범하는 살인이나 절도와 같은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려고 보내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의 죽은 상태에서 살려내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게 하고, 이 세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교훈을 얻고 의미를 부여하여 서로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어떻게 보면 많은 병, 정말 불치의 병을 고치는 것 보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치유의 진정한 완성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결국은 그리스도라는 직임이 죽은 자를 살리는 직임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육신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죽은 자와 같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직임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인 퍼포먼스를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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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죽음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3. 5. 2. 11:35 Writer : 김홍덕

모든 질병과 또 삶의 결국은 다 죽음이다. 이 세상에 이것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다. 사람도 생명체도 그리고 제품들도 다 그러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육신으로 보면 분명이 숨이 끊어지고, 호흡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의미를 상실하였을 때 그때가 바로 죽은 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존재의 의미, 그것이 사라지만 비록 몸이 살아 있다 해도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시계는 시간을 가리켜 주어야 한다. 즉 주인에게 맞는 시간을 보여줄 수 있어야 시계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그것을 ‘죽었다’고 한다. 아무리 외형이 멀쩡해도 그 시계는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의미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면 주인의 목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다.

 

성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사망 가운데 있다고 했다. 그 말씀을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숨쉬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태인데, 성경은 사람이 그 말씀을 읽는 순간에도 그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즉 육신이 멀쩡한데 성경은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상태 곧 사망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고장 난 시계와 같은 상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어진 목적을 버린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뿐 아니라 온 우주를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시려 하셨다. 사람은 어쩌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표현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표현이라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어떠한가를 표현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죽음이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듯, 생긴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셨다 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하셨지만 그것이 이런 모양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신데, 우리와 같은 모양을 가졌다는 말씀이 아니다. 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사람은 세상에 있는 것에 비하면 아주 약하다. 모든 동물 중에서 태어나서 자립하기 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가장 길고, 유일하게 혼자서 출산하지 못하는 동물이며, 동물과 견주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 밖에 없다. 육신의 경쟁력은 사실 별로 없는 존재이다. 반면에 인간은 온 우주를 그 마음과 눈 안에 다 넣을 수 있고, 그것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가 있을 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짐승들을 아담에게 데려 오셔서 동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하시는 만물 중에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는 말씀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춘수 시인도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이 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특성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나타내시려는 본성이다.

 

사람이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어떠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관계는 어떤 공통성에 서로가 동의할 때 그때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실 때도 사람이라는 이름과 의미가 이미 부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고, 그것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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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바위를 쪼개는 바람이나, 흙을 불사르는 불과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그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이미 다 하나님께서 번개와 태풍과 또한 육체적으로 뛰어난 동물들을 만드심으로 다 표현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표현해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그것이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한 의미 부여인 것이다. 마치 그 이름을 부르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그 의미를 알고 부여해가는 것에 그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품성은 볼품 없는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위대하고 강해지며 사람 안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욕망을 통제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배고파서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되려고>한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의 방향이 전환되는 반역이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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